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
회귀의 전설
247장. 도장 깨기 (1)
“보스. 지시하신 대로 구호기금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 로버트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항상 저보다 몇 발 앞서는 보스의 행보에 경의를 표할 뿐입니다.”
로버트는 진심이었다.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선견지명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쥔 동양의 청년.
선물과 환율의 아수라장에서도 경이적인 수익을 올렸다.
로버트도 보스의 수익을 몰랐다.
수없이 건네고 폐기된 조세피난처 법인 숫자가 100개가 넘어갔다.
미국에서 설립된 각종 투자 집단의 수익은 수천억 달러를 가뿐하게 넘었다.
서로 동떨어진 것처럼 셀 수 없이 분화되고 다시 연결된 법인들은 점조직처럼 움직였다.
CIA나 FBI를 비롯해 연방 국세청 특별조사팀이 조사해도 찾아낼 수 없었다.
만약 보스가 사망한다면 각종 법인들은 독립적으로 살아서 움직일 만큼 자율적이었다.
- 구호단체에 대한 재정 투입과 집행, 결산에 대해서 어떤 회계나 감사 기준보다 철저하게 살피셔야 합니다. 구호라는 장치에 삿된 마음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물론입니다. 1급 회계사들과 전문 인원들로 상시 감사 체계를 구축할 생각입니다.”
‘보스는 외계인이 맞을 거야.’
미국 나이로 이제 20대도 안 된 보스다.
그럼에도 일처리에서는 빈틈이 안 보였다.
대부분 20대 졸부들은 갑부가 되면 돈 쓰기 바쁜데 보스는 세계적 구호단체까지 설립했다.
번만큼 환원할 줄 아는 통 큰 남자다.
월가에서 쫓겨난 착하고 능력 있는 이들에게도 직장을 허락했다.
로버트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자신과 같은 패배자들을 구원해주는 신 같았다.
그 나이 때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의 범위를 넘었다.
앉아서 세상 흐름을 꿰뚫고 있었다.
직접 맛봤던 동양의 신비로움으로 로버트는 제2의 인생을 살았다.
여자 친구와 매일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그녀가 행복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로버트 역시 더 없는 행복함을 맛봤다.
제2의 신혼 같았다.
- 한국 투자 자금을 상당수 정리할 생각입니다. 새로 투자할 법인 지분 관계 목록을 보낼 겁니다. 확인하고 추진해 주십시오.
“처리하겠습니다.”
로버트는 처음부터 의견을 내지 않았다.
보스보다 잘할 자신이 단 1퍼센트도 없었다.
- 그리고 제가 알아보라 지시했던 정보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모든 루트를 통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획득한 사실을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위험한 조직들이 섞여 있습니다. 경호에 만전을 기하십시오.
“보스가 걱정입니다.”
- 전 괜찮습니다. 그리고 한국 경호 직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생각보다 능력이 탁월합니다. 분단 국가 특수부대 출신들이라 그런지 몇몇 친구는 교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입니다.”
- 비용에 관계없이 알찬 교육 프로그램으로 돌리십시오. 일당백의 전사들로 육성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보스.”
로버트도 보스가 지시한 비밀 세력을 알아보며 경호 인력을 충원했다.
특히 미국과 관련이 깊은 조직은 보스의 명대로 연줄을 대놨다.
과거에는 모르고 대충 짐작만 했던 어둠 속 실력자들의 능력이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 그리고……. 특별히 부탁했던 분들은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모처에서 경호를 받으며 쉬고 있습니다.”
- 잘 부탁합니다. 미래에 큰일 하실 분들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국 정치권과 연계된 인물들의 보호를 로버트가 맞았다.
미국 정치 집단과도 협의가 됐다.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로버트 말을 무시할 정치인이 드물었다.
합법적 사업을 통해 세금을 내고 정치자금을 후원했다.
로버트는 떠오르는 월가 투자계의 큰 별이었다.
- 그럼 수고하고 조만간 만나도록 하죠.
“미국에 오실 생각이십니까?”
-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보스가 온다는 소리에 로버트 목소리에 힘이 팍 들어갔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연결된 것 같은 보스.
로버트가 이 생에 섬기는 진정한 주인이었다.
***
“이럴 때면 뭔가 된 것 같은데……. 현실은…….”
수업을 받아야 하는 학생이다.
날이 더웠다.
아침 강의 시작 전 아이스커피 한 잔 빨면서 로버트와 통화했다.
