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
회귀의 전설
237장. 떠난 여인과 돌아온 여인들
“이거 생각보다 세게 나오는데?”
“위원장님, 이 새끼들 뭘 믿고 이렇게 까부는 겁니까?”
“뭐긴 뭐야. 기선 제압하겠다는 생각이지. 외국놈들 돈으로 수혈받아 자본이 빵빵하잖아. 그러니까 한번 해보자는 의미야.”
“불리한 거 아닙니까?”
“불리라……. 훗. 우리가 언제 유리한 적 있었어? 자본가 새끼들 집요한 거 알잖아.”
대한노총 화학 섬유연맹 정책위원장 강주희는 서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안아 케미칼, 아니 이제는 TS 케미칼을 이용해 재미를 볼 생각이다.
중국 수출로 화학 쪽 사업이 흥했다.
미국 쪽 금융위기가 덮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지만 강주희는 관심 없었다.
오로지 자본가들을 더 벗겨먹는 데 혈안이 됐다.
상생과 공존이라는 허울을 믿지 않았다.
사법고시 면접에서 좌절한 뒤로 강주희는 완벽하게 반체제 인사가 됐다.
학력을 속이고 공장에 취직한 이후 당했던 서러움과 차별이 뼛속에 박혔다.
임금체불과 착취뿐만 아니라 성추행도 일상이었던 공장.
강주희는 그곳에서 인간의 탈을 쓴 수많은 악마들을 봤다.
재벌과 자본가들은 이후 모조리 적으로 인식됐다.
사회가 많이 변했지만 만족스러운 수준이 못됐다.
마음 같아서는 자본가들을 쫒아내고 사업장을 운영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주희는 잘 알았다.
사업가와 근로자는 애초부터 경영능력에 차이가 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자본가들의 열매를 쪽쪽 빨아 마시는 방법을 추구했다.
뛰어난 머리와 인맥으로 목표가 된 사업장을 집중적으로 파악했다.
대부분 횡령과 배임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노조로 하여금 파업을 유도하고 뒤로는 사업가를 협박하는 투 트랙 전략을 구사했다.
떨어지는 콩고물이 상당했다.
조직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았고 뒤로는 두툼한 위로금과 격려금을 받았다.
강주희는 돈을 많이 모아야 했다.
언제까지 노총에 머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권력과 명예욕이 남달랐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싶었다.
그날이 멀지 않았다.
민중애국당 지도부에 뿌린 돈이 슬슬 효과를 냈다.
케미칼 사태를 마무리하게 되면 정당으로 옮겨가는 게 약조됐다.
그곳에서 명성을 쌓으면 다음 대 총선에서 비례대표가 될 것은 확실했다.
‘대웅 하관우는 약한데……. 뒤에 누가 있어…….’
강주희는 오정을 비롯해 연대, 대상, 미루 같은 대기업들 회장과 사장들에 대한 평가를 끝내 놨다.
대웅 시절 마음 약했던 하관우가 사장실 점거 노조원들에 대해 손해배상 및 해고를 통보했다.
한양동 노조지회장에게서 수시로 전화가 왔다.
노조원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보고다.
살살 어르고 힘내라고 격려했지만 한계가 보였다.
원래 강성 노조가 아니었기에 파업의 묘미를 몰랐다.
파업이 끝나면 성과급 파티를 벌이고 휴가 및 고소 취하로 모든 게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번 TS 사태는 달랐다.
“위원장님, 여론도 안 좋습니다. 협약 조건이 노출되고 공장 가동이 멈췄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언론들도 장난 아닙니다.”
정책위원 보좌관이 인터넷을 보며 여론을 알려왔다.
“그깟 선동당하는 민중들은 믿지 말아요. 어차피 타결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질 겁니다.”
강주희는 대중들도 믿지 않았다.
충분히 조종 가능한 피세뇌자 정도로 취급했다.
“장태산 이자는 누구죠?”
“안아 그룹 인수 시 한국 투자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분도 얼마 되지 않는 전형적인 브로커 같습니다.”
“그래요?”
케미칼 사태가 심각해지자 조직을 통해 심층 자료를 확보한 강주희.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LOR 투자전문 회사 대표 장태산이라는 이름이 뇌리에 박혔다.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한국대 법학과 재학 중이라는 정보만 달랑 있었다.
‘뭐야? 이거? 하관우 회장이 있던 건물과 같은 주소잖아!’
천천히 정보를 꿰맞추던 강주희는 월척을 물었다.
