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5화 (255/1,284)

 # 255

회귀의 전설

255장. 탈출 (2)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있어?’

타샤는 급하게 호출을 받고 나왔다.

타샤는 FSB라 불리는 러시아 연방보안국 아시아 정보수집팀의 일원으로 베테랑 여전사였다.

정보 라인 쪽에서는 시베리아 암컷 여우로 불릴 정도로 사납고 손속이 잔인했다.

그런 타샤가 타국 요원의 호출에 바로 반응했다.

한국 국정원 블랙 요원 조이 킴.

3년 전 미국 CIA와 얽혀 죽을 뻔한 상황에서 극적인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

그때 반드시 한 번 크게 갚겠다고 약조했다.

아무리 정보원들의 세계가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하지만 목숨 값은 대개 갚았다.

그게 보이지 않는 불문율이었다.

목숨을 빚지고 갚지 않으면 동료와 함께 운명을 달리한다는 속설이 내려왔다.

그런데 문제는…….

‘장태산……. 다니엘 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방금 전까지 난리가 난 사건의 요주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중국 조직에 살인 명령이 하달됐다.

정보를 접한 각국의 정보기관들은 장태산에 관해 알아보려 불이 났다.

순식간에 정보가 모였다.

한국의 투자자이자 월가 투자의 신이라 불리는 로버트와 인연이 깊은 자.

그리고 조금 전에 획득한 따끈한 정보에 의하면 오늘 결혼하는 화교 대부 리장창의 외동딸과 사적 관계가 있었다.

결혼식장까지 장태산이 나타나면서 살인 명령이 내려졌다.

중국 땅에서 사람 하나 사라지는 건 일도 아니다.

꽌시로 연결된 중국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있는 사건이었다.

한국 재력가라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별 볼일 없는 한국 남자 한 명이었다.

‘잘생겼네~ 클라라가 반할 만해~.’

클라라를 알고 있는 타샤.

아시아 지부에서 상당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타샤는 장태산의 매력을 알아챘다.

위급 상황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갈기를 바짝 세운 겨울 산 아무르 호랑이 같았다.

조이와 어정쩡하게 팔짱을 낀 채 서 있었지만 풍기는 기세를 감추지 못했다.

타샤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이글거리는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누군가 건들면 사납게 찢어발겨 버릴 것 같은 기운이다.

오싹한 한기가 타샤에게 전해졌다.

삐리리리리리 삐리리리리리.

타샤의 핸드폰이 울렸다.

- 사냥감이 포수들을 모두 죽였답니다.

“그래?”

전해지는 정보에 타샤는 장태산을 흥미롭게 쳐다봤다.

S급 능력을 소유한 중국 조직을 혼자서 격파한 호랑이.

진한 수컷 냄새가 타샤의 코로 스며들었다.

슬라브 민족은 예로부터 강한 것들을 사랑했다.

유전자에 박힌 강자에 대한 동경이 타샤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 만큼 장태산이 풍기는 강함과 위험한 향기는 매력적이었다.

“지금 중국 요원과 공안들이 추적 중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부하 요원이 경고를 발했다.

타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상부에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알아서 할게.”

타샤는 통화를 빠르게 끝냈다.

조이를 도와줘야 하지만 파이 크기가 생각보다 컸다.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국가적 사건으로 옮겨졌다.

한국 정보요원이 개입됐다는 걸 알게 된다면 중국은 꼬장을 강하게 부릴 것이다.

러시아라도 쉽지 않았다.

“타샤 여기 이분은…….”

“알아. 장태산이라는 분이잖아. 오늘 아주 크게 사고 쳤고~.”

“알고 있었어?”

“조이~ 넌 너무 순진해. 이번에 손 씻으면 이쪽 일은 떠올리지도 마.”

“흐흐흐. 그건 인정.”

“배달해 달라는 거지? 안전한 곳으로.”

“타샤는 말이 잘 통해.”

조이가 활짝 웃었다.

“그런데……. 일이 커져버렸어. 내 수준으로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

타샤는 발을 뺐다.

