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
회귀의 전설
251장. 홍콩에서 (3)
“갑작스럽게 요인 경호라니…….”
블랙 요원 K는 내려진 지령에 인상을 찌푸렸다.
정권이 바뀌고 처음 받는 명령이다.
밖으로 드러난 화이트 요원과 달리 차장과 과장급 말고는 아는 이가 없는 블랙 요원.
국정원의 돈을 받고 학교를 다녔다.
조용히 내려오는 지령을 처리할 때마다 수당도 지급됐다.
일반인은 만질 수 없는 거금이었다.
문제는 목숨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것.
비밀 특수훈련을 받았다.
호주 사막과 아프리카 밀림 생존 훈련도 거쳤다.
그래도 아직 젊은 나이.
정규 교육 코스를 밟지 않아 요원 K는 이제 스물여섯 새파란 나이였다.
“이번이 마지막 지령이니까……. 봐준다.”
길었던 7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간다.
정권이 바뀐 후 더 이상 일하기 싫었다.
블랙 요원은 타국 정보원에 알려지면 사살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죽어도 국정원 현관 추념 현판에 별로 남겨지지도 못했다.
이번 정권에는 전혀 상부가 믿음이 안 갔다.
보호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칫 실수로 이어지고 곧 그건 파멸이었다.
아무리 블랙 요원이라도 목숨은 하나였다.
고아원에서 성장하고 자랐던 K는 꿈이 있었다.
자신과 같은 세상의 불행한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
뛰어난 머리와 능력으로 5개 국어를 할 줄 아는 K는 새장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떨어진 요인 보호 명령 쪽지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딸깍.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깔끔하게 태워버린 요인 정보.
최근 상관이 된 1차장이 직접 내린 명령이었다.
“나이도 어린놈이 뭔 보호야? 인생 짧지만 어렵게 살아왔네. 노리는 놈들이……. 만만한 상대가 아닌데…….”
국정원에서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중국에서 키워낸 히트맨들이 확실했다.
어렴풋이 정보원들 사이에서 소문만 났던 군부의 살인 기계로 짐작됐다.
특별한 무술을 수련한 덕분에 요 근래 S급으로 위험도가 격상된 놈들이다.
“느낌이 쎄한데……. 입국한 놈들이 한둘이 아니야…….”
갱신된 정보 파일에 의하면 홍콩에 지금 엄청난 요원들이 들어온 게 확실했다.
화이트 요원들이 활보할 정도라면 블랙 요원들도 그에 못지않다는 것.
뚜루루루루루루 뚜루루루루루루.
그때 K의 핸드폰이 조용히 울렸다.
- 여보세요. 거기 가이드 홍콩 K님이시죠?
“넵! 홍콩의 모든 걸 책임지는 가이드 K입니다!”
- 다음 주 여행 계획 중인데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신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는 홍콩과 마카오 여행이 되실 겁니다! 제가 경력만…….”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
국정원 블랙요원 K는 말과 달리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최후의 심판 같은 분위기가 넘치는 홍콩.
오늘부터 며칠간 정신줄 바짝 붙들어 매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 지령이 인생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
투두두두두둑.
빗방울이 거세게 내렸다.
장맛비처럼 새카만 하늘은 굵은 빗줄기를 연신 뿌렸다.
“결혼식이야? 장례식이야?”
금요일 밤에 도착해 팰튼 호텔 스위트룸에서 푹 쉬다 나왔다.
시간은 오후 2시.
12시쯤 리무진을 불러 결혼식장인 성 마가렛 성당으로 출발했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졌다.
홍콩에 장마가 온 것 같았다.
“원래 이렇게 비가 옵니까?”
“아닙니다. 어제부터 비가 많이 내립니다.”
“그래요?”
“슈트가 젖겠습니다.”
“곧 그치겠죠.”
“그러면 좋겠지만……. 하늘이 심상치 않습니다.”
호텔에서 딸려 보낸 리무진 기사와 잡담을 나눴다.
폭우가 내려서인지 거리는 의외로 한산했다.
오고가는 사람들은 씨가 말랐고 자동차도 많지 않았다.
“멀었습니까?”
“거의 다 왔습니다.”
차를 타고 30분쯤 달리자 나타난 시내 중심의 성당이 멀리 보였다.
“유력가 집안의 자제인 것 같습니다.”
“네?”
“경찰들이 도로에 깔렸네요.”
그러고 보니 빗줄기 사이로 경찰차와 경찰들이 보였다.
이런 날씨에 경찰을 동원할 수 있는 홍콩 유력 가문의 결혼인 것 같다.
왕족이었던 비비 가문이 대단하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비비의 오빠는 왕가의 핏줄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30분 전에 전화 주시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팁으로 미화 100달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기분 좋게 리무진에서 내렸다.
우산을 펼쳤다.
결혼식장으로 사용 될 성 마가렛 성당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였어? 영화에 나오던 그 장소가???”
어릴 때부터 몇 번이나 봤던 아버지 소장 영화 작품의 배경 장소가 오버랩 됐다.
<천장지구>라는 유덕화와 오천련이라는 여배우가 등장하는 영화였다.
아버지가 볼 때마다 훌쩍거리던 눈물의 결혼식 장소.
영화 표어가 생각났다.
‘하늘이 이들의 사랑을 허락지 않았다.’
어릴 때 보며 참 유치하다는 생각 많이 했다.
부잣집 외동딸과 거칠게 자란 나쁜 남자는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놔두고 홀로 죽음의 길로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던 유덕화 아저씨.
사랑하기에 떠나보낸다는 아버지 설명이 곁들여졌다.
아버지는 울적할 때마다 그걸 틀어놓고 꺼이꺼이 울었다.