느낌이 강하게 왔다.
몇 번의 수배 동안에도 이 감 때문에 잡히지 않고 오늘까지 살아남았다.
경찰에 잡혔다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됐을 것이다.
강주희는 핸드폰을 들었다.
이럴 때는 빠르게 확인하는 방법이 최고다.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상대편 전화기의 신호가 길게 울렸다.
- 여보세요.
깐깐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저 주희요.”
- 주희? 하하.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요~ 이제 가을이 되려나 갑자기 푸른 하늘 보는데 선배님이 떠올라서요~.”
애교를 잔뜩 부리는 목소리와 달리 강주희 눈빛은 냉정했다.
- 그래. 나도 주희 목소리 들으니까 갑자기 보고 싶네.
“그래요? 그럼 내일 한번 보실래요? 선배님이 사주는 김치찌개에 소주 한잔 마시고 싶어요. 옛날처럼…….”
- 그, 그럴까?
“네!”
- 그럼. 내일 어디서 볼까?
“학교 앞 인동초에서 6시에 봐요. 아직 영업하고 있어요.”
- 그래. 그럼 내일 6시에 보도록 하지.
강주희 애교에 상대편은 기쁨의 목소리를 냈다.
과거부터 뭇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강주희는 50이 넘어서도 주가가 높았다.
이루지 못한 짝사랑은 본래부터 뻥튀기로 가치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선배님, 저 물어볼 게 있어요.”
- 뭐? 무슨 일 있어? 도와줘?
과거에도 그에게 도움을 몇 차례 받았던 강주희였다.
“그게 아니라 학생 중에 혹시 장태산이라고 아세요?”
조심스럽게 장태산 이름을 꺼내는 강주희.
- 장태산? 그 녀석을 알아?
“네~ 일 처리하다 보니까 후배 이름이 보여서요.”
- 대단한 녀석이야. 요 근래……. 아니 법대 역사상 가장 물건이 될 놈이지.
“그, 그 정도예요?”
- 아마도. 나 말고 다른 교수들도 그렇게 평가하고 있어.
‘뭐하는 녀석이야? 1학년이 그 정도로 두각을?’
한국대 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선배의 답변에 강주희는 적잖이 당황했다.
생각보다 더 위험한 인물일 수 있었다.
“선배님~ 내일 학교 얘기 해주세요.”
- 그래~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봐.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장태산……. 장태산.”
장태산의 이름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강주희.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장태산이라는 이름으로 가득 찼다.
***
“도대체 맥주를 몇 캔이나 마신 거야?”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커피를 타며 고개를 저었다.
법과 도덕이라는 양심에서 괴로워하는 국회의원에게 맥주 한잔 마시자고 했다가 판이 커졌다.
돗자리 사서 판을 깔았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언제나 쉬운 법이다.
시원한 강바람을 안주 삼아 마시는 캔맥주는 환상이었다.
둘이서 무려 40캔을 마셨다.
오징어 다리 씹으며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눴다.
그는 장주고 출신 선배이자 한국대 동문이었다.
선후배 호칭이 자연스럽게 붙었다.
그렇다고 양우석 의원이 나를 편하게 대하지는 못했다.
내가 쉽게 대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양우석 의원과는 동질감이 많았다.
나라와 민족 걱정이 뼈에 새겨진 양반이었다.
작금에 닥친 금융위기와 부패한 정권이 가져 올 미래 먹거리 상실에 대한 걱정이 컸다.
미래를 알고 왔으니 나는 버틸 만했지만 깨어 있는 인물들은 견디기 힘든 시기다.
후손들을 위한 기회비용을 오대강과 자원외교라 포장해 사기질로 날려 먹었다.
시작하자마자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정부다.
국가 조직을 이용해 불법댓글을 조작하는 악질 범죄자들이 판을 친다.
그렇게 무거운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유쾌한 고등학교 시절 사건 얘기까지 나왔다.
학연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동질감이 생각보다 강하게 일었다.
“확실히 밀어드리겠습니다. 선배.”
합법적인 지원과 어둠 속의 도움을 함께 밀어줄 생각이다.
조윤태 변호사님이 큰일하는 데 힘이 되는 조력자가 될 것 같았다.
하나하나 바둑판 위에 돌이 놓이고 있었다.
꼴통 극우익과 친일파들에 대한 정보 또한 수집하고 있다.
그들이 벌이는 부패와 탐욕을 낱낱이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한 방에 싹 쓸어버릴 생각이다.
분리수거도 안 되는 쓰레기들이다.