사적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조국에 엄청난 피해가 갈 수 있는 국제적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정보요원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때 준 동맹 관계인 중국과 척을 질 수 없었다.

손해가 발생하면 러시아에서는 타샤를 제거할 것이다.

그게 FSB의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해온 일처리 방식이었다.

“그럼 어떡하지? 흐잉!”

조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중국 쪽 애들이 난리가 났어. 다른 쪽도 도움주기 쉽지 않을 거야.”

타샤가 주변 상황을 빠르게 살폈다.

비가 그치자 사람들이 제법 움직였다.

여행객들이 많은 선착장 부근이라 눈에 쉽게 띄지 않았다.

그러나 홍콩은 작은 동네다.

곧 발각되고 말 것이다.

“10억 주죠.”

그때 조용히 있던 아무르 호랑이가 나섰다.

“10억? 뭐가요?”

타샤가 의문의 눈으로 물었다.

갑자기 치고 들어온 호랑이 말에 관심이 생겼다.

‘10억? 루블? 원화 그것도 아니면…….’

“날 모스크바까지 안전하게 이동시켜준다면 10억 달러 현찰로 지급하겠습니다.”

“헙!”

가볍게 10억 달러를 제안하는 위험한 호랑이.

엄청난 액수의 돈이다.

이 정도 자금이면 구 소련 시절에는 핵무기도 몇 개 살 수 있었다.

타샤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안정적이던 환율이 경제 위기로 치솟았다.

조직에서도 돈이 마르자 활동을 축소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몇 년 전 호되게 환율 폭탄을 경험했던 러시아였다.

홍콩 사건보다 미국 본토에서 벌어지는 모기지 사태에 정보력이 집중됐다.

아무리 불곰 러시아라도 돈이 마르면 덩달아 피가 말랐다.

“와아아! 1억도 아니고 10억 달러? 오빠 정체가 뭐야?”

조이가 놀라 물었다.

‘호랑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군.’

타샤는 순진한 조이가 안타까웠다.

어쩌다 저런 아이가 이쪽 계통에 발을 들였는지 이해가 안 갔다.

“안전이 확보된다면 다른 것도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조건이 추가됐다.

“거짓말 아니죠?”

타샤가 다시 물었다.

목이 탔다.

호랑이 배달료가 이 정도라면 위에서도 진행할 게 뻔했다.

“계약금 1억 달러 먼저 입금하죠.”

“!!!”

‘기회다!’

해외 정보요원은 승진 한계가 정해졌다.

이대로 바닥에서 구르다가 죽는 경우가 태반이다.

타국과 달리 러시아 쪽은 과거부터 정보요원들의 안위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복수는 화끈하게 해줬다.

그 맛에 빠져 나가지 못했다.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

푸틴이 정보국 출신이라 바닥 생리를 잘 알고 요원들을 잘 다뤘다.

타샤는 안정적인 자리로 이동하고 싶었다.

본토에서 근무하거나 팀장급이 되면 위험 요소가 감소된다.

“믿겠어요.”

“저는 안 믿어도 되지만 돈은 믿어도 됩니다.”

정보요원 저리가라 하는 눈빛 변화 없는 호랑이 말에 타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암호화 처리가 돼 있어 도청이 불가능했다.

- 무슨 일이야?

아시아 담당자이자 상급자에게 직통으로 연결됐다.

타샤도 일 년에 한 번 사용할까말까 하는 번호다.

“위험한 사냥감이 모스크바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 ……죽여 달라 욕을 하는군. 시체 팔아서 넘겨도 용돈은 받을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놈이군.

여차하면 죽여 버리라는 뜻이 전달됐다.

“보험으로 10억 달러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합니다.”

- 10억 달러!

바로 반응이 왔다.

아시아 쪽 1년 예산보다 훨씬 많았다.

“빠른 판단이 필요합니다. 5분 안에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타샤의 직감이 최소한의 안전 시간을 예측했다.

그 와중에도 주변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 흐음……. 1분 안에 연락주지.

“그리고 도착하면 다른 선물도 준비한다고 합니다.”

- ……가죽 값이 비싼 분이군. 크크.

‘됐다!’

