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
회귀의 전설
249장. 홍콩에서 (1)
- 클라라…….
잊지 않고 다니엘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지막하고 부드러우며 온갖 감정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듣고 있던 클라라는 울컥 심장이 뜨거워졌다.
잊으려 노력했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리움에 수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지우고 핸드폰을 바꿨지만 머릿속에 기억된 번호는 지워지지 않았다.
강렬한 그리움에 자신도 모르게 전화기를 들었다.
그것도 이제 며칠 후면 미래의 남편이 될 남자의 집에서 말이다.
창밖으로 잘 가꿔진 정원이 보이는 고풍스러운 성이다.
대대로 내려왔다는 남자 가문의 영지와 성.
이제 클라라가 이곳의 안주인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자…… 잘 지냈어?”
겨우 메어오는 목구멍을 뚫고 안부의 말이 나왔다.
- 잘 지냈어? 클라라는?
남자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물어왔다.
변한 것 하나 없는 남자의 반응과 목소리다.
세상이 변하고 자유스러운 유학 생활까지 경험한 클라라지만 미안함이 남았다.
낡은 가문의 역사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는 자신이 차라리 이상한 사람 같았다.
그래도 부모님을 사랑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마무리가 안 됐다.
사랑은 시작될 때와 달리 마무리가 있어야 하는 법.
클라라는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혼자만의 감정이라도 해도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도……. 별일 없었어.”
말할 수 없는 별일 참 많았다.
그래도 말하지 못했다.
이제는 시시콜콜 얘기할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버린 인연에 끝이 보였다.
- 다행이야.
남자의 진심이 느껴졌다.
나이가 한참 어렸지만 처음부터 나이 차이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다.
가벼운 웃음 뒤에 감쳐진 진중한 눈빛을 언제나 의지했다.
“다니엘…….”
클라라는 솟구쳐 오르는 슬픔을 누르고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더 부르지 못할 이름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 응?
“나……. 이제 다니엘을 잊어야 할 것 같아.”
“……그래.”
아픈 이별 의식이 진행됐다.
남자는 짐작했던 듯 담담하고 조용히 받아 들였다.
함께했던 기억과 시간이 소중했던 만큼 마음이 그대로 담겨 전해졌다.
“우리 미워하지 말자. 나 진짜 행복했어.”
- ……나도 그랬어. 클라라 덕분에 아름다웠던 시간을 보냈어.
말은 짧게 오갔지만 의미는 함축됐다.
말하는 사이 스쳐가는 추억들이 많았다.
비 오는 날의 홍콩에서의 데이트, 여름휴가, 부모님과의 한국 방문 등등.
손잡고 키스한 게 전부지만 그 어떤 육체적 사랑보다 뜨겁게 사랑을 느꼈던 클라라다.
남자의 말에 클라라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촉촉한 물기가 두 눈을 소리 없이 적셨다.
다행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별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후련했다.
“하는 일 잘 되기를 빌어줄게. 언제 다시 만나도……. 이 시간 이후 우리는 다시 스쳐도 모르는 타인으로 살아가야 해.”
가문과 가문, 거대 집단과 집단 간의 맹약이었다.
흐트러짐이 발생하면 엄청난 수의 사람이 죽거나 다칠 수 있었다.
그 맹약의 재물이 된 클라라는 남자를 끝까지 걱정했다.
그녀로 인해 피해를 받지 않기만을 원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모르는 타인처럼 잊어야 하는 게 맞았다.
아빠가 알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경고 뒤에 빠르고 처절하게 실행하는 아빠의 성품을 클라라는 잘 알았다.
그래서 홍콩에서는 절대 연락하지 않았다.
그게 다니엘에게 품은 사랑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다.
- ……클라라. 한국은 비가 온다……. 거기는 어때?
마지막까지 낭만 가득한 남자의 성품이 느껴졌다.
에둘러 표현하는 이별의 아픔.
토도독 토도도독.
창밖으로 빗방울이 휘몰아쳐 왔다.
조금 전까지 맑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여기도 비가 와…….”
수화기를 들고 클라라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 그래……. 잘 지내……. 행복하고…… 언제나…….
뚝뚝 끊어지는 남자의 말속에서 진한 슬픔이 느껴졌다.
