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
회귀의 전설
246장. 해어화와 꽃뱀
“미, 미친놈이야! 아니 악마 같은 놈이야!”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장태산 사무실에서 도망치듯 걸어 나온 강주희는 길가 벤치에 앉아 숨을 골랐다.
막판에 보여준 눈빛에서 강주희는 처절하게 무너졌다.
사람 죽여 본 놈 같았다.
민주화 투쟁 때 수많은 동지들이 고문을 당하고 폭행당하는 모습을 봤다.
그들이 마주쳤다던 인간의 탈을 쓴 고문 악마가 떠올랐다.
교수들 말을 듣고 협상하러 왔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순진한 법대 교수들은 장태산이 능력도 뛰어나고 선후배를 아낄 줄 아는 인재라고 했다.
저렇게 무서운 놈이라는 걸 모르고 하는 순진한 소리들이었다.
“하아……. 하아아.”
강주희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교수들은 자신들 이름을 팔면 장태산이 섭섭지 않게 대할 거라고 했다.
투자 회사 앞에서도 경비원들에게 학교 선배라고 한마디 말하고 통과했다.
당당히 마주한 여비서에게 커피도 요구 했다.
한국 대학교 선배라는 위치를 톡톡히 누렸다.
사무실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어린놈 수준에 옳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쌓았다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협상을 통해 얻을 건 얻어내려 했다.
그리고 미래 돈 줄로 삼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던 예쁘장한 여직원을 보고 착각했다.
남자라고 미녀 비서 하나 달랑 놓고 대표질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지없이 깨졌다.
사나운 맹수가 따로 없었다.
임준형에게 던졌다는 경고가 거짓 같지 않았다.
건들면 바로 앞에서 물어뜯을 것처럼 말하던 놈.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TS는 손 뗀다. 이건 답이 없어.”
빠르게 손익 계산이 오갔다.
흡사 악마 같은 장태산과 싸워봤자 남는 게 없었다.
파업하던 노조원들 모두를 해고하는 놈이다.
정부가 바뀌었지만 노조가 강성이라는 걸 염두에 두지 않았다.
덤빌 테면 덤비라는 깡으로 무장되었다.
- 사랑도 우정도~♬.
그때 강주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에 강주희 인상이 팍 써졌다.
“여보세요.”
- 위, 위원장님! 방금 집사람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퇴직 통고와 함께 손해배상 소장이 날아왔다 합니다! 100억입니다! 100억!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노조원들 상당수가 탈퇴하고 새로운 노조에 가입한 것 같습니다!
케미칼 지회장 한양동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주희 인상이 더 찌푸려졌다.
이제는 손을 떼야 할 때였다.
기회가 좋았다.
“지회장님 노조원들 하나 다독이지 못하셨어요?”
- 네?
“그렇게 무능하시면서 어떻게 큰일을 하겠다는 건가요? 지회장은 어떤 짓을 해서라도 노조원들에게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회장님은……. 신임을 잃은 것 같네요.”
-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무실에 들어가 알아봐야겠지만 다른 노조가 출범했다면……. 저희도 입장이 곤란하게 됩니다. 그쪽 노조도 결국은 노조원이니까요.”
- 뭐라고! 야! 강주희! 너 지금 뭔 개소리…….
뚝.
강주희는 욕이 터지는 순간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번호를 차단했다.
“좌우지간 무식한 것들은 성질만 더럽다니까……. 쯧.”
혀를 차는 강주희는 감정이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잘나가는 후배는 차원이 달랐다.
오정의 후계자에게 경고를 날렸다는 놈이다.
대한노총 따위로 어찌할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다.
해외 자본까지 결탁했다.
앞으로 TS쪽 노조 일은 무조건 거절이다.
“후배……. 지켜보겠어! 언젠가 내 도움이 필요할 날이 반드시 올 거야!”
높은 빌딩을 올려다보며 노려보는 강주희.
또각 또각.
힘을 내서 지하철을 향해 걸어갔다.
과거부터 잘난 놈들에게 짓밟혔던 자신의 인생.
이제는 지치고 힘들었다.
어차피 노총도 기업과 생리적으로 똑같았다.
그 안에도 권력 서열이 있었고 인맥과 줄, 돈과 향락이 오고갔다.
술을 들이키며 동지들의 미래를 언급하지만 다른 손으로는 허벅지 살을 더듬는 자들이 상당수였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믿을 놈 없는 세상.
강주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언제나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버텨왔던 인생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란 걸 알았다.
그리고 장태산이 했던 말처럼 한국대 법학과 이름에 먹칠하는 선배는 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그 누구를 밟고 올라서고 또 이용해서라도 반드시!
***
“회장님! 노조에서 백기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모두들 밖으로 나와 경찰에 순순히 연행됐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모두 회장님 덕분입니다.”
강주희가 똑똑했다.
바로 내 경고를 알아듣고 손을 뗀 것 같다.