조직이 돈에 환장한 건 아니지만 공돈을 마다할 어리석은 집단도 아니었다.

통화가 끝났다.

“잘됐어?”

조이가 물어왔다.

“조이 너까지는 힘든 거 알지?”

“걱정 마. 난 바로 빠져나갈 수 있어.”

“그래. 다음에 만나서 진하게 보드카 한 잔 마시자.”

“술값은 네가 내라. 나 박봉이잖아~.”

“돈도 잘 버는 나라에서…….”

띠링.

그때 문자가 울렸다.

[손님을 안전하게 모셔라.]

상부에서 허가가 떨어졌다.

상당히 빠른 일처리다.

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대변했다.

정보조직은 언제나 빠른 판단과 결정을 필요로 했다.

“운이 좋으신 분이네요.”

타샤가 활짝 웃었다.

“된 거야? 정말?”

“내가 힘 좀 썼어~.”

이럴 때 빚 하나 더 챙겨 놓는 타샤.

“제가 아니라 그 쪽이 운이 좋은 겁니다.”

죽을 수도 있는 위기 상황에서 도움을 받고도 되레 당당한 아무르 호랑이 후손.

타샤는 남자의 호기로움에 매혹적인 미소로 답했다.

***

“크으……. 냄새…… 냉동 처리 안 했어요?”

“냉동실에서 꺼내왔는데 오늘따라 날씨가 덥네요. 조금 전까지 내린 비로 습기도 많고~. 이걸 어쩌나~.”

“상부 지시로 이거 열어봐야 하는데…….”

“열어 드릴까요? 날씨 덕분에 퉁퉁 불어 향기가 그만입니다~. 고기를 좋아해서 통풍에 기름이 아주 찰져요. 지금 뚜껑 딸까요?”

“됐어요! 빠, 빨리 치워요!”

“그래도 확인이…….”

“여기 사인했어요. 그냥 가요! 빨리요!”

“수고하세요~. 우리 작은 아버지 고국에 빨리 갈 수 있어 좋아하시네요.”

“으으으……. 냄새야.”

나도 냄새에 미칠 것 같다.

밖에서 타샤와 홍콩 공항 관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참아 주세요. 러시아에서는 식구들이 직접 봐야 장례가 끝난답니다.”

“관 빨리 치워요! 빨리!!!”

10억 달러짜리 특급 좌석은 관으로 결정됐다.

러시아니까 이 정도가 가능했다.

K는 능력보다 인연 줄이 괜찮았다.

타사는 늘씬한 러시아 미녀 정보요원으로 연기력이 뛰어났다.

며칠 전 홍콩에서 사망한 러시아인을 몰래 소각 처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남자의 관에 나를 넣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시체 썩는 냄새와 같은 향수를 뿌렸다.

삼엄한 중국 요원들의 눈을 피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러시아와 내가 연관될 거라고는 상상은 못했을 것이다.

K는 무사히 미국행 출국 비행기를 탔다고 했다.

머리에 입력된 비밀 계좌 비번을 이용해 1억 달러를 쏴줬다.

모든 게 빠르게 처리 됐다.

단 7시간 만에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그르르르르르르.

관이 어딘가에 실려 갔다.

“조금만 참아요~. 한숨 푹 자고 나면 모스크바에 도착할 거계요. 작은 아버지~.”

러시아어로 중얼거리는 타샤.

그럴 생각이다.

끔찍했던 이번 홍콩 여행.

내 남은 인생에 홍콩이나 중국에 갈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린 죄.

생각보다 값이 비쌀 것이다.

덜컹.

끼이이이이이이이.

연달아 들리는 소음.

슈아아아아아아아아앗.

곧이어 비행기가 지상을 박차며 힘차게 활공하는 게 느꼈다.

그리고 나의 홍콩 탈출도……. 마무리됐다.

최근 들어 가장 위험했던 순간.

홍콩에서의 모든 일들을 머릿속에 뜨겁고 깊게 각인시켰다.

언젠가 분명 청구하게 될 오늘의 계산서.

눈을 감고 두 주먹을 움켜쥐며 그때를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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