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
회귀의 전설
258장. 경고의 방법
“들어오세요.”
내 집도 아닌데 예의가 있는 사람들이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어젯밤 화끈했던 러시아 스파이 요원 타샤와 후덕한 인상의 삼십 대 후반 남자 하나.
타샤는 어느새 몸에 착 달라붙는 검정색 투피스 오피스룩으로 갈아입었다.
블랙을 사랑하는 그녀다.
키가 큰 러시아 미녀는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예열됐다.
마주치는 눈빛 속에서 보이는 아낌없는 호감.
그녀를 향해 눈빛으로 미소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하일 페트로프 부국장입니다.”
남자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그 순간 깜짝 놀랐다.
블라드미르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들었던 친구 이름이 미하일 페트로프다.
나이를 떠나 자신에게 엄청 잘 대해줬던 배신자.
블라드미르 팔아서 부국장에 오른 것 같다.
표정을 감췄다.
바둑판으로 따지자면 지금 난 공격을 받아내는 수세적 입장이다.
개인이었다면 리장창을 홍콩에서 조졌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국가와 연결된 리장창이다.
놈의 공격을 벗어나 러시아와 내통 중이다.
공격을 위해서는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무식한 놈들처럼 아무 때나 주먹질하고 싶지 않았다.
“다니엘 장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러시아 불곰 소굴이다.
웃으며 악수했다.
러시아에서 난 아직도 준 인질 상태다.
배신자 놈의 판단 하나에 모스크바 인근 땅속에 묻힐 수 있었다.
“여행에 불편은 없으셨습니까?”
좋았다.
특히 어젯밤은 평생 잊지 못할 거다.
“타샤 양이 극진하게 보살펴줬습니다.”
“그래요? 수고했어요. 타샤.”
“감사합니다.”
타샤가 만족한 듯 웃는다.
정이라는 건 오가는 게 있어야 더 깊어지는 법이다.
우연과 신의 포인트질에 맺어진 인연이지만 소홀함은 없었다.
부모님이 알면 난리 나겠지만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다.
“미하일 패트로프 부국장님.”
“미하일이라고 부르세요.”
돈의 위력이 이렇게 놀랍다.
과거 악명 높던 KGB의 다른 이름인 연방보안국의 부국장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했다.
통통한 모습에 사람 좋아 보였지만 믿음은 가지 않았다.
블라드미르의 뒤통수 팍 쳤던 인물이다.
웃으며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미하일. 처리할 일이 있습니다. 빠른 귀국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흐음……. 타샤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만 중국 쪽 애들이 사방을 들쑤시고 다닙니다. 모스크바에서 출국한다면…….”
러시아가 개입된 걸 알아버린다는 뜻이다.
정보력이 조금만 있는 집단이라면 출입국은 충분히 파악 가능했다.
돈에 환장한 놈들은 세상에 많았다.
“유럽 쪽에서 귀국하겠습니다.”
“유럽요?”
“귀국에 전혀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유럽으로 이동 조치 부탁합니다.”
“유럽이라…….”
“동유럽이 좋겠군요. 헝가리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고민하는 미하일.
러시아는 아직 친구가 아니다.
오래 있다면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중국 쪽과 이것저것 협상할 수도 있었다.
리장창이라면 내가 위험인물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4억 달러 지금 입금하죠. 그리고 유럽에 도착하는 즉시 5억 달러 입금하겠습니다. 그리고 수수료도 살짝 더 얹어 드리겠습니다.”
수수료라는 말에 미하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공식비용 말고 따로 자신에게 지급될 돈이라는 걸 알았다.
“추가 투자 금액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욕심도 많았다.
“제 친구가 미국의 유명한 투자자 로버트 라이언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모스크바에 디즈니랜드 급 유원지를 개장할 생각입니다. 아니 좀 더 크고 환상적으로 만들겠습니다.”
“!!!”
