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
회귀의 전설
239장. 거미줄과 황금 나비
“다니엘……. 다니엘…….”
비비라는 말에 비비안은 다니엘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소리 없이 불어온 바람처럼 스치고 떠나버린 그와의 추억이 가슴 저렸다.
우연히 만나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
생과 죽음을 오가고 희망과 공포에 뒤섞인 기억들이 소중했다.
- 어디야? 잘 지냈어?
다니엘의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 좋게 부드러웠다.
프랑스인보다 더 정확한 발음으로 물어온 다니엘의 안부.
그 순간 그리움과 보고 싶었던 마음이 폭풍처럼 일었다.
“괘, 괜찮아……. 다니엘은?”
괜찮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후 아빠에게 엄하게 꾸중을 들었다.
비비안으로 인해 가문의 기사들이 크게 다쳤다.
책임이 주는 고통을 벌로 받았다.
그사이 총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아사신에 대한 정보와 그들의 퇴치법에 대해 정확하게 숙지했다.
정신없이 바빴다.
그리고 다니엘이 얼마나 대단한 남자인지 새삼 깨달았다.
총도 없이 기사들도 상대하기 어렵다는 아사신을 전멸시켰다.
의문도 들었다.
무기도 없던 다니엘의 손에 들렸던 거대한 도끼가 계속 머리에서 맴돌았다.
에두아르에게 거짓말을 하던 다니엘이었다.
분명 마법사들처럼 허공에서 도끼를 뽑아 아사신을 쪼갰다.
비밀이 많은 남자 다니엘.
집사 코린 경이 전해 준 정보에 의하면 대단한 부자라고 했다.
특이한 능력자라고 평가를 받았다.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얻자마자 바로 연락했다.
- 나야 잘 지내지. 비비는 어디야? 프랑스야? 학교 개강 안 했어?
다니엘 목소리에 그 동안의 궁금함이 가득 담겼다.
“아직 개강 전이야……. 지금 프랑스 집이야. 그런데 다니엘. 2주 후에 시간 돼?”
- 응?
“나 홍콩 가는데 올 수 있어?”
- 홍콩? 무슨 일 있어?
“오빠가 결혼해.”
-언제?
“홍콩 시간으로 토요일 오후 2시. 장소는 성마가렛 성당이야.”
- 갈게.
“진짜?”
- 물론이지.
“꺄아아아아!”
비비는 터져 나오는 환호성에 비명을 질렀다.
아사신 공격 때문에 자신과 거리를 둘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해봤다.
일반인이라면 무서워 다시는 연락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쿨 하게 받아줬다.
- 그렇게 좋아?
“물론이지! 환상이야!”
연인이 아니어도 괜찮다.
다니엘만 옆에 있다면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
하늘에서 엄마가 보내 준 수호천사 같았다.
그리고 그가 지금 이 순간 너무 보고 싶었다.
- 이 번호로 연락하면 돼?
“……당분간 힘들 것 같아. 아직 근신 기간이야.”
- 힘내.
“응……. 다니엘도.”
“아가씨…….”
뒤에서 들려오는 에두아르의 부름에 비비안은 서운함이 가득 밀려왔다.
아직 허락되지 않은 핸드폰이었다.
경호원 에두아르가 특별히 빌려줬다.
이제는 끊어야 할 시간.
“기다릴게. 꼭 와!”
- 홍콩에서 봐.
“안녕……. 친구.”
그렇게 짧은 통화가 끝났다.
“아가씨, 그자는 위험인물일 수 있습니다. 가문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정보입니다.”
에두아르가 안타깝게 비비안을 봤다.
아사신을 처단한 솜씨를 보면 능력자라는 소리다.
기사단에서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제거될 수도 있었다.
“만약 다니엘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설령 아빠라고 해도…….”
독하게 다짐하는 비비안.
그녀의 몸에서 고귀한 혈통만이 풍겨낼 수 있는 강렬한 의지가 방출됐다.
***
“대표님……. 프랑스어 정말 달콤해요~.”
유세라 팀장은 손을 붙잡고 소녀팬처럼 행동했다.
