# 268
회귀의 전설
268화. 화랑에서 (2)
“이모. 이미 구두 계약까지 끝났는데 갑작스럽게 다른 매입자라니요……. 이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희야 미안하다. 나도 한 푼이라도 더 건져야 해서 말이다. 요즘 주머니에 돈이 씨가 말랐다. 아들 녀석이 확 털어먹어 집까지 저당 잡힐 뻔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어머니 때부터 알던 세월이 있는데…….”
“그래서 아직 계약 안 했다. 내가 갈 때까지 장 서방이 시간을 끌 거야. 내 소유라 도장은 내가 찍어야 해.”
70대 초반의 곱게 나이든 노년의 여사가 전주희의 손을 잡고 연신 미안하다 말했다.
‘여우같은 할망구!’
엄마 친구였지만 상류층에서 신뢰를 쌓지 못했다.
고운 얼굴로 본처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재산을 한몫 챙겨 갤러리를 세웠다.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았지만 아들이 망나니였다.
본처가 자식을 못 낳아 기세가 대단했던 홍인대 사모.
아들 낳고 큰소리 뻥뻥 치던 모습은 사라졌다.
상류층이라 해도 천억 단위가 넘는 사업이 실패하면 타격이 컸다.
“아버지도 관심이 많으세요.”
“그래? 전 회장님은 미술에 별 관심 없는 걸로 아는데…….”
홍인대 사모가 빙긋 웃었다.
정보통을 통해 전주희가 갤러리를 노리고 있는 걸 뻔히 알았다.
헐값에 넘기지만 자존심은 아직 살아 있었다.
“연대에서 사회사업 차원으로 미술관 준비 중이에요. 그래서 작품들이 많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조용히 퍼지고 있는 비밀스러운 정보를 알려줬다.
“소문에 들었는데 진짜야?”
‘쯧. 저러니 망하지!’
눈빛에 욕심이 가득한 홍인대 사모를 보고 전주희가 혀를 찼다.
“그룹 차원이라고 제가 말했잖아요.”
그래도 애써 화를 누르며 설득했다.
싸게 후려쳐야 회장인 아빠에게 점수를 딸 수 있었다.
화랑소유를 떠나 그 후에 벌어질 사회사업의 관장자리까지 노렸다.
한번 관장이 되면 죽을 때까지 자리 보존이 가능했다.
그렇게 큰 사업은 아니지만 떨어지는 콩고물이 상당히 많았다.
그룹 비자금 창고로도 이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던 일이 틀어졌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에휴. 내가 경매만 안 넘어갔으면…….”
홍인대 사모가 입맛을 다셨다.
학교 자금까지 손대려했지만 교육부 감사가 심했다.
이것저것 정권 초반에 큰 사건치지 말라는 신호를 받았다.
은행 대출도 만땅이었다.
아들이 해먹은 돈이 무려 2,500억이 넘었다.
‘크게 한몫 챙길 수 있었는데…….’
홍인대 사모 오동숙은 아쉬움을 삼켰다.
연대가 나섰다면 두 배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이것저것 틀어막는 사이 경매일이 일주일 후로 다가왔다.
건물과 함께 미술품도 일괄 경매로 후려쳐 넘어가게 생겼다.
아쉬운 대로 일괄 매매로 넘기고 빚을 갚는 게 최선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전주희가 찾아오는 바람에 같이 차를 타고 화랑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관장님.”
마중 나온 큐레이터가 고개를 숙였다.
“장 교수는 어디 있어?”
“지하 수장고에 있습니다.”
“손님들하고?”
“네. 같이 계십니다.”
“주희야 우리도 가보자.”
“네…….”
탐탁치 않는 눈빛을 보내는 전주희.
‘누군지 몰라도 우리 연대가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겠어!’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대한민국에서 연대 그룹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아 했다.
오정처럼 치밀하거나 망한 안아처럼 독한 것은 아니었지만 연대도 만만치 않은 가문이었다.
