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3화 (243/1,284)

 # 243

회귀의 전설

243장. 임준형 (2)

“임준형 부사장이라면……. 오정의 후계자를 말하겠지…….”

대화를 나누는 중에 듣게 된 장태산의 통화자 이름.

장태산은 약속을 잡고 떠났다.

아침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경영관 창밖으로 보이는 여기저기 오가는 학생들의 발걸음에 생기가 가득 넘쳤다.

“믿어야 해? 아니면 사기꾼? 풋……. 후후.”

이동진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뭐에 홀린 것처럼 학부생과 대화를 나눴다.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예견이라고 말했지만 눈빛에서 확신을 읽었다.

주고받은 대화에서 등장하는 경제 용어와 연결된 세계 상황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특히 버냉키 연준 의장의 논문과 그의 앞으로의 행보를 예측할 때는 할 말이 없었다.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쉽게 지나치는 핵심이었다.

장태산 말처럼 순진한 학자들의 생각은 이 위기에서 너무 안일했다.

닥터 둠처럼 비관적인 사태를 예견하는 이가 드물었다.

“달러 양적완화를 내 생에 볼 줄이야……. 그렇다면 발권국들이 가만있지 않겠지. 유럽도 일본도 찍어낼 거야.”

경영뿐만 아니라 경제학에도 통달한 이동진 교수는 생각을 확장했다.

장태산이 던진 화두를 잡자 모든 게 그려졌다.

아니 예측 가능한 모델이 됐다.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인데…….”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렸다.

주장은 인정하지만 자꾸 마음에 벽이 생겼다.

그 나이에 불가능한 학식과 견해였다.

“맞는다면 대박이겠어.”

이동진은 장태산의 말을 신뢰했지만 투자할 생각은 없었다.

믿음이 갔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기울지는 않았다.

경제학자가 할 일은 과거를 공부해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동진은 충분히 행복했다.

돈에서 의외로 자유로운 학자였다.

돈을 따랐다면 한국대가 아닌 월가에서 근무했을 것이다.

“그 말이 맞는다면 괴물들 위에 괴물이겠지……. 천외천(天外天)이라 불려야겠군.”

이동진 교수는 심장이 뜨거워졌다.

잘난 후배를 볼 때마다 느끼는 학자로서의 승부욕!

“그래도 명색이 시카고 학파 추종자인데 반대 의견도 충실히 모아봐야겠지~ 앞으로……. 강의 시간이 심심치는 않겠어.”

고리타분한 동료 학자들과 다른 꿈틀거리는 생각을 소유한 학부 제자와의 한판 승부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여파는 다른 학생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장태산이 정말 능력이 뛰어나다면…….

강의를 듣는 제자들은 미래의 보물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무서운 녀석……. 설마 그것까지 깔고 간 건 아니겠지?”

***

“골프장이라…….”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았다.

오정 후계 임준형이라고 해도 겁날 것은 없었다.

아직 승계 받지 못한 그깟 주식 몇 푼이나 하겠나.

그러나 임윤아 오빠라는 말에 가슴이 턱 막혔다.

여자 친구 오빠가 그렇게 무섭다고 하는데 느낌이 팍 오는 게 실감이 갔다.

임윤아가 여친은 아니지만 괜히 쫄렸다.

잘못한 것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도 오라는 소리에 바로 “네.” 대답이 나왔다.

급히 차를 몰고 강남 골프 매장에 들렀다.

골프에 대해선 아는 게 전무했다.

지난 생에 최고 잘한 운동은 군대 축구 밖에 없었다.

후임들이 봐주며 몰아주는 공을 똥볼로 날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옷이 환상이네~. 크.”

운전하는 중에도 눈에 들어오는 화려한 원색에 감탄이 나왔다.

연초록 바지에 새하얀 반팔티를 입었다.

여직원이 모델 같다며 강력 추천해줬다.

골프 모자와 장갑, 신발 골프채까지 가볍게 2,000만 원 긁어줬다.

