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
회귀의 전설
231장. 벗어라
“장주시? 거기 뭐가 있는데?”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오정모직 전무실.
피곤한 얼굴로 겨울 패션 경향을 점검하던 임아현은 그룹 비서실 직원의 전화에 집중했다.
갑자기 막내 동생 윤아가 한국에 들어왔다.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임성철 회장의 지시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보고됐다.
그리고 저녁 이 시간이 돼서야 정보가 풀렸다.
- 선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 윤아가?”
- 그렇습니다. 회장님 비서실에서 흘러나온 정보입니다.
“거기 누가 있는데? 상대가 누구야?
선이라는 말에 임아현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로얄 패밀리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조건이 까다로웠다.
자신처럼 동서일보 정도 되는 가문과 결혼해야 격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니인 임아진은 그런 점에서 실격이다.
남편도 평범한 대학교를 나온 오정 그룹의 경호원이었다.
봉사활동 다니다 눈 맞아 집에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허락한 것이다.
임성철 회장이 큰딸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에 반해 임아현은 욕심이 많았다.
하지만 자식들 중에 가장 학벌이 달렸다.
그 점에 어린 시절부터 불만이 많았다.
큰 오빠는 집안의 장남이라고 귀히 대접받았다.
언니는 큰딸이라고 아빠의 사랑을 듬뿍 얻었다.
막내는 막내라고 부모님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그에 반해 자신은 언제나 사랑과 관심으로부터 먼 사람이었다.
공부에 별 흥미가 없었던 임아현은 미술 실력을 발판으로 파슨스 스쿨에 유학을 갔다.
그룹 경영에 욕심을 내지 않던 시절이라 미래를 대비하지 못했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다 어느 날 자신의 선택이 잘 못 됐다는 걸 알았다.
후회는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특히 재벌 상속에 있어서는 뼈아픈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남편으로 동서일보 차남을 선택했다.
남편은 MBA 출신이라 머리도 똑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패기가 부족했다. 형이 동서일보 사장 후보가 되었지만 그 자리를 욕심 내지 않았다.
임성철 회장도 사위에게 이것저것 몇 개 맡겨 놓고 지켜보더니 스포츠 담당을 맡기는 쪽으로 마음을 정한 것 같다.
임아현은 내심 열불이 났다.
남편이 보기보다 심성이 착해 참고 살았다.
순둥이 성격 말고는 다른 점은 100점 만점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아들을 낳고부터 임아현은 욕심이 더 생겼다.
아버지 형제들처럼 사업체 하나씩 받고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임아현은 오정을 목표물로 삼았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오정이라는 이름을 물려주고 싶었다.
- 장태산이라고 투자회사 대표입니다.
“장태산……. 설마 그 장태산? 얼마 전에 아빠와 술 마셨다는?”
- 맞습니다. 로버트 라이언과 동행해서 회장님과 비서실장님과 자리를 가졌습니다.
‘아빠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기에 선이야?’
임아현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임성철 회장이 막내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안다.
아직 나이가 어린 동생을 어린놈에게 시집보내려는 속셈을 짐작도 못했다.
“나이가 어리지 않나?”
- 한국대 법학과 재학 중이고 올해 나이가……. 스무 살입니다.
“스무 살……. 스무살이라…….”
나이가 어려도 너무 어렸다.
동생은 가족들 중에 가장 순둥이지만 그래도 임씨 집안의 핏줄이었다.
고집을 부리면 임윤아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기를 많이 죽이곤 했다.
“장태산 정보 찾아서 메일에 올려봐.”
- 조치하겠습니다.
“그래서 윤아는 뭐해? 서울에 올라 왔어?”
야심한 시각이다.
만나서 이것저것 물어볼 게 많았다.
- 그게……. 아직 장주시에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 뭐하는데?”
-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장태산이라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어디에?”
- 남자 집입니다.
“비밀 경호팀 안 따라갔어?”
- 다른 경호 업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비서실에서……. 절대 나서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
임아현은 정말 놀랬다.
아버지 임성철 회장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한 사건이다.
임아진이 경호원과 눈이 맞은 이후로 비밀 경호팀을 가동하게 된 것도 그 이유였다.
“이, 일단 보고가 들어오면 바로 연락해. 문자라도 상관없어.”
