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7화 (267/1,284)

 # 267

회귀의 전설

267장. 화랑에서 (1)

“대표님. 물건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뭐예요? 차질이라니요?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 계약 들어간다고 안 했어요?”

“맞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매입자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게 한두 푼도 아니고. 1,000억짜리에 매입자가 그렇게 쉽게 나와요? 누구예요? 우리가 아는 사람이에요?”

“아닙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물건 꼭 매입해야 합니다! 반드시!”

“지금 새로운 매입자와 흥정 중이라고 합니다.”

“인수팀에 시간 벌어 놓으라고 하세요. 내가 가겠어요!”

“바로 차량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도대체 누가 달라붙은 거야? 냄새 맡은 거 아냐?’

연대자동차 그룹의 회장 전문구의 큰 딸 전주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동안 공을 들였던 화랑이 매각 물건으로 나왔다.

소유하고 있던 작품 일체와 함께 통 매각으로 진행됐다.

갑작스런 금융위기 여파와 화랑 대표 집안의 투자 실패로 인한 매각이었다.

미술품 가격이 폭락했다.

저당 잡힌 작품들이 헐값이 됐다.

몇 달 전만 해도 최소 2,000억을 호가하던 화랑이었다.

그러나 경매 직전까지 몰리자 1,000억 언저리까지 내려왔다.

눈독을 들이고 공을 들였던 전주희.

남동생에게 그룹의 모든 지분이 상속되도록 몰랐다.

겨우 호텔과 리조트가 남겨졌다.

엄한 가풍으로 인해 집안 지분이 쪼개지는 걸 싫어하는 선대 전준영 회장의 유언 때문이었다.

선대 회장 때도 이것저것 그룹이 쪼개져 힘들었다.

난리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이지 않는 암투가 심했다.

자식도 많았던 전준영 전 회장이었다.

그걸 알기에 전문구 회장은 사전에 모든 상속을 정리했다.

외아들에게 주요 계열사를 몰아줬다.

전주희는 배가 고팠다.

오정보다 더 배분이 짰다.

그래도 오정은 쓸 만한 것들을 딸들에게 물려줬다.

하지만 연대는 한참 못 미쳤다.

전주희는 이것저것 모은 재산으로 이번에 뻥튀기를 준비했다.

화랑 인수가 목표였다.

위기만 지나간다면 두 배, 아니 세 배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었다.

화랑에 감춰진 진귀한 작품들이 제법 있었다.

화랑 주인과 친분이 있어 직접 알아 봤다.

건물 가격도 괜찮았다.

“누군지 몰라도……. 내 밥에 손대면 가만 안 있을 거야!”

표독하지 않지만 전주희는 욕심을 부렸다.

오정의 딸들에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하기까지 한 연대 그룹 딸들의 상속 지분.

스스로 재산을 불리고 싶었다.

특히 화랑은 반드시 접수해야 했다.

선대 회장은 전혀 관심 없었지만 대한민국 상류층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문화생활의 품격 그 자체였다.

오정의 사모가 대한민국 1위의 미술 자산 소유자였다.

절대 재벌 순위에서 꿀리지 않는 연대 그룹 딸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돈만 아는 구두쇠 회장의 자식이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그림 작품은 탈세 수단으로 최고였다.

여러 의미로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 그림은 재벌 사모들에게 필수 수집품들이었다.

***

“어때? 설란아 마음에 들어?”

“좋긴 하다만…….”

“엄마 괜찮아요?”

“응~ 햇볕도 잘 들고 소유하고 있는 작품들도 다들 명작들이야.”

“그렇지? 설란이가 예전부터 보는 눈이 있다니까~.”

홍인대 회화과 동창회에서 봤던 장찬우 교수가 칭찬을 날렸다.

얼마 전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창인 장찬우 교수 처가 쪽이 어려워 이번에 소유하고 있던 화랑을 내놓게 됐다고 했다.

학교법인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큰 아들이 사업하다가 크게 말아 먹었다.

그 결과 급히 자산을 처분하게 됐다는 장찬우 교수 처가.

엄마의 성공을 귀로 들은 장찬우 교수가 매수 의견을 보냈다.

조 변호사님을 통해 알아봤다.

생각보다 알짜배기 화랑이었다.

강남에 위치한 오로라 갤러리.

지상 7층 규모에 지하 5층의 아담한(?) 건물이었다.

