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0화 (230/1,284)

 # 230

회귀의 전설

230장. 날 그려줘!

“뭡니까?”

“뭐가…… 말이에요?”

이 여자 끝까지 말을 반절만 놓았다.

그 뚝심이 존경스러웠다.

“오늘 왜 오셨습니까?”

“아빠가 선보고 오라고 해서……. 왔어요.”

배시시 웃는다.

술이 얼굴까지 차올랐다.

정말 3차까지 달렸다.

임성철 회장을 닮아서인지 말술이었다.

2차 호프집, 3차 노래방에서 맥주 캔을 땄다.

“소주는 마셔봤습니까?”

“오늘 마셨잖아요~ 와아. 진짜 써요. 그런데 달다~. 킥.”

“말을 놓든가 올리든가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럴까? 흐흐흐.”

편의점에서 구입한 시원한 캔커피를 마시며 임윤아가 웃었다.

“지금 미국은 학기 중 아닙니까?”

“내 말이~ 지금 학기 중인데 아빠가 전용기를 보내왔잖아. 당장 선 보고 들어가라고 말이야.”

“회장님이요?”

“화가 났어. 도대체 얼마나 괜찮은 남자이기에 오정 그룹 회장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막내딸이 몸소 행차해서 만나야 하는 건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하고 말이야.”

말을 하면서 임윤아가 날 빤히 본다.

정말 손희진을 보는 것 같았다.

살짝 끝이 휘어진 눈웃음이 매력적이다.

장난기도 좀 있지만 검은 눈동자가 총총하게 살아 움직였다.

“임 회장님이…… 짓궂으십니다.”

“그러게 말이야. 이런 풋풋한 영계를 늙다리 딸에게 넘기다니~ 사업가라 양심이 좀 없으셔.”

아버지를 디스 할 줄도 아는 임윤아다.

“그렇죠. 양심이 좀 많이 부족한 분입니다.”

“와아! 장태산 군. 도대체 정체가 뭐야? 돈 좀 벌었다고 소문은 났지만 뭐가 그렇게 잘났어? 우리 아빠에게 그런 말 하면 큰일 나는 거 몰라?”

“모르세요? 제가 오정 투자자입니다. 저에게 잘 보이셔야 합니다.”

“뭔 상관이야~ 난 그깟 오정 그룹에 전혀 관심 없어.”

예상했던 바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임윤아 관상에는 전혀 사업가 기질이 보이지 않았다.

강한 척, 쿨한 척했지만 나에게는 보였다.

임윤아는 지금 몹시 지쳐있었다.

온실 속에서 곱게 키웠던 화초가 갑자기 세상과 접촉한 것 같았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시기다.

조금만 누가 자극하면 바로 복잡한 세상을 떠나는 데 미련 없을 것 같았다.

인중이 엷었다.

삶에 대한 애착이 없다는 소리다.

안상(安詳)이 부족했다.

보통 사람들이 품고 있는 유연하고 편안한 상태의 기본 관상이 약했다.

누군가 옆에서 도와줘야 이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

임성철 회장님이 세계적 경영자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자식 경영에는 서툰 것 같다.

이건 안주인 덕이 부족한 것이다.

출가한 자식의 성혼과 미성년자 자식의 운명은 집안의 대주보다 안주인의 운명이 좌우한다.

덕을 쌓으면 그대로 물려받지만 반대라면 화목하지 못했다.

임윤아는 후자다.

인터넷으로 찾아 본 오정 그룹 사모님의 관상은 그렇게 덕이 넘치는 상이 아니다.

“전 관심 많습니다~.”

“진짜? 아빠 말은 다르던데?”

“다 계략이죠. 관심 없는 척해야 큰 걸로 시험하지 않겠습니까. 윤아 누나처럼 말입니다.”

“뭐야! 아빠가 속은 거야?”

“친구들 말 못 들으셨습니까? 저 바람둥이에 욕심도 많습니다. 오정 그룹 정도라면 그냥 땡큐죠~.”

속물근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척 연기를 했다.

임윤아가 날 지그시 봤다.

바람둥이처럼 달달하게 폼을 잡았다.

“됐어……. 눈빛이 달라.”

“오! 그런 것도 압니까?”

“욕심 많은 언니들과 정반대 눈빛이야. 내가 바본 줄 알아? 나 유학파야~.”