“사랑하는데 왜 헤어져? 그건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고개를 저으며 영화 앵글에 잡혔던 성 마가렛 성당을 다시 봤다.
고풍스런 성당은 비에 젖어 더 고즈넉했다.
결혼식 분위기는 고조되지 않았다.
성당 주변에 포진한 중국인과 외국인들의 숫자가 100여 명을 넘었다.
비가 오고 습한데 레인코트까지 걸쳤다.
외곽에 포진한 경찰까지 포함하면 일국 수장들이 오기라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다.
경호원들도 즐겁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긴장감을 말했다.
철 지난 르와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조폭 두목 집안 간의 결혼식이 떠올랐다.
“결혼해서 이혼할 일은 없겠네. 잘못했다가는 전쟁이라도 치를 분위기라니…….”
토도도도돗.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구두를 적셨다.
시원한 푸른색 슈트로 한껏 멋을 냈지만 비가 웬수다.
비비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비비 오빠 결혼식이지만 이방인의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비비 말고 누구도 나를 모르는 결혼식장이다.
프랑스에서의 추억이 가볍지 않기에 홍콩에 왔다.
비비만 보고 돌아갈 예정이다.
홍콩은 그렇게 기분 좋은 곳이 아니다.
비조차 나를 반기는 것 같지 않았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건장한 중국인이 광동어로 말하며 앞을 막았다.
“초대장요?”
비비가 초대장 보내준 적 없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당황스러웠다.
“초대장이 없다면 출입 불가입니다.”
멈칫하자 상대가 강하게 나왔다.
주변 경호원들의 시선이 쏠렸다.
여차하면 나에게 덤빌 기세다.
기쁜 날에는 찾아오는 거지도 밥을 먹여 보내는 한국 풍습과 달랐다.
인심 박한 홍콩 결혼식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에 진짜 온 거야?”
그때 아는 프랑스인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가 돌려졌다.
“에두아르~.”
오늘 두 번째 보는 날이건만 반가웠다.
비비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경호원들의 두목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제정신은 아니군.”
에두아르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인정~ 그런데 비비는?”
“안에서 단장님과 계신다.”
“그래?”
“……조용히 있다 가라.”
“이분 아십니까?”
“제가 신원을 보증하겠습니다. 우리 측 초대 손님입니다.”
“……알겠습니다.”
중국인이 물러났다.
이래서 아는 사람 인맥이 중요했다.
“고맙다. 에두아르.”
“경고하는데 아가씨 곁에 다가오지 마. 네가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처음 볼 때부터 반말하던 에두아르는 인상까지 쓰며 경고를 보냈다.
“그건 내 알아서 할 일이고~ 당신은 당신 할 일만 하자고~”
경고라는 걸 하도 들어서 이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여전히 건방지군.”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지.”
“후계자님의 결혼식이다. 조용히 있다 돌아가.”
에두아르는 말과 달리 행동은 예의가 있었다.
“신부는 중국인이야?”
“……국적은 중국이지만 어머니는 프랑스인이다.”
“그래? 흐음…….”
클라라도 어머니가 프랑스인이었다.
홍콩이 과거 영국 식민지였기에 혼혈이 많다고 들었다.
“그런데 신부 이름이…….”
막 신부 이름을 물어보려는 찰나.
“대인! 정말 감축 드립니다! 쟁쟁한 가문에 따님을 시집보내시는군요.”
“하하. 아닙니다. 아직 부족한 딸이라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때 아주 익숙하고 호탕한 광동어를 사용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려한 중국식 금색 화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경호원이 받쳐 주는 커다란 우산 덕에 비를 맞지 않았다.
그 옆에 포스가 남다른 중년 사내와 대화를 나눴다.
“클라라는 더할 나위 없는 신부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
클라라라는 이름이 귀에 그대로 박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
좁은 계단을 통해 올라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파바바밧!
날 발견하고 흠칫 놀라더니 이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중년 남자.
클라라의 아버지 리장창이었다.
콰과과과과과광!
비 오던 하늘에서 우렁찬 벼락이 터졌다.
“꺄아악!”
성당 피뢰침을 때린 벼락에 놀란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감사합니다. 대인.”
대화자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나에게 냉기 가득한 눈길을 보내는 리장창.
과거 내가 알던 그가 아니었다.
발걸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리장창은 그렇게 성당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 있어?”
에두아르가 걱정돼서 물어왔다.
“신부 이름이…….”
“클라라 리.”
“아!”
더 이상 확인할 것도 없었다.
욱하는 슬픔이 심장의 피를 타고 전신으로 휘돌았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현실 앞에 머리는 회전을 멈췄다.
하늘이 이들의 사랑을 허락지 않았다는 영화 천장지구의 포스터어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처벅처벅.
우산이 손에서 떨어졌다.
차가운 비가 얼굴을 강타했다.
발걸음이 계단을 밟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래?”
에두아르의 당황스런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주르르륵 흐르는 눈물이 빗물에 섞였다.
클라와의 이별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
“그놈이 왔다.”
“그놈이라면…….”
“장태산.”
“아!”
“결혼식에 지장 없도록……. 처리하라. 쥐도 새도 모르게!”
분노한 리장창이 수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모르지만 용서가 안 됐다.
계단에서 놈과 마주쳤을 때 리장창은 당황했다.
절대 이곳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놈이었다.
두 집단의 맹약을 위해서 결혼식은 무사히 끝마쳐져야 했다.
딸 클라라가 놈을 보면 흔들릴 수 있었다.
막아야 했다.
피를 봐서라도 두 사람의 만남은 이뤄져서는 안 됐다.
‘날 원망하지 마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자에게 자비는 없었다.
우두둑.
힘껏 주먹을 움켜 진 리장창.
그의 눈동자에서 분노의 파란 화염이 줄기차게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