그룹들이 소유한 대규모 미술관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만 그래도 쓸 만한 것 같았다.

엄마가 서울에 올라와 시간을 보내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었다.

몇 년 전에 재건축된 건물이라 따로 손볼 곳도 안 보였다.

채광도 훌륭했다.

“교수님.”

“태산아 왜?”

“소유하고 있는 작품들을 보고 싶습니다.”

건물 값은 잘해봐야 700억 정도.

매물가는 현재 1,000억에 나왔다.

나머지는 작품으로 계산하겠다는 장찬우 교수다.

“이거 진짜 화랑 소유만 아니면 내가 개인적으로 팔아 버리고 싶은 작품들이다. 몇 년만 묵으면 대박 날 작품들이지.”

진심으로 장찬우 교수는 아쉬워했다.

“그럼 어떡하니…….”

안타까워하는 엄마.

그래도 돈 빌려준다는 소리는 없었다.

같이 사업하기 좋은 엄마였다.

“처남 때문에 망할 줄 알았다. 학교 법인도 간당간당해. 잘못하다가는 기업에 넘어갈 판이다.”

“거기 종교재단 소유 아니었습니까?”

“예전에 그랬지. 그런데 홍인재단으로 진작 분리됐지. 장인어른이 이사장이야.”

“그랬군요…….”

홍인대학교는 내 기억에 의하면 망하지 않았다.

명맥을 유지하며 지방에도 캠퍼스를 설립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화랑은 장모님 소유야. 선대 이사장님이 수발 잘 들어줬다고 주셨어.”

“부자셨군요.”

“한때 강남 땅은 그분 허락 없이 밟고 다닐 수 없다는 말까지 있었다. 대대로 지방 토호였다.”

말로만 듣던 ‘우리집 땅 안 밟으면 못 지나간다’ 전설이 나왔다.

그것도 강남 땅이라면 할 말이 없었다.

과거에 강남이 논밭 천지였다지만 그때도 비쌌다.

띵.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5층 최하층으로 내려갔다.

“여기가 수장고다.”

“튼튼합니다.”

“상시 감시가 되거든. 허락 없이 이곳까지 엘리베이터가 운행되지도 않아. 그리고 문이 아주 두꺼워. 화재가 나도 이곳은 불길이 미치지 않아. 공사비만 100억 들었다.”

처가 재산에 빠삭한 장찬우 교수다.

“정말 아쉽겠네요.”

“……끙. 네가 내 마음을 아는구나. 혹시라도 하는 말이지만 그룹 사위로 들어가도 욕심내지 마라. 가질 수 없어 병만 생기더라.”

“네~.”

사위는 옛날부터 처가의 무늬만 자식이다.

식구라 불리는 며느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띠띠디디디 띠.

비밀번호를 누르는 장찬우 교수.

무늬만 사위는 아닌 것 같았다.

스르르륵.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시원하지? 습도와 온도가 완벽하게 조절되고 있거든.”

100억은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재건축할 때 심혈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 뭐 하나.

아들이 싹 말아 먹은 걸.

“어머~ 정말 아름답다!”

미술가인 엄마가 탄성을 질렀다.

“죽이지? 지금은 똥값이지만 이장손, 윤인걸 같은 조신시대 화백들의 그림들이야. 박물관에서 팔라는 걸 아꼈더니…….”

입구에는 조선시대 산수화나 맹호도를 비롯해 여러 대작들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명작들이었다.

“딱지가 붙었네요.”

“휴우……. 바보 같은 처남 녀석이 장모님 꼬드겨 이거 다 담보로 잡혔다. 멍청한 놈이 이게 도대체 얼마나 나가는 줄도 모르고!”

“그럼 개인적으로 팔지 못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내가 알았다면 아는 지인들 통해서 싹 팔아 빚 갚고도 남았다. 그런데 멍청한 놈이 통으로 넘겼어!!! 아우!”

처남과 처가댁에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괜히 귀찮은 거 아닙니까? 이걸 누가 통으로 구매합니까? 법원 경매에 넘어가면 난리 나겠는데요?”

생각보다 작품이 많았다.

대충 봐도 돈 되는 작품이 수백점이 넘었다.

이걸 수백억에 구매하려는 통 큰 자는 드물었다.