전주희는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홍인대 사모 뒤를 따랐다.
지금 지하 수장고에 어떤 인물이 와 있는지 전혀 몰랐다.
***
왜 떠는 거야? 내가 잡아먹어?
세상에!
들춘 그림 안에 유령이 살았다.
공포에 질린 반 대머리 빡빡 아저씨.
푸른색과 보라색 질감으로 그려진 형이상학적 추상화 속에서 도망치려 바둥거렸다.
어항 속 물고기 같았다.
그림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이 보였고 하늘과 날개, 어둠이 그려졌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무리 쳐다봐도 그림의 정체가 짐작이 안 갔다.
- 내가…… 보여?
그림 안의 유령이 떨며 물었다.
“보이니까 물어보는 거 아닙니까. 뭡니까?”
- 나 안 무서워?
“살아 있는 사람이 무섭다는 거 몰라요?”
- ……영매야?
“그건 알 거 없고. 누구시냐고요?”
- 왜 내 말이 안 통해? 다른 인간들은 내 말을 듣는데 넌 누구야?
호기심을 바짝 보이는 유령.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사람들을 홀려왔던 것 같다.
이 화랑 대표도 그렇게 홀려서 이 그림을 들고 한국까지 온 게 확실했다.
“왜 그림 속에 갇혀있는 겁니까?”
- 지옥사자가 찾아와서 숨었다.
“죄 지었어요? 그럼 지옥 가야죠.”
유령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쿨 하게 대화를 나눴다.
- 무서워……. 나 아직 죽고 싶지 않아!
“죽었잖아요. 인정하고 죗값 받고 새 출발하세요. 언제까지 여기서 숨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유령 심리상담소 차려도 나 잘 먹고 살 것 같았다.
- 신들 세계로 다시 가고 싶어…….
“신이셨어요?”
어라? 이건 또 무슨 반전이지?
- 나 신이야! 신!
신이냐는 질문에 신을 강조하는 아무리 봐도 모자란 신.
그림에는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교수님 이 그림들은 가격이 얼마로 책정됐나요~?”
큰 소리로 물었다.
“그것들……. 한 작품 당 5만 원 정도 될 거야.”
씨익 웃음이 나왔다.
“들었죠. 한화로 5만 원이랍니다.”
나는 속삭이듯 확인시켜줬다.
“지금 환율로 미국 달러로 계산하면 40달러 정도 되겠네요. 유령 신님~.”
한마디로 당신 주제를 알라는 소리다.
겨우 5만 원짜리 그림에 숨어서 지옥을 두려워했다.
신이었다는 사실도 전혀 믿음이 안 갔다.
- 나 좀 데려가 줘라. 여기 무서워. 곧 그들이 찾아올 거야. 으으으으.
“신이라메요?”
- 쫓겨났어…….
“왜 포인트 다 떨어졌어요?”
- 너, 너 누구야! 어떻게 신계 비밀을 그렇게 잘 알아!
“신계 관련자입니다. 깊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포인트 낮은 유령들은 알면 다쳐요~.”
이 정도 신을 신 취급 하는 것도 이상했다.
별것 없는 신들의 세계다.
- 지, 지옥사자도 아는 거 아니지?
“혹시 들어는 봤나요? 리차드 강이라고 잘 아는 지옥사자 있습니다.”
- 헙!
유령 안색이 더 하얗게 탈색됐다.
그림 속에서 작아졌다 커졌다 난리를 치며 불안한 감정을 표출했다.
“아세요?”
- 걔가 날 쫓아다녀!
“고뤠요?”
리차드 강 저승차사가 부업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한국 땅에 왔으니 이곳 구역 담당자가 맡는 게 당연할 것이다.
- 나 좀 살려줘라! 나 다시 신들 세계 가고 싶어! 인간계나 지옥 둘 다 싫어!
“포인트 없다면서요?”