악성 종양 같았다.
불리할 때는 정치적 다양성을 주장하며 숨었다가 유리해지면 지역감정을 이용해 분란을 일으켰다.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있는 5프로쯤 되는 한민족 불량품들이다.
놈들이 사라져야 대한민국은 온전히 하나가 될 터였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잘 숨어 잘 먹고 잘 살아온 친일파들과 기회주의자들을 선별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뼈저린 고통을 선물 하고 싶었다.
꿈속 할배가 그것까지는 원하지 않아도 반드시 그렇게 하고 싶다.
프랑스와 독일이 유럽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배경도 나치와 부역자들에 대한 청소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신을 오염시키는 썩은 종자들을 제거하지 못한 대가가 악성 종양으로 남은 것이다.
다시 얻은 생인 만큼 악성 종양 제거 수술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2학기도 심심하지는 않겠네.”
이제 며칠 후면 개학이다.
개강 준비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역시 법학과 과목은 단 한 과목도 신청하지 않았다.
독학사 과정으로 18학점을 이수했다.
바쁜 와중에도 미래를 위한 계획은 착착 진행 중이었다.
“경영학과 수업이라……. 교수님들 수준 한 번 볼까.”
법학과보다 경영학과 교수님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들이 배출한 인재들이 대한민국 경제계 기둥이 된다.
“알고리즘 분야도 확실히 마스터를 해놔야겠지.”
1학기 총점은 4.5 만점을 찍었다.
미술과 음악, 공대 수업 모두 A+를 맞았다.
부모님이 성적표를 받고 흐뭇해 하셨다.
물론 임윤아로 인해 그 행복함은……. 불신이 됐다.
띠링.
문자가 왔다.
[나 한국 떠나. 가기 전에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그럼 못 갈까봐 그냥 가. 없는 동안에 해피하게 청춘 즐겨. 나 마음 넓은 여자인 거 알지?]
“헐…….”
마음 넓다는 저 말이 더 무섭다.
임윤아의 누드 그림은 장주시 집 안방에 걸렸다.
영역표시 하나는 끝장났다.
[미국에 오면 연락해. 바빠도 시간 내볼게.]
임윤아도 여자다.
문자에서 보이는 튕김은 귀여웠다.
“조만간 미국 한 번 가봐야겠네.”
세계 곳곳에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글로벌을 넘어 이계까지 확장되는 마당에 한국에서 썩고 있을 필요 없었다.
시간나면 칠레에 가서 순례자의 길도 걸어보고 싶었다.
[보고 싶을 거야.]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이 몹쓸 병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
[……나도.]
보고 싶다는 말을 기다렸던 것 같다.
임윤아의 그리움이 담긴 메시지가 시간을 두고 도착했다.
영혼이 많이 건강해졌지만 아직도 여린 그녀다.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잖아.]
[피~! 피핏!]
여러 의미를 내포한 문자에 임윤아는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통화를 해도 될 텐데 그녀는 문자를 택했다.
차라리 문자가 편했다.
막상 그녀 목소리를 듣고 나도 흔들릴 것이다.
[무슨 일 있음 말해. 아빠가 도와 줄 거야.]
[애도 아니고 됐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완전 잘났어! 뿡뿡!]
임성철 회장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그건 거래다.
중국의 꽌시 같은 문화가 우리에게 분명 존재했다.
사업가에게 친구 관계를 바라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철저하게 이득이 되는 관계만이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나 학교 시간 끝나면 오후에는 대부분 집에 있어.]
[오케이!]
자신의 동선까지 보고하는 임윤아다.
아직 이모티콘이 활성화되지 않은 문자 대화는 구식이지만 나름 신선했다.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문자가 끝났다.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통화권을 벗어난 것 같다.
“힘내. 임윤아……. 한 번뿐인 인생이다. 치열하게 살다 가자.”
귀여운 임윤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피어났다.
스르르르릇.
그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대표님!!!”
타다닷 소리와 함께 정신없이 품에 달려드는 날렵한 여인.
와락 품에 안겼다.
“도희…….”
“히잉! 대표님 보고 싶었어요!”
미국 출장을 마치고 도착한 도도희가 허락도 없어 안겼다.
“와아……. 선수쳤어!”
뒤따라 들어오던 유세라 팀장.
품에 안긴 도도희를 보며 쌍심지를 켰다.
지끈 이마가 아파왔다.
하나가 떠나자 둘이 돌아왔다.
회귀 뒤 사주도 아주 거하게 바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