“다니엘도…… 그래…….”
- 고마워……. 연락해 줘서.
이제는 진짜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시간.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 내가 더 미안해……. 클라라.
남자 목소리도 어느새 촉촉해졌다.
“…….”
잠깐의 침묵이 영원처럼 흘렀다.
똑똑.
그때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클라라 언니~”
예약된 남편의 여동생 목소리다.
“나 끊어야 해.”
- ……그래.
“안녕…….”
뚝.
짧은 안녕을 마지막 인사로 뱉으며 클라라는 통화를 끝냈다.
손으로 젖은 눈가를 닦았다.
“언니 안에 있어요?”
“응? 여, 여기 있어.”
“들어가도 돼요?”
“물론이지. 어서 들어와.”
클라라는 빠르게 얼굴 표정을 정리하고 안면을 바꿨다.
이제는 이곳에서 살아야 했다.
과거는 흐르는 추억의 강물에 띄워 보냈다.
미뤘던 이별의식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밝고 아름다운 미인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헤에~. 무슨 일은요. 언니가 갑자기 보고 싶어서 왔어요~.”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지만 살갑게 대하는 남편이 될 남자의 여동생이다.
“잘 왔어. 앉아. 커피 마실 거야?”
“주시면 고맙죠~.”
“잠시만 기다려.”
“네!”
클라라도 그녀를 많이 의지했다.
외로운 성에서 생활에 마음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언니 그런데 제가 말했나요?”
“뭘?”
“언니 홍콩 결혼식에 제가 좋아하는 남자를 불렀어요.”
“정말? 어떤 남자야?”
커피를 내리며 클라라는 아무 일 없었던 듯 맞장구를 춰줬다.
“좋은 남자예요. 함께 있으면 든든하고…… 유머스럽고 당당하고……. 웃음이 참 매력적인 남자랍니다.”
사랑에 빠진 그녀의 말에 클라라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방금 통화했던 옛 추억의 남자도 그랬다.
“한 번 보고 싶네. 비비안이 그렇게까지 푹 빠질 정도의 남자라면~.”
“소개해 드릴게요~. 아마 언니도 보면 한눈에 괜찮은 남자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비비안의 모습에 조용히 미소 짓는 클라라.
가슴이 아려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참았다.
시간이 지나면 고통이 사라질 거라는 걸 클라라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얘도 나처럼 힘든 길을 가겠네…….’
사랑에 빠진 비비안을 보며 클라라는 동병상련의 안타까움을 느꼈다.
사랑하게 된 사람을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운명.
그게 바로 세상을 움직이는 가문들의 후손들이 걸어야 할 가시밭길이었다.
***
“다 정리하겠다고?”
“1,000억만 남기고 다 털 겁니다.”
“왜? 설마 막 던지는 거 아니지?”
“설마요~.”
“나……. 비행기 못 타?”
조 변호사님의 순진한 걱정에 웃음만 나왔다.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아직 나에 대해서는 100분의 1도 몰랐다.
“걱정 마십시오. 여기저기 눈독 들여서 몸집을 줄여볼 생각입니다.”
“장 대표 진짜 똑똑해~. 나도 건의하려고 했다.”
조 변호사님을 불렀다.
이놈 저놈 각종 잡것들이 내 재산을 탐냈다.
계획했던 것보다 일찍 돈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이 들끓었다.
국가 기관을 자신들의 사조직처럼 사용하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룹부터 시작해 정치인들의 눈이 뻘겋다.
욕심 많은 하이에나 떼 같았다.
그들의 눈을 피해 먹잇감을 감출 때가 됐다.
“어머니 이름으로 법인 설립됐습니까?”
“지금 주무관청에 들어갔다. 곧 허가 떨어질 거다.”
“한국대 법대 교수님들 이름도 넣어 주십시오. 조 변호사님도 사외이사 명단에 올리시구요. 그리고 청렴하고 빵빵한 유명 인사들에게도 감투 하나씩 던져 주십시오.”
“고맙다. 이번 기회에 어깨에 힘 좀 넣어보자.”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학교 법인과 비영리 의료법인 준비가 완료되어 가고 있다.
이사진들을 화려하게 구성할 생각이다.