간단하게 몇 조에서 수십조를 퍼붓는 사업을 진행했건만 난 벤치에 앉아 있는 한국대 1학년 학생일 뿐이다.
“다들 열심히들 산다.”
9월초 개강 이후 학교는 바빴다.
학생들 발걸음이 빨랐다.
전공과목이 빠졌기에 전부 타과 수업으로 채워졌다.
사티 교수에 공을 들이기 위해 알고리즘 3학년 컴퓨터 전공 과목 하나 더 신청했다.
음대와 미대 수업도 넣었다.
협연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음대 교수님들의 강력한 희망이었다.
미대 또한 출품작을 위한 시간을 요구했다.
경영학과 수업도 첫 강의 시간에 끝장을 봤다.
이제는 학점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2학기 강의에 남은 과목은 자연과학대학의 수학과 3학년 전공 수업.
“도장 깨기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지.”
졸업하기 위해서는 여러 타 과목 학점을 이수받아야 했다.
빠르면서도 강력하게 수업을 진행 중이다.
내년 이후 아주 바쁠 것 같았다.
사법고시 2차까지 패스하고 나면 법학과 수업은 모두 면제다.
그 전에 교양과목들을 격파할 생각이다.
일명 도장 깨기 작전.
오늘 선택된 수학 과목은 3학점짜리 ‘수학특강’이었다.
노바 형님이 상당한 수학자였지만 진화 변형된 현대수학 이론에는 뒤쳐졌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 실력으로는 한국대 전공 3학년 과정을 마무리할 수 없었다.
의자에 앉아 마음을 경건하게 먹었다.
요즘 신들 잘못 부르면 어디로 끌려갈지 몰랐다.
다른 세계는 당분간 사양이다.
포인트 더 벌어 고위급 마법이 필요할 때 넘어가고 싶었다.
“포인트 필요하신 수학 끝장나는 신들 계세요~ 특히 선계에 계신 분들 위주로 추천 부탁합니다!”
강렬한 의지를 담아 하늘에 띄웠다.
알파닥이 수작질을 벌이기 전에 조건을 걸었다.
- 신들이 접수했습니다.
- 신들끼리 경쟁이 붙었습니다.
- 신들이 공평하게 편을 나눠 가위, 바위, 보를 시작했습니다.
- 시간이 지체 될 것 같습니다.
“경쟁? 가위바위보? 지체? 도대체 몇 명인데?”
갑자기 들려온 알림음에 이해가 안 갔다.
요즘 신들 세상도 사는 게 점점 치열해져 가는 것 같다.
- 12,764명의 신들이 빠르게 가위, 바위, 보를 진행 중입니다.
“허엇……. 12,764명!”
들려오는 수학 잘하는 신들의 숫자에 할 말을 잃었다.
하늘에서는 수학으로 먹고 살기 힘든 신들인 것 같다.
예전에는 웬만한 능력자들 모두 다 수학자이자 과학자요 예술가였다.
혼자 수학을 터득하다 사라진 신들도 많을 것 같았다.
그들이 모두 모인 것 같다.
“저기! 한국대학교 수학 교수님들 격파할 실력은 돼야 합니다! 능력 없으면 포인트 없는 것 아시죠?”
- 5,222명이 중도 기권했습니다.
- 빠르게 숫자가 줄어듭니다.
- ……승리한 최후의 신이 선택되었습니다.
파아앗!
알파닥 알림과 동시에 빛이 터졌다.
그리고 난 새로운 신을 만났다.
***
“요즘 갈수록 수학 실력이 형편없어져. 모든 과학의 밑바탕은 수학인데…….”
한국대 자연과학대학 수리학부 남궁동호 교수는 교수실에서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강의 시간이 2분 정도 남았다.
그래도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난 학기 학생들 실력을 평가하고 나서 방학 때 우울증까지 걸릴 뻔했다.
충격이었다.
정확한 문제 해답률이 10퍼센트를 밑돌았다.
대충 봐줄 만한 비율은 30퍼센트.
나머지는 답안지에 ‘교수님 사랑해요’라고 쓴 편지부터 시작해, 고등학교 수준의 말도 안 되는 답들로 채워졌다.
양심상 도저히 학점을 줄 수 없어 강의 수강생 3분의 1에게 F학점을 줬다.
전공 필수였기에 패스하지 못하면 졸업을 못했다.
학과생들 사이에 난리가 났다.
그래도 정교수인 남궁동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학생들 실력이 점점 떨어졌다.
대한민국 지성의 보고라는 한국대 수학과에서 일어난 참사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학과장의 압력이 들어왔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한국대 수학과 동문 선배로서 도저히 용납이 안 됐다.