생각보다 저렴했다.

그렇게 붕붕이를 타고 도착한 용인 골프장.

확실히 서울 시내와 달렸다.

기온 몇 도 차이였지만 가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끼이익.

주차장에 차를 파킹했다.

“장태산 대표님?”

인이어 마이크를 착용한 경호원이 대기하고 있다 물었다.

“제가 장태산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사용법을 몰라 풀세트로 장만한 골프백을 메고 경호원 뒤를 따랐다.

주차장은 예상외로 한가했다.

임준형이 전세라도 낸 듯 인기척이 거의 없었다.

“골프백은 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습니다.”

경호원 얼굴에 난색이 그려졌다.

골프백을 줬다.

괜히 사람 밥 줄 끊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들 세계에서 통용되는 또 다른 규칙이었다.

저벅저벅.

경호원 뒤를 따라 골프장 메인 건물로 들어갔다.

높은 천장과 대형 유리를 통해 탁 트인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도시인은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릴 것 같았다.

“들어가십시오.”

커피숍 라운지 앞에서 경호원이 걸음을 멈췄다.

나만 들어가라는 말이다.

손에 장갑과 모자를 들고 안내한 곳으로 들어갔다.

잔잔한 피아노 클래식 선율이 흘렀다.

그리고 창가 옆에 목 좋은 곳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TV에서 워낙 많이 봐서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다 아는 사내.

그를 향해 걸어갔다.

창밖을 보던 임준형의 시선이 날 향했다.

부딪치는 시선.

안경 속에 감춰진 눈빛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누구나 상대방의 첫인상을 중요시하는 법이다.

임준형은 나에 대한 평가를 끝낸 것 같다.

나 또한 임준형에 대한 빠른 판단을 마쳤다.

외로운 호랑이 새끼.

그리고 벌써 지쳐가는 남자.

그러나 잠재력이 넘치는 대한민국 넘버원 부잣집 아들.

나른한 눈동자에 이채가 서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자신을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내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 같다.

“…….”

서로 마주보며 짧지만 길게 응시했다.

치열한 탐색전.

씨이익.

임준형이 웃는다.

1차 평가가 끝났음을 알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LOR 투자전문 회사 대표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도 만나서 반가워. 자리에 앉지.”

입을 열자마자 반말이다.

한국대 동문이자 임윤아 오빠로서의 자세다.

입가에 싱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임준형이 앞자리를 가리켰다.

일단 첫인상은 합격을 받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바로 쫓겨났을 것이다.

“뭐 마실래?”

“마시고 왔습니다.”

“그래 그럼 바로 뛸까?”

“오늘 골프장 처음 와봤습니다.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엄살 안 부려도 돼. 누구는 처음부터 잘 쳤나. 두들기다 보면 금방 실력 늘어. 딱 보아하니 장래가 유망해 보여.”

임준형은 의외로 말이 많았다.

안경 너머로 눈빛이 번뜩였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 같았다.

그러나 잘못 데리고 놀면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 위험한 녀석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썸 타는 건 임윤아지 임준형이 아니다.

임준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른 몸 같았지만 의외로 체격이 잘 잡혔다.

2008년 이때는 갓 삼십 중반을 넘은 청년이었다.

위아래가 하얀색으로 통일됐다.

“골프장 쉬는 날 같습니다.”

로비에도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직원들만 눈에 띌 뿐이다.

“자네도 배워둬.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일반 사람과 마주치지 않는 게 좋아. 그들에게는 우리 일상이 드라마 같거든. 판타지를 충족 시켜줘야 기업 가치도 올라.”

“네?”

“넘치는 돈 아껴서 뭐해. 이럴 때 접대비로 쓰면 세금 절약도 되고 좋잖아. 서로 신경 쓰느라 피곤하지도 않고 말이야.”

갑질 같은 말 같아도 절대 갑질 같지 않았다.

임준형은 국민들의 마음을 잘 꿰뚫고 있었다.

