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4화 (264/1,284)

 # 264

회귀의 전설

264장. 프로 낚시꾼 (2)

‘저 녀석 알면 알수록 미스터리하군. 도대체 정체가 뭐야?’

지금껏 살면서 손대균은 나름 스스로 배포가 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태산을 만난 이후 전적으로 혼자만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대기업 회장들도 저런 짓은(?) 못한다.

재단법인에 1조 5천 억이 넘는 돈을 쏟아 부었다.

재산을 출자해 법인을 설립하고 나면 법의 규제를 받게 된다.

민법을 비롯해 사립학교법, 사회복지사업법, 의료법 등의 법률에 의해 감시 된다.

주무관청을 통해 수시로 감사를 받아야 함은 물론이다.

자칫 사적으로 사용했다가는 법인 자금 횡령과 배임죄로 처벌받는다.

그런데 모든 걸 감수하겠다고 선포한 뒤 돈을 배팅해 버린 모자다.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짐작이 안 갔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사님들!”

“그래! 장 대표! 나도 잘 부탁하네.”

“우리 귀염둥이~ 학교에서 보자잉~.”

“진짜 놀랐다. 장태산 대표! 우리나라에서 자네 같은 금융전문가를 볼 거라고는 상상 못 했어.”

“조만간 연락하지.”

윤진용 의장과 주태열 교수, 이민석 원장을 비롯해 이한진 총장까지 모두 손을 잡고 장태산을 격려했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호의는 손대균도 경험하지 못했다.

“선배님들 살펴 가십시오!”

“그래. 적당히 마시고 와라.”

“곧 라운딩 잡겠습니다.”

손대균도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일이 있어 조윤태는 급히 자리를 떴다.

이사장으로 취임한 주설란도 여직원들과 팔짱을 끼고 진작 퇴장했다.

술 한 잔씩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한 이사들도 차례로 사라졌다.

그리고 남게 된 두 사람.

“한 잔 더 해야지?”

“스위트룸 잡아 놨습니다.”

“빈틈없는 후배님 같으니라고~”

“선배님만 하겠습니까.”

“됐다. 가서 한 잔 더 마시자.”

손대균이 장태산 어깨를 두드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 녀석하고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니까.’

선대의 업 때문에 본의 아니게 매국의 길을 걷고 있지만 손대균은 가슴까지 오염되지 않았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사용했지만 언제나 찜찜했다.

그때마다 술을 벗 삼아 고독과 양심을 달랬다.

하지만 장태산과 연이 닿고 난 뒤 만남이 반복될수록 기분이 좋았다.

녀석의 웃음에는 엔도르핀이 넘쳤다.

행동들 또한 시원하고 유쾌했다.

한국항공 사모와도 맞짱을 뜰 정도로 패기가 넘쳤다.

일송회 모임에서도 자금 지원 덕분인지 적극적으로 인연 맺기를 원하고 있다.

“돈 많은 후배 두니까 좋네~.”

팰튼 호텔 스위트룸은 전경이 괜찮았다.

서울 야경이 손대균 눈에 화려하게 펼쳐졌다.

“주종은 뭐로 할까요?”

“오늘은 독한 놈으로 마시자.”

평소 달달한 와인을 마시던 손대균은 오늘 양주가 마시고 싶었다.

저 녀석만 만나면 심장이 뜨겁게 뛰었다.

사법시험을 패스하고 패기 넘치던 자신의 지난 청춘시절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알겠습니다.”

호텔 객실 전화를 드는 장태산.

“양주 안주 쓸 만한 것들로 올려주십시오.”

프런트에 전화해 안주를 주문하는 장태산.

녀석의 넓은 어깨를 보자 딸이 절로 생각났다.

아버지를 원망하며 프랑스로 떠난 딸.

손대균에게는 전화도 없었다.

엄마와 간간이 통화하는 내용만 전해 듣고 있었다.

갑자기 실력이 일취월장 늘어 프랑스에서도 두각을 보이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딸이 선택했던 남자.

자신을 위해 안주를 준비하고 술을 따랐다.

“조 이사가 그러더라. 미성년자인 너랑 술 마시면 잡혀간다고~”

“손 선배님은 조 이사님보다 통이 더 크시잖습니까.”

“크크. 그건 그렇다.”

한 달에 받는 보호비가 수백억이다.

정확한 날짜에 착오 없이 환율에 맞춰 통장에 꽂혔다.

그리고 이번에는 쟁쟁한 재단법인의 이사 명함도 달아줬다.

누가 보면 양아들 같아 보일 것이다.

그간 요즘처럼 살맛 나는 순간이 없었다.

가슴에 언제나 박혀 있던 못의 아픔이 조금 가셨다.

저 녀석과 연결된 일만 맡으면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싱글몰트 위스키가 향이 좋습니다. 순수한 보리맛~ 순결하지 않습니까? 이것저것 섞인 스카치와는 차원이 다르죠.”