-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아빠……. 도대체 스무 살이나 어린놈에게서 뭘 보셨어요? 막내딸을 던져 줄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놈인가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아 혼자 질문하는 임아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야밤에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
지금 뭐라는 거야?
전부를 그려달라고?
설마 그거……. 누드…… 뭐 그런 거 아니지?
정말 놀라서 임윤아를 다시 봤다.
그녀는 큰 결심을 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누드화가 맞는 것 같다.
아니 언제 봤다고 생판 모르는 남자 앞에서 누드화를 그려 달라는 거야!
도대체 왜 임성철 회장님은 이런 폭탄을 나한테 떠넘기려 하는 거야!
그냥 야경 한 폭 근사하게 그려줄 생각이었다.
원한다면 배경에 초상화 살짝 넣어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상상 밖의 일이 터졌다.
“…….”
방향이 한참 잘못 흘러갔다.
침묵이 흘렀다.
“왜 자신 없어?”
도발하는 임윤아.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농담은 확실히 아니다.
그렇다고 미친 것 같지도 않았다.
말을 하면서도 임윤아 역시 살짝 떨었다.
막 나가는 인생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렇다면…….
“왜 죽기 전에 초상화로 쓰려고?”
“!!!”
임윤아가 나의 말에 눈이 동그랗게 떴다.
과거를 되짚어보면 이제 얼마 후 그녀는 자살을 한다.
그녀의 운명이 한 번 턴해 여기서 나와 만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임성철 회장과의 인연도 뭔가 특별한 것 같았다.
“무, 무슨 헛소리야!”
임윤아가 처음으로 고음을 질렀다.
방음이 잘 된 아파트였다.
여동생들은 다행히 시골집에 있었다.
에어컨이 가동 되고 있어 창문도 다 잘 닫혀있다.
그녀의 고함이 아무리 커도 밖으로 새나갈 일은 없었다.
“얼굴이 그렇게 말하는데? 나 세상 그만 살고 싶다. 뭐 이런 거.”
말을 깠다.
클라라부터 시작해 주변에 누나들이 많았다.
임윤아 나이 정도는 대적 상대가 아니다.
“어떻게 그려줄까? 예쁘게 아니면 우울하게? 머리에 꽃도 장식해 줄까?”
이죽거리며 임윤아를 자극했다.
파르르 주먹을 움켜쥔 임윤아가 몸을 떨었다.
자신의 속마음을 들켰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 같다.
내가 미래를 살지 않았다면 그녀의 심리 상태나 운명을 몰랐을 것이다.
자살은 충동적이지만 그 예상 징후는 나타나는 법이다.
하루아침에 죽자고 해서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많은 생각과 방법을 연구하다 스스로 선택해 가는 거다.
“좋았어! 이번 테마는 ‘귀여운 여인의 마지막 미소’ 라고 정하지. 아주 근사한 제목이지 않아?”
내 안에 사이코가 사는 것 같다.
자살이 예정된 여인 앞에서 활달하게 이죽거렸다.
미친놈은 나였다.
“밤도 오늘따라 독하네. 색감이 아주 진하게 나올 것 같아. 불은 꺼야 할 것 같아. 그래야……. 죽음이 근사하지.”
무심히 걸어가 거실 불을 껐다.
서두르는 것 같지만 임윤아에게 편안함을 주기 위한 배려였다.
부끄러운 치부를 들켜버린 여인에게 어둠보다 좋은 위로는 없었다.
심리학을 따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신들의 지식이 그렇게 말했다.
또로로록.
불이 꺼지자 어둠이 진하게 집안을 채웠다.
그사이 임윤아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키가 크지 않고 아담한 그녀의 울음은 소녀의 슬픔 같았다.
스물다섯의 나이지만 세상에 나오기에는 아직 덜 성숙한 여인이다.
평범한 인생이었다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쓴 소주 같은 세상맛을 스스로 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축복과 고통은 임윤아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독하게 나갔다.
내가 아니면, 그리고 오늘이 아니면 임윤아의 깊은 상처를 치유할 기회가 없었다.
의사는 아니지만 한 번쯤 속마음을 꺼내 울리고 싶었다.
우는 것만큼 인간에게 가장 큰 감정 치료제는 없었다.