미하일 눈썹이 한 번 더 꿈틀거렸다.
정보요원답게 많은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디즈니급 이상이라면 상당한 금액입니다.”
10억 달러 이상의 투자가 필요했다.
“당신들 보스께서 좋아하시지 않겠습니까? 러시아 국민들을 위한 행복한 놀이터 건설이 공약이라 들었습니다.”
앞으로 2020년까지 주구장창 대통령과 총리질 해먹는 푸틴이다.
하지만 2008년에는 정치적 후계자인 드미트리에게 대통령을 넘기고 총리직을 맡고 있었다.
약간의 정치적 위기 상황이었다.
이런 때 국민들 관심사를 돌리기 위해서는 선심성 공약이 최고였다.
러시아에는 아직 디즈니급 놀이 시설이 전무했다.
“보스는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친구가 되기 위한 선물입니다.”
러시아는 재미있는 동네다.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옆 동네 개들 후려치는 데 일조가 될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빠른 처리 부탁합니다.”
“좋은 분 같습니다.”
“원래 제가 여기저기서 좋은 놈 소리 듣고 삽니다.”
“조만간 술 한잔하시죠.”
“한국에서 보드카 한잔하시죠. 투자 계획도 진행하시려면 말입니다.”
호구도 아니고 여기서 마무리 할 생각 없다.
“하하하하하. 앞으로 친구처럼 지냅시다. 다니엘.”
“저야 고맙죠~.”
다시 손을 잡았다.
서로의 계산이 복작한 이곳.
친구는 개뿔이다.
블라드미르를 위해 화려하게 뒤통수에 짱돌을 날려줄 생각이다.
얼굴에 드리운 배신자 관상.
미하일은 전혀 믿을 수 없는 놈이었다.
***
‘뭐지? 이 찝찝함은?’
노가다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조장 석두용은 등 뒤에 달라붙는 불길함에 걸음을 빨리했다.
조직에서 급히 명령이 하달됐다.
놈이 한국에 돌아오면 바로 처리하라는 명령이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저격총을 준비했다.
살수들은 전통에 따라 독약이나 검 같은 무기를 사용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살수들도 각종 총기류 사용법을 모두 배웠다.
총기류 규제 국가인 한국에서는 사용이 꺼려졌다.
사용했다가는 나라가 발칵 뒤집히는 동네다.
그걸 알고 감수할 정도로 상부는 다급했다.
‘아직 놈은 돌아오지 않았다…….’
포섭한 놈의 경호원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준비만 단단히 해놓았다.
여차하면 수류탄까지 사용할 생각이었다.
호적 없는 무적자라 설사 발각되어도 바로 독단을 깨물면 그만이다.
“???”
동료들과 사용하는 방에 도착했다.
인기척이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 의심받지 않기 위해 술도 마시며 시끄럽게 지내던 공간이다.
일이 끝나고 PC방에서 암호 메일로 지령을 하달 받고 왔다.
기름진 냄새와 빼갈 향이 가득 찰 시간이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주인집은 며칠 동안 해외여행을 갔다.
골목길 안쪽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조선족과 불법 한인 체류자들도 인해 한국인들이 거의 빠져 나간 대림동 뒷골목.
석두용은 조심히 가방에서 날카로운 비수를 꺼냈다.
코에 맡아지는 비릿한 피 냄새.
끼이이익.
지하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헛!”
눈에 들어오는 방 안 풍경에 석두공은 비명을 냈다.
자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살수의 술을 배우던 동료들이 벽에 박제가 된 것처럼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깨가 뾰족한 물체에 찔린 채 벽에 박혀 있었다.
살아도 이제는 살수가 될 수 없었다.
눈동자는 하얗게 뒤집어진 상태다.
똑똑 칠공에서 피를 흘리는 모습은 지독한 고문을 당한 흔적이었다.
“누구야!”
내공을 이용하며 적을 찾는 석두용.
퍽!