괜히 뭐라고 튀는 행동 하나 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점점 더 1인 미디어 활용이 넘쳐 나는 시절이다.

서로 봐봐야 좋을 것 없었다.

상대적 박탈감이 넘치는 이들에게 모든 부자들은 타도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조언 감사합니다.”

“나 좋은 사람이야. 까탈스럽지도 않아. 즐겨먹는 게 컵라면이야~.”

농담인 것 같은데 웃음이 안 나왔다.

컵라면이 한때 주식이었던 나였다.

그냥 사는 방식의 차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이제 라면을 즐겨먹지 않았다.

밖으로 나왔다.

경호원들이 골프 가방을 들고 어느새 따라왔다.

캐디도 없었다.

임준형의 사생활이 거의 알려지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가끔 TV에서 외국 기업가들 만나거나 해외 사업장 방문하는 모습이 다였다.

다른 재벌 집 자식들이 사고 쳐서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과 비교됐다.

휘리리링.

탁 트인 골프장 벌판으로 바람이 달려왔다.

“흐으~ 시원하다. 자네도 좋지?”

자네란다.

두 팔을 벌려 바람을 맞는 임준형은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자세를 잡았다.

누구보다 잘나고 부러운 인생이지만 행복하겠지 하는 섣부른 판단은 보류다.

1백만 명에 가까운 직원과 가족들의 생사를 쥐고 있었다.

임 씨 가족 판단 하나에 백수가 넘치는 세상이 올 것이다.

대한민국 재벌의 특징 중 하나다.

대마불사라 불리는 이유기도 했다.

앞으로의 세계는 점점 더 공룡기업들만 살아남게 된다.

국가가 대주주인 기업들은 온통 낙하산으로 수익률이 곤두박질친다.

그에 반해 재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더럽고 치열하게 전쟁을 치른다.

그 와중에 인간성 제로인 것들이 사고를 치고 조롱을 받는다.

재벌의 딜레마에 빠진 대한민국.

나도 그들에 대한 개인적 판단은 보류다.

일류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대형 재벌은 필수였다.

“게임 어때?”

“게임요? 오늘 처음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왜 이래. 사업도 투자도 처음이라고 실패하면 물려달라고 할 거야?”

그건 아니지만 지금 임준형 실수하는 거다.

나 게임 좋아한다.

그것도 큰 도박판은 주 놀이터다.

“하하. 그렇기도 합니다. 뭘 걸까요?”

“도와주지.”

“뭘 말씀입니까?”

“자네가 승리하면 우리 윤아가 버리지 않는 동안 내가 옆에서 도와주지.”

실로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의미에 따라서는 날 오정 가의 식구로 받아줄 수도 있다는 소리다.

“제가 패배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조용히 살면 돼. 우리 가족이 생각보다 복잡한 관계인 건 알지?”

주식으로 서로 얽혀있는 복잡한 재벌가.

묘하게 웃으며 본격적으로 날 떠보기 시작했다.

이 얘기를 로버트가 듣는다면…….

건방진 오정그룹 산산조각으로 찢어 날려버리겠다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

“…….”

다시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경호원들은 멀찍이 떨어져 다가오지 않았다.

오직 둘만이 서 있는 골프장 1번홀.

도박판 판돈을 꺼내기 이보다 좋은 곳은 없었다.

“제안이 틀렸습니다.”

“???”

내 말에 임준형이 무슨 말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제가 다시 제안을 드리죠~.”

“자네가?”

“제가 패하면 완벽한 오정의 주인이 되도록 도와드리죠.”

“뭐, 뭐라고!”

임윤아가 물건도 아니고 거래 품목에 오른 것 자체가 별로다.

임윤아가 목적이 아니다.

임준형은 판돈 자체가 작았다.

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제가 승리하면……. 오정은 저에게 뭘 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물었다.

오정 너희가 나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 어필하라고 말이다.

나를 뜨겁게 바라보는 임준형.

“하하…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잠시 뒤 시원하게도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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