“소송은 그대로 진행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적당한 시기에 취하하겠지만 그 전에 고통을 충분히 가할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마음껏 폭력을 행사하는 시대는 지났다.
못된 습성을 고치지 않는 이상 대한민국의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바로 정상 가동하시고 새로운 노조에게는 경고하십시오. 주인의식으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되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것들만 주장하라고 말입니다.”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다른 애로사항은 없습니까?”
“여기저기서 실제 지배주주가 누군지 알아내려 혈안이 돼 있습니다.”
“비밀은 항상 엄수하십시오.”
“회장님 뜻대로 되실 겁니다.”
믿음직한 하관우 회장이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첫 번째 노사협상이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강주희가 찾아와 준 덕분이었다.
득보다 실이 크다는 걸 알고 손을 뗀 강주희의 잔머리에 찬사를 보냈다.
나중에 정치자금이라도 쏴주고 싶었다.
그녀가 머리 굴리는 만큼 이용할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뭐해요?”
그때 옆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은하고 시원한 향수 냄새만으로도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회사 일 합니다.”
“그렇게 바빠요? 저 때문 아니죠?”
9월 초의 더위가 남아 있는 학교는 온갖 짧은 치마의 향연이었다.
한국대 여자들 못생겼다는 편견은 진작 버렸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과 몸매도 착한 여학생들이 넘쳤다.
더욱이 방학 때 성형 코스 밟고 온 인조 미녀들이 교정 곳곳을 걸었다.
그에 반해 자연미인 온시은은 상큼함을 자랑했다.
하늘색 여름 셔츠와 깔끔한 치마는 보는 눈까지 시원하게 만들었다.
예쁜 여자는 언제나 옳았다.
“시은 제약 때문이기도 하죠~.”
“돈……. 많이 들어갔다고 들었어요.”
확실하게 쏴줬다.
로버트와 짜고 해외 재무적 투자자를 자처한 자본을 투입했다.
LOR 투자 자회사에 지분구조를 낮게 만들고 자본금을 몰아넣었다.
상장하기 전까지는 전혀 쓸모가 없게 만들었다.
자그마치 2천 억.
시은 제약은 단숨에 우량 기업이 됐다.
“기죽지 마요. 지분 다 저에게 넘겼잖아요.”
웃자고 농담을 던졌다.
“어? 그거 지참금으로 받아주는 거예요?”
농담을 던졌는데 언제나 돌아오는 건 상상 이상의 답이다.
초롱초롱 반짝이는 온시은 눈빛은 진실이냐고 묻고 있었다.
세상이 어느 시절인데 지참금이란 말인가.
정말 사상이 독특한 공대 누나다.
“하는 거 봐서요.”
“됐어요. 그냥 가져가도 돼요. 저에게……. 슈퍼컴만 사주면~.”
슈퍼컴만 들어 있는 그녀 머릿속이 궁금했다.
“왜 그렇게 슈퍼컴을 탐합니까?
“……남자들에게 슈퍼카가 로망인 것처럼 나에게도 그래요. 세상에서 가장 세고 강한 놈을 가지고 싶었어요.”
말을 하면서도 온시은은 신께 구원받은 신도처럼 손을 모았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듯 위험한 공대 누나다.
“사주실 거죠? 전 믿어요.”
“그, 그럼요. 약속인데…….”
나도 슈퍼컴이 필요했다.
AI 기술을 선점 애용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구입할 품목이다.
“데이터 센터는요?”
“10월에 본격적으로 착공 들어갈 것 같습니다.”
돈 벌어서 시골 동네에 확 뿌렸다.
내 맥주를 얻어 마신 양우석 국회의원에게 부탁했다.
장주시 시장이 현 여당 출신이지만 학교 선배였다.
이것저것 여러 루트를 통해 당근을 던지자 덥석 물었다.
지방 시장은 투자에 민감했다.
아버지가 동네 땅값이 들썩인다고 말할 정도다.
데이터 센터를 비롯해 경호업체 실전 연습장을 비롯해 내가 추구하는 미래설계의 핵심 기업들이 유치될 것이다.
결코 요란하거나 소란스럽지 않은,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물들과 함께 말이다.
사업체를 세우고 투자금을 몽땅 넣을 예정이다.
남들이 봤을 때 미친놈 돈지랄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스케일로 계획 중이다.
“그런데 무슨 걱정 있어요?”
“왜요? 뭐가 보여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힘들어 하는 마음이 느껴져요.”
“네? 내가 힘들어한다고요?”
“태산 씨 마음의 소리를 한 번 들어봐요. 그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공대 누나는 가끔씩 깜짝 놀라게 만든다.
여자의 육감이 날카로웠다.
해어화(解語花)라는 말이 문뜩 생각났다.
말의 뜻을 이해하는 아름다운 꽃.
온시은과 대화중에 그녀의 다른 매력이 보였다.