“비비? 프랑스 애인 맞죠? 동영상에 등장한? 홍콩 결혼식? 가실 거예요? 좋겠네. 우리 대표님~.”
미국 명문대에서 수학한 도도희는 프랑스어를 알아들었다.
“결혼식? 대표님 결혼해요?”
“언니, 그게 아니라. 비비라는 프랑스 미녀가 초대했어.”
“휴우……. 다행이네. 난 또 우리 대표님 결혼한다고…….”
착각은 각자의 자유다.
홍콩이라는 말에 생각이 복잡했다.
약속했지만 가슴 한쪽이 저렸다.
한때는 좋아했던 여자가 살던 도시였다.
지금은 생각나면 아픈 이름이 됐다.
“친구 사이입니다.”
비비와 뜨거워질 뻔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여행은 짧았고 본의 아니게 그녀로 인해 얻은 건 많았다.
이계 여행의 단초가 비비 덕분이었다.
“다들 그래요. 처음에는 친구~ 그러다 좀 더 친한 친구? 그러다~”
살살 웃는 도도희 여우.
내 주변에서 당신이 제일 위험해!
***
부우우웅 부우우웅.
붕붕이를 타고 학교 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난 생 대학시절에는 매일 침 흘리며 봤다.
나보다 못난 녀석도 자가용에 미녀 여자 친구를 태우고 다녔다.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먼저 보고 여자는 남자의 차키를 본다.
언젠가 보았던 어느 잡지에 실린 내용이었다.
속물이라고 해도 좋았다.
한때 내가 부러워하던 스포츠카를 직접 몰고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헤이 걸~ 헤이걸~♬.]
스피커에서는 빵빵하게 송효리의 헤이 걸이 터졌다.
[지금 이 순간~♪.]
어깨가 들썩였다.
9월이었지만 늦더위가 기승이었다.
에어컨에서 뿜어 나온 냉기 가득 찬 차 안은 경쾌한 노래로 파티장 같았다.
회귀한 인생, 이게 좋았다.
과거 노래를 들어도 누가 아재라고 하지 않았다.
9월의 개강 첫날.
학교 정문은 학생들의 분주한 움직임으로 번잡했다.
더운 날에도 미래에 대한 희망의 가방을 메고 묵묵히 걸어갔다.
대부분 졸업 후 대한민국의 중요 집단의 인재가 될 이들이었다.
사방에서 피터지게 공부해 좁은 문을 통과한 이들.
하지만 이곳 한국대 내에서는 모두가 또 경쟁해야 하는 학생에 불과했다.
경쟁 사회의 또 다른 이면이었다.
“응?”
그 때 유달리 어깨가 푹 꺼진 남학생 하나가 보였다.
세상 근심 모두 다 어깨에 짊어진 것 같았다.
“학필 선배잖아?”
한국대 법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예비역 학생회장.
독불장군 같지만 의외로 따뜻한 심성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럼에도 후배들에게 불똥을 튕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밥도 사줬던 학필 선배가 무더위 속을 힘없이 걸었다.
오늘따라 더 처져 보이는 선배.
끼이익.
학필 선배 앞에 차를 멈췄다.
스르륵 창문을 열었다.
“학필 선배~.”
“어? 태산아!”
나를 돌아보며 반가워했다.
“타세요.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그럴까?”
땀이 뚝뚝 흐르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를 몇 번 겪어 봤기에 거리감 없이 편하게 대했다.
“오오! 역시 명품 스포츠카다워! 죽인다 죽여!”
차문을 열고 타던 선배는 내부를 훑어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고시에 합격하면 미녀들이 열쇠 들고 올 겁니다. 그때까지만 참으십시오.”
“넌 안 참고 있잖아?”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차 제가 돈 벌어 타고 다닌다고.”
“그 말 진짜야? 집이 부자 아니고?”
“왜 다들 제 말을 안 믿을까요? 고등학교 재학 중에 끝내주는 주식 투자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독특한 알고리즘을 통해 얻은 수익이 엄청났습니다.”
“……뻥 아니지?”
“저 천재입니다.”
“재수 없는 후배 같으니라고!”
“부러우면 선배도 하세요. 자유경쟁 자본주의 사회에서 못할 게 뭡니까~.”
