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회귀의 전설
219장. 투자의 씨앗
또로로록.
잔에 술이 채워졌다.
드러렁 퓨우우. 드르렁 퓨우우우.
한국 산삼주를 포도주처럼 마시던 로버트가 방바닥에 쓰러져 코를 골았다.
반대편에 장한수 실장도 정신이 반쯤 나간 채 장식용 협탁에 몸을 기댔다.
시중들던 조 여사라는 중년 여인은 조용히 사라졌다.
눈치가 귀신이었다.
이곳을 단골집 삼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요리가 수준급을 넘었다.
“오늘 따라 술이 달콤합니다.”
잔을 잡으며 웃었다.
“그렇지? 나도 오랜만에 술이 받는군.”
임성철 회장은 체격에 비해 술을 잘 마셨다.
로버트와 장한수 실장을 보내고도 여유가 넘쳤다.
물론 나야 끄떡없었다.
도리어 산삼주가 몸을 건강하게 만들었다.
마실 때마다 미약하게 내공이 증진됐다.
“건강하십니다.”
“보기에는 비리비리해도 보약을 많이 먹어 내장은 튼튼하지.”
돈으로 할 수 있는 끝판을 경험했을 대한민국의 진정한 황제다.
권력이야 몇 년이면 끝나지만 대기업은 그렇지 않았다.
오정이 뿌린 돈으로 대한민국 상류층은 많은 혜택을 받았다.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신장의 기가 약해 보입니다.”
“신장? 허어? 무얼 보고 알 수 있나?”
임성철 회장이 감탄했다.
“기를 많이 소모하셨습니다. 허기를 기라 생각지 마시고 몸을 보전하십시오.”
뒷말은 생략하겠다.
늙어가는 권력자들은 항상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것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기 소모가 장난 아닌 것 같다.
“그 나이에 진맥도 할 줄 아나?”
“예전 알던 도사분이 계셨습니다.”
도사가 아니라 포인트를 벌기 위해 지옥에 찾아간 전직 선신 화타다.
화타야말로 진정한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분이다.
“도사? 푸하하. 장 대표 정말 기인이야. 기인.”
“태산이라 편하게 부르십시오.”
“그럴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세상사는 법을 요즘 배워간다.
임성철 회장과 연이 되어 나쁠 게 없었다.
일송회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상인 집안이다.
“오늘 내가 기분이 좋아.”
안 좋으면 그게 이상하지 않겠는가.
로버트가 투자를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한다고 말했다.
오정의 백기사 역할을 맡겠다는 말까지 뱉었다.
오정은 세계적 대기업이지만 경영권의 위협을 수시로 받는다.
그게 싫어 대기업들이 순환출자로 각 기업들을 단단히 묶어 버린다.
오정은 그래도 다른 기업과 달리 순환구조가 간단했다.
문제가 됐던 오정랜드와 오정생명, 오정전자, 오정카드가 순환출자 구조의 핵심이었다.
금산불리 원칙 때문에 계속 골치를 썩었지만 선방하며 버텼다.
그래도 언제나 돈은 필요했다.
“저도 회장님을 뵙게 되어 좋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싫었다면 굳이 안 나왔을 거다.
오정의 입지가 대단하긴 하지만 금융위기에 이곳도 흔들린다.
마음만 먹으면 삼키는 건 일도 아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위기를 어떻게 생각하나?”
뜬금없이 위기 문제를 꺼내는 임성철 회장.
장난으로 던지는 질문이 아닌 것 같다.
예리한 눈빛이 청년처럼 반짝였다.
“어린놈이 뭘 알겠습니까.”
단박에 밑천 까는 짓은 사양이다.
술을 마셨다.
산삼주가 떨어지고 등장한 20년 더덕주도 괜찮았다.
또로로록.
다시 술을 따라주는 임성철 회장.
“이 나이쯤 되면 위기를 몇 번은 겪게 된다네.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일 때는 집 지붕도 날아가는 걸 보기도 했지.”
“자동차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린 친구라 잘도 말하는군. 흐흐. 우리 조직에서 그 말 하면 바로 좌천이야.”
임성철 회장의 아픈 손가락이 바로 자동차였다.
IMF 때 시원하게 말아 먹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반도체에 집중한 덕분에 지금의 오정이 존재할 수 있었다.
어차피 미래 자동차는 내연기관이 아닌 전장산업과 배터리가 주가 된다.