언니라는 말을 꺼낼 때 임윤아 눈동자가 떨렸다.

스트레스 원인 중 하나가 밝혀진 셈이다.

오정 그룹 사남매는 대한민국의 자타공인 재벌 연예인들이다.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적 이슈를 몰고 왔다.

그중에서 집안 셋째이자 둘째 딸인 임아현은 욕심이 많기로 유명했다.

2020년에도 유일한 그룹 후계자인 임준형의 보이지 않는 경쟁자였다.

관상으로 봐도 아주 기가 셌다.

남자였다면 임성철 회장이 그룹을 물려줬을 정도다.

그렇기에 충돌이 많았다.

첫째 딸인 임아진도 고집이 셌지만 그에 반해 삶은 다른 남매들에 비해 좀 더 서민적인 편에 속했다.

사랑에 모든 것을 버릴 줄 알았던 임아진은 그룹 경호원 출신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눈앞의 임윤아는 가장 여렸다.

“유학파 안 부러운 한국대 법학파입니다. 저 재주도 많습니다. 특히 그림 실력은 죽여주죠~.”

“오올! 자신감 쩌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보여드리겠습니다.”

“당장 보여줘! 나 보고 싶어!”

“지금 말입니까?”

말괄량이 아가씨가 그림 얘기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내 기억 한 자락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오정가의 막내딸이 미술사 전공이었다고 말이다.

임성철 회장도 말했다.

자기 막내딸이 그림을 좋아한다고.

“왜 안 돼?”

“집에 안 가십니까? 너무 늦었습니다.”

밤 11시가 훌쩍 넘었다.

주변에 오정 가에서 보낸 경호원들이 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어. 걱정 마. 친구 만난다 말하고 여기 온 거야.”

“어떻게 찾았습니까?”

“비서실 직원이 알려줬어. 장주시가 그렇게 넓지 않더라~. 장태산 당신 워낙 인물이 잘나서 찾기 쉬웠어.”

“…….”

거침없이 말하는 임윤아는 반짝거렸다.

주인을 만난 강아지가 재롱을 피우는 것 같았다.

재벌집 딸이 그렇게 좋은 자리는 아니다.

평생 돈이나 물질은 원 없이 쓰겠지만 마음대로 바깥에 나가지 못한다.

임성철 회장이 워낙 막내딸을 귀히 여겨 언론도 통제했다.

그래서 내 친구들도 임윤아를 못 알아본 것이다.

임윤아가 112에 전화라도 한다면…… 특수기동대가 출동할지도 몰랐다.

“집에 가십시오. 서울에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빠른 시간 안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돼. 나 선 보러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그것도 못해줘?”

“…….”

임윤아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처음 보는 유형의 여성 캐릭터다.

막둥이로 자란 티가 확 났다.

야밤에 그림 그리게 생겼다.

“피곤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빨리 그려줘. 실력 보고 싶단 말이야. 학교를 뒤집어 놨다고 하던데~ 그 실력 진짜지?”

대충 나에 대해 파악하고 왔다.

그러니까 저렇게 조르는 거다.

“고흐 님이 저 보고 짱이라고 했습니다.”

“풋~ 뭐라고? 고흐가 짱?”

진짜인데 안 믿는다.

같이 벽화를 그릴 때 일취월장하는 실력을 보고 고흐가 이를 드러내 웃으며 짱이라고 말했다.

“가시죠.”

“좋아!”

친구들도 사라진 여름 거리는 한산했다.

장주시는 유흥의 도시가 아니었다.

그녀와 걸어서 아파트에 도착했다.

“안 무서워요?”

“뭐가?”

“저 남자입니다. 그리고 누나는 매력적입니다.”

“아빠 소원 들어주게 됐네. 효도하는 셈치고 시집가지 뭐~. 넌 계열사 하나 받아. 우리 그거 언니와 오빠에게 팔아서 잘 먹고 잘 살자.”

“…….”

구체적 농담에 내가 할 말이 없어졌다.

오정 그룹 핏줄이라는 걸 잠시 잊었다.

갑자기 나타나 친구들 혼을 탈탈 털어버린 매혹의 마녀다.

요즘 들어 적극적인 여성들이 주변에 많아졌다.

프랑스 고양이도 아닌데 임윤아 역시 무서운 게 없다.

티디디딕틱.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아아!”