내 마음을 살필 줄 아는 눈과 귀를 가졌다.
조신한 말투는 상대를 편하게 만들었다.
속마음을 읽어내는 온시은의 말에 날 되짚어 봤다.
비비와 약속한 홍콩 결혼식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신들과 소통한 이후부터 강해져 왔던 기감이 꺼림칙함을 보내고 있었다.
그게 얼굴에 드러난 것 같다.
“시은 선배는 가끔…….”
“선배라는 말 빼줘요. 내가 엄청 늙어 보인단 말이에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드라마에 좋은 대사 많잖아요. 시은아……. 뭐 그런 거 있잖아요.”
헐……. 말 놓자고?
온시은 많이 발전했다.
얼굴이 붉어졌지만 할 말은 했다.
“그럴까……?”
까라고 또 깐다.
“응. 태산 씨~”
온시은이 활짝 웃는다.
남자 나이가 어려도 연인이 된 이후 오빠라 부르는 여자들이 있다던데 딱 온시은이 그런 것 같다.
아직 연인은 아니지만 온시은이 많이 의지해 오는 게 느껴졌다.
클럽 사건 이후로 그랬다.
흐려진 의식에서 깨어나 아빠에게 당당히 좋아한다 말하던 온시은.
그녀가 가을 코스모스처럼 미소를 지었다.
순수하게 아름다웠다.
그녀를 따라 웃었다.
“오! 선배! 대단해요! 지난 학기 법학과 2학년 과 톱이었다고 들었어요.”
“내년에 사시 1차 시험 보실 거죠?”
“신림동에 갔던 선배들이 칭찬하셨다면서요? 기본 실력이 탄탄하다고.”
“크으. 오늘 땡 잡았네요. 선배님이 거하게 점심도 사주시고~. 커피까지~.”
“부끄럽게 왜 그래? 너희들 같이 귀여운 후배들이 내년부터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으흐흐. 저희들만 이뻐해 주십시오.”
“충성! 충성!”
여왕벌이 지능 딸리는 일벌들과 함께 교정을 거닐었다.
한눈에 봐도 가식이 철철 넘쳐 보이는데 그 화려함에 속아 정신을 못 차렸다.
손에 아이스커피를 든 무리들과 길가에서 마주쳤다.
“어! 장태산!”
“뭐야? 여자 또 바뀌었어?”
“저 자식 제비야? 학교에 연애하러 온 거야?”
이예린과 나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는 듯 남자 동기들이 강한 적의를 드러냈다.
못난 놈들의 호기는 만용이라는 걸 몰랐다.
“과 친구들이에요?”
“뭐 그런 것 같습니다.”
별로 친하지 않은 놈들이다.
그 와중에도 시은 선배 미모를 보고 질투를 보이는 놈들을 동기라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태산아 방학 잘 보냈어?”
이예린이 눈웃음을 치며 말을 걸어왔다.
강주희를 만난 후라 느낌이 팍 왔다.
이예린과 강주희 선배는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꽃뱀.
살모사보다 더 강력한 독을 소유했으면서도 사람들에게는 독이 없는 것처럼 위장해 살아가는 뱀.
“예린 선배……. 눈치 없어요?”
“그게 무슨…….”
옆에 있던 온시은의 손을 잡았다.
“지금 데이트 중인 건 안 보입니까?”
콩닥콩닥 온시은의 심장이 손으로 이사와 뛰는 것 같았다.
파직!
이예린의 눈에서 퍼런 도깨비불이 점화됐다.
요즘 본성을 숨기고 사는 인간들 여럿 각성시키는 중이다.
“다음부터는…… 우리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면 좋겠습니다. 그게 우리 인연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매정하게 끊어도 미련을 갖고 다시 다가서려는 이예린을 확실히 잘랐다.
그녀의 눈빛에서 보이는 불온한 감정들.
어떻게든 나를 파멸하고픈 강렬한 욕망들이 들끓었다.
차갑게 비웃었다.
한번 배신한 자는 기회만 잡으면 두 번도 쉽게 배신하는 법.
이예린과 벌떼들을 뒤로 하고 온시은과 손을 잡고 오늘도 평화로운(?) 교정을 걸었다.
해어화와 꽃뱀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아가지만 스스로의 마음가짐에 따라 운명이 달라졌다.
독기로 활활 자신을 태우는 이예린이 안타까웠다.
나쁜 마음 하나 버리면 세상 모든 게 행복할 텐데 그녀는 정녕 몰랐다.
첫사랑에 대한 연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와……. 저 밥맛 같은 새끼!”
“선배 저 새끼 손봐줘요?”
뒤에서 들려오는 허세 작렬 벌떼들 목소리가 윙윙댔다.
그런 그들에게 소리 없이 충고했다.
요란하게 치장한 너희들 옆에 선 꽃뱀이 가장 무서운 독을 품고 사는 독사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