한바탕 울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녀를 더 울릴 수도 있었다.
오늘만큼은 나도 악마가 될 수 있었다.
“왜 울어? 바보야? 언니 오빠가 야속해? 그것도 아니면 아빠 엄마의 생활이 마음에 안 들어? 세상사는 게 버겁지? 아주 배부른 소리라는 거 모르지? 지금 네 나이라면 상사들 앞에서 탬버린 치고 노래 불러야 돼. 아마 오정에서도 회식 때 그럴 걸? 그런데 죽고 싶다고? 다른 사람들이 널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독설은 밤새 끝나지 않을 기세로 시작되었다.
아주 작심하고 뱉어졌다.
“배가 불러서 세상 고마운 줄 모르는 얼간이라고 해. 삶이 근사하다는 걸 모르지? 이제 귀에 박혀 들으면 식상하기 그지없는 명언 들어볼래? 오늘은 말이야……. 어제 죽었던 이들이 그렇게 살고 싶었던 미래야. 그런데 그걸 스스로 버려? 싸워보지도 않고 어디서 자살골이야!!!”
감정이 격해졌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랐다.
누군가 영혼에 침입해 맹렬하게 조장하는 것 같았다.
“살아서 바꿔야지! 그깟 욕심쟁이 언니 독설 하나 견디지 못 하나? 다른 집도 상속 때문에 칼부림 나는 게 요즘 세상이야! 부모님이 완벽한 도덕군자이기를 바랐어? 그럼 오정이 아니라 다른 집에서 태어났어야지! 네가 쌓은 업으로 네가 택한 일이다! 그런데 버겁다고 도망치려고? 넌 죽어도 죽지 못하는 길을 알아?”
죽어봤기에 난 안다.
짧은 순간 일었던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은 아직도 가슴에 생생하게 그대로 있다.
자살은 아니었지만 괴로움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보험금으로 위로하고자 했던 못난 아들의 효심을 임윤아는 짐작도 못했다.
“살아서 강해져! 그리고 할 말 하고 싶으면 뱉어! 설마 부모님이 널 팽개치겠어? 언니도 그래봤자 너와 똑같은 지분권자야. 오빠에게 붙어서 그냥 밟아버려! 부모는 못해도 형제는 가능해!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이야!”
“네, 네가 뭘 알아! 네까짓 게 뭘 알아아아아아!!!”
집이 떠나가라 임윤아가 소리쳤다.
절규였다.
가슴 깊이 곪아 있던 고름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당연히 모르지. 난 네 가족이 아니라……. 타인이잖아. 그래서 막말해도 돼. 어차피 오정 따위 난 두렵지도 않거든~.”
가볍게 내뱉은 말이지만 진심이다.
임윤아를 오늘 처음 만났지만 그녀의 영혼이 맑고 아름답다는 걸 알았다.
내 친구들과 서슴없이 소주잔을 기울이던 임윤아는 오정 그룹과 어울리지 않는 별종 같았다.
갑질 전문 재벌집 자식 같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흑흑……. 흑…….”
임윤아가 이제는 대놓고 통곡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거실 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나쁜 놈 아닌데 오늘 여자 맘도 모르고 매정하게 울리는 쓰레기가 됐다.
그래도 좋았다.
임윤아 뿌리가 튼튼해져 이 순간을 넘기고 생을 붙들 수 있으면 만족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더 독한 말도 약으로 줄 수 있었다.
죽어보니 살아서 겪는 삶보다 소중한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눈물을 쏟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그러나 손을 뻗어 안아주지 않았다.
지금은 홀로 견뎌야 할 예방 주사 투여 시간이었다.
내가 뱉은 말로 자살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본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내가 임윤아에게 바라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그려주마…….”
응? 이, 이건 또 뭐야?
갑자기 내가 원하지 않는 말이 입에서 튀어 나왔다.
뜨거운 기운이 정수리에 가득했다.
두 눈과 귀가 당겨져 뒷통수로 잡아당겨지는 느낌이다.
뭐랄까.
신 내림 증상 같은 그런 기분.
도대체 누구냐고!!!
“벗어라.”
벗어! 뭘!
목소리에 카리스마가 쩔었다.
“그리하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뭐야! 이 사이비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