안으로 들어서다 거실 창밖 아래로 보이는 도도한 장주강과 도시를 바라보며 탄성을 터트리는 임윤아.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

‘정말 시원해…….’

임윤아는 거실창으로 다가가 밖을 바라봤다.

서울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가로등불이 밝혀져 있는 장주강의 도도한 흐름이 좋았다.

며칠 전 내린 폭우로 강물은 풍성했다.

평지의 시내와 멀리 보이는 산자락이 한 폭의 야경도(夜景圖) 같았다.

두근두근.

시원함 속에서도 임윤아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갑작스럽게 방문한 남자 집이다.

평소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던 경호원도 없었다.

아빠의 성화로 스무 살짜리 남자와 선을 보게 됐다.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궁금해 그룹 정보 자료를 훑어봤다.

한국대 법학과 재학 중인 공부 잘하는 수재로 투자에 천재적이었다.

아빠와 술을 마실 정도로 미래가 기대됐다.

얼굴도 준수했다.

여자 문제가 몇몇 보였지만 문제 되지 않았다.

어차피 임윤아는 평생 독신으로 살 생각이었다.

그러다 발견한 장태산의 그림과 음악 실력.

국가정보원 뺨치는 오정 그룹 정보실은 장태산의 학교생활까지 파악해 놨다.

컬러로 출력된 사진 몇 점에…….

임윤아는 전율을 맛봤다.

정말 대단한 화풍이었다.

수없이 많은 고흐의 모작 중에서도 탑 클래스였다.

그림에 담겨 있는 혼과 열정은 고흐의 재림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흥미가 동했다.

미술사를 전공하는 임윤아에게 최적의 상대였다.

아빠는 다시 만나기 힘든 천재라고 붙잡으라고 했다.

오정 그룹 회장은 그런 말을 쉽게 하지 않았다.

언니들이 손쓰기 전에 임윤아는 장주시로 차를 몰았다.

정보팀에 부탁해 실시간으로 위치를 파악했다.

그리고 무작정 장태산을 만났다.

빨리 만나 그의 재능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다 어울린 유쾌한 술자리에 임윤아는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스무 살 청춘들과 어울렸다.

장태산도 굳이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마시다 보니 스트레스가 싹 풀렸다.

아빠가 몇 년 전 계열사 주식을 분배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형제간에 보이지 않는 반목이 생겼다.

어린 시절부터 있어왔던 거지만 최근처럼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언니와 오빠가 시집 장가를 가더니 더 변했다.

조용히 불러내 주식 함부로 처분하지 말라는 경고를 했다.

임윤아는 그때부터 집이 싫었다.

아버지의 무관심과 바람에 재단과 갤러리 운영에 푹 빠진 엄마도 임윤아에게서 관심을 거뒀다.

허영과 사치, 명예가 엄마의 빈자리를 채웠다.

형제들의 견제가 심해지자 임윤아는 숨이 막혔다.

특히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았던 둘째 언니 임아현.

2세를 낳고 완전 돌변했다.

주식을 더 받고 싶으면 오정 핏줄임을 증명하라고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평생 놀고먹을 정도를 원하면 경영에 관심도 두지 말라고 했다.

자칫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 가족사가 진절머리 나 유학을 떠난 임윤아였다.

그런데 그녀가 낯선 남자와 야심한 밤에 함께 있었다.

유학 중에도 경호원들이 항상 곁에 있어 이런 날이 없었다.

연애도 마음대로 못하고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그림에만 빠져 살았다.

“이젤 준비 됐습니다. 뭘 그려드릴까요?”

방에서 큼지막한 이젤과 유화그림 물감을 들고 나타난 장태산.

임윤아에게 어떤 그림을 그려주길 원하는지 물어왔다.

스스로 바람둥이라 말했지만 눈빛과 행동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임윤아를 보는 눈빛부터가 달랐다.

그녀를 결코 욕심 내지 않았다.

이 상황을 즐겼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순수한 행복감이었다.

임윤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과거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한 가지.

사회적 신분과 여자라는 부끄러움에 참고 있었다.

자칫 알려지는 순간 집안에 엄청난 누가 될 것이다.

그게 갑자기 떠올랐다.

임윤아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난 눈앞의 남자를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날 그려줘…….”

임윤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저 말을 이었다.

“내 전부를…….”

“!!!”

놀라는 남자.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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