“난 천재가 아니라 범재다…….”
“알면 고시 공부에 매진하세요.”
“와아……. 장태산 너 진짜 나쁜 후배인 거 알지?”
“막 인생을 치열하게 살고 싶다는 의욕이 불타오르지 않습니까? 너보다 더 성공해서 언젠가 복수하겠다! 이런 뜨거운 감정이 폭풍처럼 일어나죠?”
“……으으으. 진짜 패주고 싶다.”
“폭행죄입니다. 고시 못 봐요~.”
“아우! 법이 널 살렸다!”
선배가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제 총 든 놈들 빼고 무서운 자는 세상에 없었다.
“선배~ 힘들죠?”
“어? 뭐, 뭐가?”
걸러지지 않은 직구에 선배가 당황했다.
자칫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저 고2때까지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10만원 용돈 받아서 차비로 사용하고 나면 5만 원 정도 남았습니다.”
나의 과거지사를 꺼냈다.
사람을 위로하는 데 있어서 때로는 나의 아픈 과거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특효를 발휘할 수 있다.
“…….”
“그 돈으로 학습지, 학용품 구입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부모님 어려운 거 아는데 더 달라고 말을 못했습니다. 그게 다 스트레스였습니다.”
친구들과 컵라면 하나 제대로 못 먹었다.
웬만한 건 친구들에게 빌려 사용했다.
선배에게 물려받은 낡은 운동복과 품에 맞지 않는 너덜거리는 교복을 교체 못 했다.
가끔 엄마가 슬쩍 돈을 찔러주지 않았다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이다.
“너도 그랬냐?”
“네~, 저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다만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머리통 깨지고 회귀한 덕분에 이런 삶도 살 수 있었다.
누리고 있는 지금의 부유함도 마찬가지다.
“그래. 네 말을 들으니까 힘 난다.”
“내년에는 동차 합격하셔야죠?”
“그게……. 쉽지가 않다. 과외도 해야 하고…….”
과외 일까지 하면서 사법고시 패스 하기는 쉽지 않다.
집안이 어려운 한국대 생들은 대부분 과외를 한다.
고액 과외지만 그것 또한 에너지를 잡아먹는 일이다.
스르르릇.
차가 법대 주차장에 멈췄다.
앞으로 미래를 위해서는 믿을 만한 조력자들이 많이 필요했다.
특히 한국대 법학과는 핵심이었다.
내가 믿고 함께할 수 있는 동지를 이곳에서 만들고 싶었다.
한국대 법대생이라고 다 열쇠고리에 영혼을 파는 속물들만 있는 건 아니다.
조 변호사님도 그중 한 명이다.
돈보다 과감하게 사랑을 택했던 분이다.
“선배 이 말 아세요?”
운을 띄웠다.
“뭐?”
“운이 좋은 사람은 일찍 사기도 당하고 패배의 쓴맛을 보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전 엄청나게 운이 좋은 놈입니다.”
“그래서 나도 운이 좋다고?”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더 단단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노력합니다.”
“군대도 안 갔다 온 놈이 뭐래? 장태산. 군대 가면 완전 뺑이 친다. 여기는 천국이야~ 천국.”
군대도 갔다 왔고 사회의 쓴맛 다 봤다.
죽어보기까지 한 내 앞에서 선배가 문자를 쓴다.
나만 알고 있는 회귀의 비밀이 이럴 때마다 아쉽다.
확 까서 말해주고 증명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내가 결혼해도 미래의 와이프에게도 말할 수 없다.
“선배. 투자 한번 받아 보시겠습니까?”
“투자? 네가 나 도와줄 거냐? 됐다. 나도 운이 좋아 이 시절 고생한다고 생각하련다.”
후배에게 도움받는 선배는 되기 싫은 것 같았다.
나 같아도 그럴 것 같다.
한국대 법대생이라는 자존감은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눈앞에 열매가 달콤하면 흔들릴 것이다.
“내년……. 동차 합격 시켜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수석급으로.”
“뭐, 뭐라고? 동차 수석???”
놀라며 나를 보는 유학필 선배.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씨이익 웃었다.
거미줄에 걸린 황금 나비.
유학필 선배는 이제…….
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