녀석은 스위트룸 바에 구비된 위스키를 집어 들었다.

평소 즐기는 듯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너처럼 말이야?”

“선배님 왜 이러십니까~ 저 순진하지 않다는 거 다 아시잖아요. 조사 하셨잖습니까~”

“너 정도면 순수의 표본이다. 돈 많은 애들이 너처럼 사는 줄 아냐? 계집질에 돈질에 아주 막장이다.”

“오! 선배님에게 그런 순수한 인간애가 남아 있었습니까? 전 지금까지 악독 변호사 표본인 줄 알았습니다.”

“다 먹고 살다보니 이렇게 된 거다. 나도 소싯적에는 청렴 대법관이 꿈이었다.”

이제는 희미한 기억이 되어버린 과거의 꿈.

그때를 생각하자 가슴에서 목구멍으로 쌉싸래한 신물이 올라왔다.

“한잔하시죠.”

녀석이 알아서 술을 채우고 잔을 부딪쳐왔다.

“미성년자랑 이렇게 술 마실 줄 난 꿈에도 몰랐다.”

“그건 조 변호사님 레퍼토리입니다. 참신한 다른 말로 바꿔주십시오.”

“저작권도 없는데 뭐 어때. 진실만 말하고 통하면 그만이지.”

“선배님의 안녕과 대국재단을 위하여!”

티잉!

양주잔이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크!”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강한 주향과 알코올에 인상이 써졌다.

평소 마시던 술이 아니라 식도를 타고 내려간 술에 위장이 타는 것 같았다.

“캬아! 죽입니다!”

그에 반해 어린 녀석이 술맛을 알았다.

“입에 쫙쫙 달라붙지 않습니까?”

“그런 말은 최소 30대를 살아보고 얘기해라. 이제 스무 살 인생이 말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아.”

“세상 사는 데 선후가 어디 있습니까~ 깨달은 만큼 살다 가는 거죠.”

“깨달은 만큼?”

“돼지는 평생 돼지로 살고 사람은 평생 사람으로 사는 것처럼 깨달은 자는 그 만큼 인생의 깊이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저마다…… 각자의 인생을 신념대로 사는 게 삶의 묘미죠. 단, 그 차이만큼 사는 방법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묘하게 웃으며 말하는 장태산.

“후배……. 넌 무슨 목적과 신념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 거야? 그 돈이면 평생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도 있잖아? 난 도대체 너와 이사장님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가족의 행동이었다.

“선배님, 제가 좋아하는 분의 말씀 하나 옮겨보겠습니다.”

씨익 웃는 넉살 좋은 녀석.

뒤이어 녀석의 청아한 음성이 룸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을 걸을 때.”

조용히 떠오르는 시를 읊기 시작했다.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라.”

마음이 묵직해져 갔다.

선구자가 세상을 위해 남긴 선시는 함부로 입에 담아 희롱할 문장이 아니었다.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걷는 이 발자국은.”

손대균 이사가 눈을 지그시 감는 게 보였다.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난 그를 조금 더 안다.

대한민국을 좀 먹는 친일파 후손들의 대표적 인물이 일송회의 손대균 이사다.

하지만 선입견을 버리고 만난다면 존경할 만한 면모가 많았다.

인품도 훌륭했다.

선후배들에 대한 예의도 깍듯했다.

말투는 중후하며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는 지식이 충만했고 지혜 또한 견줄 만했다.

손유리가 순수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그래서 적이나 진배없음에도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즐거웠다.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리라.”

시가 끝났다.

“…….”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또로로록.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싱글몰트 위스키의 순수한 향이 코에 맴돌았다.

“서산대사의 시구나…….”

똑똑한 양반답게 바로 알았다.

“동시에 김구 선생님의 삶의 신념이었죠. 뒤를 따르는 후인들에게 모범이 되고자 평생 대쪽 같은 신념으로 살았던 참 스승님이셨습니다.”

“이거 후배에게 술자리에서 인생 강의를 듣는 기분이다.”

“후배지만 배울 게 있다면 배워야겠죠. 후배들은 선배들의 여러 술기들을 기꺼워하며 습득하지 않습니까. 같은 인류애가 넘치는 인간들끼리 말입니다.”

“……넌 참으로 독특한 놈이다.”

“뭐가 말입니까?”

“지금 이 선배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을 감추고 있지?”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손대균.

“에이~ 제가 뭘 알아서 그렇겠습니까. 무슨 목적과 신념으로 살아가느냐 물어서 평소 품고 있던 바를 말했을 뿐입니다. 건방지게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선배님을 가르치려 들겠습니까~”

웃으며 말했다.

손유리 아버지라 그런지 아쉬움이 컸다.

나를 좋아하지만 아버지의 명을 따랐던 그녀.

지금 손대균에게 묻고 있었다.