- 내가 공산당을 믿었다. 그래서 살면서 벌었던 포인트 많이 까먹었다.
공산당원이란다.
“왜 그러셨어요.”
- 내가 살던 시절에는 대부분 지식층이 그랬다. 타락한 왕정주의자들과 신흥 부자들은 시민들을 너무 착취했다. 공산당 이론은 유토피아의 환상 같았어. 하지만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내 친구도 배고파서 자살했다. 나도 굶기 싫어 죽으려고 했는데……. 작품이 팔려서 살아남았다.
“꽤 팔리셨나 봐요?”
지금은 5만 원 정도도 아까워 보이는 작품 같았다.
이런 걸 유럽 여행 중 구입한 장 교수 빙모도 취향 독특했다.
- 먹고 살만큼은 됐다.
“그런데 왜 위작 안에 계세요? 안 쪽팔리세요? 화가라면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야죠…….”
- 위작 아니야! 이거 진품이야! 내가 어느 날 깨달음에 도달해 창작한 《천국과 지옥》이라는 작품이야!
“그래요? 내가 보기에는 위작 같은데…….”
- 무슨 소리야! 오른쪽 하단에 이중으로 칠한 거 보이지? 그거 살살 긁으면 내 사인이 나온다. 빛의 각도를 따라 보면 더욱 선명해지지.
“뭔 대단한 작품이라고 비밀 사인까지 합니까?”
- 많이 비웃어라. 살아서는 내가 가장 잘난 줄 알았는데 죽어보니 알겠더라. 난 그냥 평범한 화가였을 뿐이었어.
이름도 모르는 유령은 고개를 숙였다.
신계 가서 제대로 한 방 먹은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림에 갇히게 됐냐구요? 그런다고 지옥사자에게 안 잡힙니까?”
- 당연하지. 여기는 내가 창작한 공간이다. 놈들이 오면 하늘과 땅으로 도망칠 수가 있어.
“에? 진짜요?”
- 상상력을 믿어라. 신도 너희랑 똑같아.
그건 아는 말인데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장착한 세상에서는 마음대로 활동할 수가 있다는 얘기였다.
호기심이 동했다.
이 유령 나쁜 유령 같지는 않았다.
“신계에서는 뭐하셨어요? 그림 그렸어요?”
제대로 질문을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잘난 화가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숨은 곳이 5만 원짜리 위작으로 판명될 정도라면 할 말 다했다.
- ……일당직 신선이었다.
“이, 일당직요?”
갑자기 퍼뜩 스치고 지나가는 신계 추방자 명단이 떠올랐다.
의뢰가 끊겨 신계에서 쫓겨났다는 몇몇 화가들의 이름.
- 휴우……. 피카소 그림을 담벼락에도 허락지 않다니……. 하아아. 빌어먹을 센스도 없는 신들 같으니라고!
“!!!”
이런 젠장! 뭐야! 진짜 피카소야???
다시 한 번 놀라 그림 속 유령을 천천히 다시 봤다.
어디서 본 것 같더니 이거 진짜였다.
반 대머리와 매부리코가 다시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파블로 피카소?”
- 나 알아?
모르면 간첩이다.
미술학도가 아니더라도 정규 교육을 받았다면 이름 정도는 다들 몇 번 들어봤을 스페인 태생 화가.
《아비뇽의 아가씨》와 《게르니카》라는 명작은 나도 안다.
1억 달러가 넘는 작품도 존재하는 세기의 화가다.
청색시대를 거쳐 입체주의 미술양식을 창조한 거장이 지금 내 눈앞에 유령이 돼서 나타났다.
신계에서 방출되어 자기 그림에 숨어들었다 갇혀버린 그를 보고 있자니 왠지 마음이 짠했다.
“고갱하고 세잔, 고흐 형님과 친합니다.”
- 뭐야? 인상주의 형님들과 아는 사이였어?
“취화선 님이 제 삼촌이에요.”
- 십장님 조카야? 정말?