여기저기 잡놈들이 건들지 못하도록 선발진은 정직하고 화려할수록 좋았다.
어차피 대한민국은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인맥 사회였다.
“중용대학교 이사장에게 연락 취하십시오. 법인 설립과 동시에 인수하도록 하죠.”
“그렇지 않아도 아침에 전화 왔다. 경기가 급락하자 화들짝 놀란 것 같다.”
“기다려 준 성의가 있으니 깎지는 마십시오.”
“그래 남는 돈 뭐하냐. 그냥 막 쓰자.”
조 변호사님도 돈에 무감각해진 것 같다.
처음에는 벌벌 떨던 분이 이제는 앞장을 섰다.
마음에 들었다.
통이 커야 나중에 큰일 할 때 도움이 됐다.
여염집 아낙들처럼 푼돈에 절절매면 큰일 하는 데 도움이 안 됐다.
“그런데 장 대표 무슨 일 있어?”
“네?”
“요즘 들어 여러 번 인상이 바뀐 것 같아. 지금도 보고 있으면……. 확실히 달라. 큰 깨달음이라도 얻었어? 득도 할 거 아니지?”
귀신 정도는 아니지만 조 변호사님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혔다.
클라라와 통화한 뒤로 며칠간 술을 마셨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욱신거리는 아픔 때문이었다.
예린 선배가 아니라 내 진짜 첫사랑은 클라라가 맞았다.
예린 선배의 배신은 단 하루로 치유가 됐다.
이후에 나를 점령한 것은 분노였을 뿐이다.
그러나 클라라는 오랫동안 많이 잔상이 나를 괴롭게 했다.
문뜩 떠오르는 추억들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득도는 아니고 인생 그 자체가 고통이라는 성인의 말씀이 생각났다.
삶 자체가 고생스럽다더니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정도 치유가 됐다.
아픔에 침식당하기에는 벌려놓은 일이 많았다.
나 하나로 인해 수많은 이들의 미래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지고 있다.
책임감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나 한 사람의 일로 주저앉을 수 없는 노릇이다.
한 번 죽어봤던 목숨 값은 강하고 질겼다.
“이제 곧 성인이잖습니까. 어른 되려고 그럽니다.”
검사 거친 양반 눈썰미가 매섭다.
그렇다고 한 번 죽었다 살아온 내 상대는 아니다.
나를 가만히 훑어보는 조 변호사님이 입맛을 다셨다.
뒤져봐야 먼지만 나왔다.
“……진짜 불공평하다.”
“뭐가요?”
“내가 미성년자와 이런 대화 하려고 기나긴 세월 공부하고 여태 살아온 건 아닌데…….”
주변 사람들 여럿이 요즘 나 때문에 본인들 삶에 회의감 많이 느끼고 있다.
최근에는 수학과 교수들이 그랬다.
토론회 마지막에 내가 꺼낸 난제를 풀지 못하고 멍하니 멈춰버린 수학과 교수들 표정이 지금 조 변호사님과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많이 그럽니다. 자괴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자가용 비행기와 해외 특급 별장이 공짜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래도 널 보면 인간으로서 참 힘들다.”
“이번 생에 착한 일 많이 하시고 다음 생에는 더 폼 나게 사십시오.”
“됐다. 다음 생이 어딨어? 그냥 이번 생에 끝장을 볼란다.”
조 변호사님이 몰라서 하는 말이다.
빙긋 웃었다.
한 번 죽어 본 자의 여유를 한껏 발휘했다.
“주말에 뭐하냐?”
“무슨 일 있습니까?”
“유 팀장이 너 요새 골프 배운다고 하던데……. 한 게임 어때?”
초보자를 노리는 노련한 선수 냄새가 났다.
조 변호사님도 골프 좀 치는 걸로 안다.
“자가용 비행기 내기 하실래요? 제가 지면 큰 거 드리고 만약 변호사님이 패하면 자가용 비행기 이용권 반납하시죠.”
“……끙.”
선수를 치자 조 변호사님이 앓은 소리를 내고 입을 다물었다.
“이번 주는 제가 바쁩니다.”
“어디가?”
“홍콩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홍콩은 왜? 무슨 일 있어?”
“네…….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