시를 통해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데 당신은 어떤 신념과 목적을 위해 인생을 바치고 있는지 듣고 싶다고 말이다.

그걸 알아채고 묻는 손대균이었다.

“한 잔 더 하시죠?”

비어 있는 손대균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각자의 길이 있는 거다……. 그게 설사 옳지 않은 길이라도 말이야.”

손대균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단숨에 가득 들어찬 양주를 들이켰다.

숨을 못 쉴 정도로 이글거리며 목젖이 타들어가는 느낌일 텐데 자연스럽게 참아 냈다.

내부에서 끌어 오르는 어떤 에너지가 술의 독기를 눌러버렸다.

같이 잔을 비웠다.

이제부터 중요한 순간이었다.

“나쁜 길을 알면서도 걸어가는 건 뒤를 따라오는 후배들이나 자식들에게 악영향을 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서산대사님은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말라 충고했다.

“아니 그 전에 선배님은 길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가시는 길에 대한 신념은 갖고 계십니까?”

사실 위험한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손대균이 기분 나빠한다면 모든 게 틀어진다.

그가 가진 힘은 나를 위기로 몰아넣는 데 충분한 힘이다.

“내가 가는 길은 현실을 인정하는 길이다. 너도 말했듯이 나 악독한 변호사다. 리앤장은 돈을 쫓아가는 악마들의 변호사 집단이라고 불리잖아.”

말과 달리 손대균의 눈빛에서 순간 괴로움이 스쳐 지나갔다.

부친의 친일에 대해 모두 동조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저도 돈을 쫓아서 사는 놈입니다. 하지만……. 홀로 걷는 눈길에서 타인의 인생을 내 표본으로 삼아 걷지는 않습니다. 올바른 길이라고 말해주는 이들조차도 대부분 다른 이들의 조언을 받아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표본이라……. 후배는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을 신념대로 행하나? 한 치의 거짓 없이?”

“당연하죠. 그게 실수로 끝나는 일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제가 제 자신에 대한 신념이 없다면 그건 제 인생이 아니라 타인의 인생에 불과하겠죠.”

“흐음…….”

손대균이 빈 잔을 들고 신음을 흘렸다.

지금은 줄이 팽팽한 보이지 않는 신념과 신념의 대결 시간이었다.

자칫 날 어리다 평가한다면 그 줄은 끊어질 것이다.

그리고 살벌한 전쟁이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손대균은 위험한 이였다.

똑똑하고 지혜로운 적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친구가 되거나 제거하는 게 최상책이었다.

“난 아버지를 존경했다. 평생 그 분처럼 법조계의 거목이 되리라 다짐했었다.”

내가 자신에 대해 모른다 생각했음인지 자연스럽게 집안 이야기를 꺼냈다.

술을 다시 채웠다.

이런 자리에서 술이 빠진다면 인간의 방어 본능이 작용하게 된다.

허심탄회한 말이 듣고 싶었다.

손대균은 짐작도 못할 것이다.

지금 순간이 죽일지 살릴지를 결정짓기 위한 운명의 갈림길인지 말이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도 완벽한 분은 아니셨다. 너도 알겠지만 인간들의 내면이 다 아름답고 성숙하지가 못해. 그게 설사 성자라고 해도 말이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충격이 큰 것 같다.

“이상과 달리 현실의 무서운 벽이 다가오면 다들 주저하게 됩니다.”

“현실이라……. 뭐 그럴 수도 있지. 좌우지간 난 너무 쉽게 인생 모델을 정하고 살았다. 그리고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루며 살고 있다.”

확신이 섰다.

손대균의 몸에 흐르는 피는 오염된 것이지만 뼛속까지 오염된 것은 아니었다.

지켜보기로 했다.

“그 현실이 옳은 것입니까?”

“…….”

“아니면 좋은 행동입니까?”

마지막 승부였다.

손대균이 조금이라도 양심 앞에 설 수 있는 자세를 보인다면 이 승부는 나에게 기운다.

“난…….”

뒷말을 잇지 못하는 손대균.

롤 모델이었던 아버지의 친일 행각에 현실적으로 수긍하고 말았던 자신의 인생이 떠오를 것이다.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살아 있다면 말이다.

이제는 끝을 봐야 할 때!

“그럼 선배님은 자신의 신념도 없이 단지 현실에 맞는 인생만 살아 오셨습니까? 그리고 그 길을 유리에게도 보여 주실 생각입니까!”

무심코 튀어나와 버린 손대균의 딸 이름 손유리.

파르르르르.

손대균은 딸의 이름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자 온 몸을 덜덜 떨었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술잔만 만지작거리는 손대균.

딸을 진심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결코 자신의 부끄러움을 넘겨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깊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난 손대균의 눈동자와 떠는 몸짓에서 부서져 내리는 가면을 보았다.

- 카르마 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