소리도 없이 어둠 속에서 날아온 암기가 석두용의 왼쪽 손목에 박혔다.
“큭!”
고통 속에서도 보이는 반짝이는 암기.
놀랍게도 손목에 박힌 건 한국의 10원짜리 동전이었다.
‘고, 고수다!’
“왜 그래? 집에 왔으면 들어가야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
쇄애앳.
석두용은 그대로 무기를 찔러갔다.
수없이 연습했던 수법.
놈의 숨소리를 확인했기에 실수가 있을 수 없었다.
퍼억!
하지만 놈의 수법이 빨랐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강력한 일격에 석두용은 방바닥을 뒹굴었다.
저벅저벅.
희미한 시선으로 보이는 놈의 실루엣.
그놈이었다.
“왜? 놀라워? 미인계로 포섭한 정신 나간 놈도 내가 온 걸 몰라~.”
다 알고 있다는 듯 놈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하나도 없었다.
“어, 어떻게…….”
“그건 됐고. 빨리 끝내자. 내가 좀 바빠.”
구두를 신고 안으로 들어서는 놈은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위기를 감지한 석두용은 어금니에 감춰진 독단을 힘껏…….
뻐억!
다시 터지는 강렬한 충격.
우두둑.
깨내 물려고 했던 독단을 놈이 손가락을 쑤셔 넣어 뽑아냈다.
“죽어? 누구 마음대로?”
악마 같은 놈이다.
알려진 정보와 달리 살인을 주저하지 않는 자다.
움직임에 거침이 전혀 없었다.
톡톡톡.
놈이 가볍게 몸의 혈도를 짚었다.
현대 살수들은 사용하기 어려운 수법이다.
금세 석두용의 몸이 뻣뻣해졌다.
“불어. 네 놈의 위치와 알고 있는 모든 정보.”
“크크크…….”
석두용은 이런 때를 대비해 훈련을 받았다.
비웃었다.
어지간한 고통도 참아내는 고문을 실전으로 연습했다.
놈은 어리석었다.
“어라~ 아혈을 안 짚었네.”
놈의 손이 강하게 아혈을 눌렀다.
“…….”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석두용은 공포를 강하게 느꼈다.
완벽하게 전문가다웠다.
교육을 담당했던 교관보다 더 차가운 피를 소유한 놈이었다.
“참고로 저 자식들은 다 불었어.”
“!!!”
“넌 그냥 참고용이야~”
우두둑 우둑 우두두둑.
그때 석두용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과 함께 온 몸의 뼈가 어긋나는 고통을 강하게 받았다.
순식간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동시에 밀려온 감당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
“키이……. 크.”
아혈이 막혀 있음에도 새어 나오는 비틀어진 신음.
온몸의 피가 빠져나갈 듯 강력한 압력이 느껴졌다.
‘아, 악마!’
눈알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석두용은 악마를 떠올렸다.
히쭉거리며 놈이 웃었다.
인성을 포기한 듯한 놈의 모습은 지옥 귀신 야차처럼 보였다.
“천천히 불어. 어차피 시간이 많아. 그리고 고맙지 않아?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네놈들을 찾아온 게. 보고 싶었어~. 크크”.
모든 걸 파악하고 있던 야차.
사신이 지하방에 찾아왔음을 느꼈다.
“죽이지는 않을게. 걱정하지 마. 밥은 먹어야 하니까 입은 놔두고……. 손도 하나 서비스로 놔둘게. 고맙지?”
단단히 분노한 놈의 목소리.
“공짜는 아니야~.”
놈이 다가와 달콤하게 귓가에 속삭였다.
“가서 리장창에게 전해.”
리장창까지 알고 있는 놈.
“크……. 키으.”
우둑 우두둑 몸이 뒤틀렸다.
석두용의 팔다리가 제멋대로 꺾였다.
“홍콩에서 받았던 대접……. 딱 100배로 갚아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