유령의 눈동자가 그름 속에서 튀어나올 듯 커졌다.
괴기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네. 요즘 포인트 많이 벌어 정규직 됐어요. 인상파 형님들도 다들 비정규직으로 진급했습니다.”
- 말도 안 돼! 형님들 간단간당 하게 먹고 사는 수준이었는데 갑자기 누가 그렇게 포인트를 나눠줬어! 신들이 그렇게 좋은 놈들이 아냐!
“제가 쐈습니다.”
그림을 들고 어깨를 폈다.
포인트 앞에서 신들도 고개를 숙이는 법.
- 저기 조카님…….
신계에서 방출 당한 서러움을 제대로 맛본 피카소가 눈빛을 바꿔 저자세로 나왔다.
목소리에 부드러움이 가득 담겼다.
“왜요~”
- 포인트 넉넉하시면……. 신 하나 살리는 샘치고 기부 좀…….
파아앗! 파아앗!
피카소가 아부 발언을 시작하자 밑에 같이 포개져 있던 그림들이 미친 듯 발광했다.
자기들도 있다는 듯 강력한 기운을 분출하는 어필이었다.
“여기에 다른 분들도 계세요?”
- 없어! 쟤들 신경 쓰지 마!
피카소가 강력한 거짓말을 뿌렸다.
피카소 그림을 내려놓고 다른 그림을 들었다.
- 와아! 저 나쁜 놈 봤나. 지만 살겠다고 우리들을 버려? 한 번 동료는 영원한 동료라며!
“누구세요?”
편안한 인상의 곱슬머리 중년 아저씨가 그림에 나타났다.
허공을 나는 새와 피아노, 등대와 곰 같은 동물이 보였다.
누가 보면 초등학생 상상화 같아 보이는 그림이다.
- 하하하. 보잘 것 없는 전 샤갈이라고 합니다. 러시아 촌놈입죠.
자신을 한껏 낮추는 샤갈.
“마르크 샤갈요?”
- 네~ 살았을 때 허명으로 그리 불렸습니다.
겸손함을 아는 신계 추방자다.
“밑에 분들은 누구세요?”
- 잘 모르실 겁니다. 조르주 부라크라고…….
“큐비즘 운동 창시자요?”
- 아십니까?
“큐비즘이라는 혁신적 미술 운동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저기 배신자 피카소와 함께 이끌었잖습니까.”
- 탁월한 식견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누가 봐도 아부를 한껏 부리는 자칭 러시아 촌놈(?) 마르크 샤갈.
이 상황을 누가 보면 미친놈 소리 듣기 좋았다.
엄청난 미술사의 한 획을 긋던 화가들이 몸을 납작 낮추었다.
정성이 갸륵해서 신계로 돌려보내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진품 맞아요?”
- 그럼요! 다 직접 그린 진품 맞습니다. 제 작품의 진품 여부는 그림 뒤편 액자 밑에 사인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거 대박이다.
샤갈 그림도 엄청 비쌌다.
“그런데 다들 어떻게 하다 한곳에서 뭉쳤습니까?”
사람들 홀려서 숨어 다녔다는 건 알겠지만 이들이 한곳에 뭉쳐 있는 건 궁금했다.
- 히틀러 그 자식이 컬렉션으로 모아 두었습니다.
“아! 나치 약탈품!”
이해가 번뜩 갔다.
히틀러의 명을 받고 유럽 점령 시 엄청난 명화를 비롯해 보물들을 숨겨 놓았다.
그 일부가 풀린 것 같다.
인간들을 홀릴 수 있는 재능을 소유한 신계 추방자들 능력이라면 충분했다.
알면 알수록 대박이었다.
작품들 수는 약 일곱 점.
이것들이 진품이라면 이 화랑의 가격은 지금보다 한참 뛰어도 됐다.
그리고 내가 얻게 될 능력은 보너스.
“장 교수~ 나 왔어.”
그때 수장고 입구에 누군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