“공부하면 얼마나 좋을까……. 과거처럼 수학 강사로 풀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한국대 수학과 졸업해 봐야 과거 진로는 뻔했다.
교수 아니면 잘나가는 강남 과외 교사였다.
동기들 중에 빌딩 산 놈도 있을 정도로 한국대 수학과 졸업생들은 잘 먹고 살았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
인터넷 강의가 도입되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강의업계에도 불어 닥쳤다.
피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하늘이 살 길을 열어줬다.
학자가 아닌 방향으로 갈 길이 나타났다.
IT쪽이 발달하면서 알고리즘이 핵심으로 등장했다.
응용수학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한국 대기업뿐만 아니라 세계의 IT 업계에서 추천장이 날아왔다.
분야 간 장벽이 무너지며 수학분야도 빠르게 변화했다.
순수수학과 논리학이 결합되고 웨이블렛과 신호처리, 암호론, 양자계산, 신경과학을 포함한 수리생물학, 금융수학 및 컴퓨터 알고리즘 분야까지 수학의 가지가 뻗어나갔다.
수학자는 많았지만 진짜 필요한 능력자는 드물었다.
연봉도 파격적이었다.
실력이 뛰어난 학생은 가뿐하게 초봉이 수십만 달러를 넘었다.
다른 학문과 달리 수학은 적성과 능력을 타고나야 했다.
실력자는 금방 판별됐다.
일반인이 볼 수 없는 직관력과 해석 응용력은 비범한 재능을 요구했다.
하지만 갈수록 그런 실력자들이 수학과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한민국 슈퍼 인재들은 대부분 법학과나 의학 계열 쪽으로 빠졌다.
진짜 수학 천재들은 한국대에 입학을 못했다.
수학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들도 상위 1프로를 넘어야 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반인이 봤을 때 미친놈이라 불릴 정도의 천재가 타 과목에 흥미를 보일 리가 없었다.
대한민국 교육 과정에서 수학과는 진짜 천재를 영접할 수 없었다.
“휴우……. 게으른 녀석들 엉덩이를 걷어 찰 수도 없고…….”
한국대 간판만 따기 위해 들어온 학부생들이 반절이 넘었다.
고등학교 수학 실력만 믿고 들어왔다 다들 낭패를 봤다.
한숨을 쉬며 남궁동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부분 얼굴을 알고 있는 3학년들이다.
4학년들 중에도 패스 못한 녀석들이 있었다.
대충 마무리 해줘야 졸업하는 그놈들을 생각하자 이마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선배이자 교수였다.
최선을 다해 가르쳐 주리라 마음먹었다.
거친 세상에서 의지할 건 아부나 빽이 아닌 실력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저벅저벅.
힘없는 걸음으로 교수실 같은 층에 있는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의 첫날.
녀석들의 기를 납작하게 만들어 공부에 매진하게 만들 묘수를 생각했다.
타닥 타다다다닥.
‘응?’
강의실 안에서 칠판에 누군가 빠르게 뭘 적는 소리가 들렸다.
‘맞는데?’
403 강의실을 확인하고 남궁동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학과 학생들 중에 문제 풀이를 위해 칠판을 사용하는 경우는 가끔 있었다.
그래도 교수에 대한 예의로 강의 시작 전에는 사양했다.
다른 과와 달리 풀이 과정을 보여줘야 하는 경우가 많기에 깨끗한 칠판이 원칙이었다.
과대표가 대부분 통제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문에 달린 창으로 학생들이 보였다.
다들 넋을 잃고 칠판을 바라보는 수학과 제자들이다.
‘무슨 일 있어?’
가끔 공부 빡세게 하고 나타난 복학생들이 수학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경우가 있긴 했다.
자존심 강한 놈들이라 내기를 했다.
하지만 요 근래 그런 용자는 없었다.
남궁동호는 소리 없이 뒷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강의 시작 전이라 대부분 수강생들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오늘은 달랐다.
멍청해진 시선으로 칠판만 바라보는 학생들.
‘뭐야?’
빽빽하게 채워진 칠판을 보며 남궁동호 교수는 인상을 썼다.
일찍 찾아온 노안인지 숫자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학자답게 대충 기호를 때려잡았다.
집중하는 남궁동호.
“허엇!!!”
신음을 터트렸다.
한때 자신도 도전했었고 괴로워했던 전설의 암호 해독 수학 공식.
“에, 에니그마 해설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