특히 소문 빠삭한 강남 상류층들은 지금 제2의 IMF를 대비하기 위해 현찰과 달러를 모았다.

그림을 팔아먹기에는 때가 안 좋았다.

경매에 나가면 작품들끼리 치여 똥값 된다.

한국 그림 시장판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경매 개시 전에 압류 다 풀면 된다. 그리고 계약서 작성하면 아무 문제없어. 그러니까 내가 안타까워 설란이를 부른 거야. 이거 쏟아져 나가면 진짜 똥값 된다. 몇 푼이라도 건져야 빚잔치라도 하지.”

“어머~ 이거 김환길 교수님 작품 맞지?”

“응…… 맞다.”

“와아! 이것도 경매에 넘어가?”

“그래서 미치겠다! 몇 년 전부터 가격이 치솟고 있는데 이 멍청한 놈이 이걸 다…… 말아 먹었어!”

호오! 나도 아는 김환길 화가 작품이다.

2018년 홍콩 옥션에서 수십억을 넘게 받는 대작가의 그림이 몇 점 걸렸다.

이것도 미래 가치가 수십억이 넘었다.

지금도 핫한 그림 값이지만 미래에는 세 배 이상 뛴다.

구매하면 무조건 돈 번다.

“설란아……. 내 기 좀 살려줘라. 장모님이 사방팔방 뛰어 다니지만 못 팔고 있다. 요즘 누가 1,000억 이상 들고 있겠냐. 너 잘 나간다 소문 들었다. 그거 조금 풀어봐라. 동창 좋다는 게 뭐냐~.”

“그게…….”

엄마가 말끝을 흐리며 날 봤다.

찡끗 눈을 감았다.

이미 구매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가격은 정해지지 않았다.

이것저것 쓰다 보니 수중에 돈이 얼마 없었다.

대학교와 종합병원 구입을 위해서 투입한 법인 출자금은 손댈 수 없었다.

손수 엄마 용돈으로만 구매해야 했다.

“작품 둘러봐도 되죠?”

“그래. 마음껏 봐라.”

교수님의 허락을 받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컬렉션들이 정확히 구분되어 있었다.

한국화와 동양화, 서양화, 한국작가와 외국작가 그리고 추상화 계열까지 깔끔하게 벽에 걸렸다.

“이거 생각보다 좋은데?”

해외 명작에 비하면 저렴한 작품들이지만 모든 작품들은 대가들의 기가 담겨 있었다.

특히 한국 동양화 쪽에는 대쪽 같은 선비들의 정신이 박혀 있는 작품들이 상당수였다.

그림을 아는 부자들이 왜 집착하는지 알 것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 화가의 득도 수준을 가늠하기 좋았다.

화가들의 깨달음의 심득이 담겨 있는 작품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해졌다.

- 카르마 포인트를 준비 중입니다.

- 신들이 구매를 추천합니다.

“이제는 구매 추천까지…….”

이 그림 그렸던 상당한 분들이 신선이 됐을 것이다.

이름을 날린 쟁쟁한 화가들 중 상당수가 선비들이었다.

그들이 쌓은 선업으로 신선이 되고도 남았을 게 당연했다.

자신들의 작품이 값을 알아주는 내가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구매할 이유가 더 늘었다.

엄마도 마음에 흠뻑 들어 했다.

내 그림을 전시하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요즘도 심심하면 정신 수양용으로 그림을 그렸다.

어디 내놓는다면 난리가 날 정도로 명화들이었다.

함부로 팔거나 전시할 생각은 없었다.

저벅저벅.

명화들을 보며 발을 옮겼다.

그렇게 넓지는 않았다.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

그때 바닥에 몇 개 포개진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 앞면대신 뒷면이 보이도록 놓아 둔 것들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나를 끌어당겼다.

“교수님 여기 벽 쪽에 포개진 작품들은 뭡니까?”

“그것들 다 위작들이야.”

“네? 위작요?”

“장모님이 얼마 전에 유럽 여행 갔다가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거야. 마음에 들면 하나주고 싶어도 그것도 딱지가 붙었다. 처치곤란이라 지금껏 놔뒀는데……. 에휴.”

“그래요?”

호기심이 더 발동했다.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물건들 중에 가끔 엄청난 대작이 섞여 있는 일이 종종 있다고 했다.

포개진 그림에 다가갔다.

그리고 작품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

그 순간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여, 여기서 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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