오정은 경쟁력이 충분했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도 회장님이 저에게 충고하셨습니다. 세상을 믿지 말라고 말입니다.”
“운종이 형님 만났어? 그 양반이 애들한테 쓸데없는 말을 했군. 조금만 더 허리를 굽히라고 했건만 고집부리더니……. 쯧쯧.”
대한민국 풍운의 시절을 같이 걸어왔던 경쟁자이자 동지였을 두 사람.
임성철 회장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세상을 훔칠 도적이 못 돼서 아쉽다고 그러셨습니다.”
“세상? 그래 그 세상……. 적당히 팠어야지. 여기저기 막 저지르니까 쫄딱 망하지. 준영이 큰 형님이 경고했었다. 운종이 너 그러다 한 방에 간다고 말이야.”
감춰진 대기업 회장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서로 알 것 다 아는 사이였다.
“준영이 형님이 통이 컸어. 운종이 형님은 대책 없이 포부만 컸고…….”
“회장님은요?”
“나? 난……. 한 놈만 팬다. 자동차로 한 번 말아먹고 선친 유언을 깨달았다. 넌 그릇이 작으니까 하나만 제대로 경영하라고 그랬거든.”
“아! 그러셨군요.”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라. 나도 사람 볼 줄 안다.”
임성철 회장의 말에 빙긋이 웃어줬다.
사람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임 회장도 나가서 돗자리 깔아도 먹고 살 정도로 관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선친이었던 임대영 회장은 관상쟁이를 옆에 끼고 살 정도로 관상을 신봉했다.
“넌 뭘 훔치는 중이냐?”
“…….”
“운종이 형님이 그런 충고까지 해줬다면 중히 여긴다는 소리고……. 재주가 비상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데……. 의중을 모르겠구나. 그래서 묻는다. 뭘 훔치려고 계획 중이냐?”
늙은 생강 같은 매운 맛이 확 느껴졌다.
직시하는 임성철 회장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자칫 잘못 말했다가는 날 잡아 먹을 기세다.
뭐 그래봐야……. 하나도 안 쫄린다.
“오정은 맛없어서 안 잡아먹습니다.”
“뭐라고? 오정이 왜 맛이 없어!”
내 말에 임성철 회장이 화를 내는 척 거칠게 말했다.
말투와 달리 입매는 웃는다.
“남의 집 가업을 뺏는 건 예의가 아니죠.”
“그럼 안아는 왜 그랬어?”
“누가 쓰러져야 끝날 개인적 악연입니다.”
“흐음……. 그래서 거지꼴로 쫓아낸 거야?”
“아버지가 그러셨습니다.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안아는 기업 윤리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정도를 한 참 벗어났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그 말대로 산 건 아니다.
그래서 더 피부에 와 닿았다.
“나한테 노랭이라고 욕하는 거냐?”
“글쎄요~.”
“됐어. 이 녀석아. 내가 첫사랑에 실패만 안 했어도 너 같은 손자가 있다. 고얀 놈~.”
다시 술을 마셨다.
이제는 끝내야 할 타이밍이다.
하늘 위로 휘영청 여름 밤 보름달이 떴다.
대부분 사람들이 잠든 자정이 넘어갔다.
임성철 회장님 오늘 무리했다.
“내놔봐.”
“네”
“핸드폰 번호 주라고.”
“갑자기 그건 왜…….”
“운종이 형님 딸 거기 있지?”
정보를 많이도 캤다.
모르는 척 하더니 감췄던 본심을 이제 드러내는 임 회장이다.
“……네.”
“그럼 공평해야지. 우리 막둥이도 만나 봐.”
“네? 마, 막둥이요?”
“미국에서 공부 중인데 미술을 좋아해. 걔를 좀 꼬셔봐라. 그럼 내가 큰 거 하나 떼 줄게. 아니 필요하면 뭐든 다 투자해 주마.”
갑자기 훅 들어오는 임성철 회장 제안에 벙쪘다.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막내딸을 만나보란다.
전생에 이런 복이 있었다면 진돗개처럼 충성했을 것이다.
“왜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하지 않으면 그게 정상인가.
임성철 회장의 부에 비하면 겉으로 드러난 내 돈은 얼마 안 됐다.
그런 나를 딸과 만나보라는 임 회장이 이상하게 보였다.
“흐흐. 자주 만나서 술 마시자. 젊은 놈이랑 마시니까 술이 술술 들어간다.”
도운종 회장이나 임성철 회장이나 둘 다 비슷하게 괴짜다.
“도와줄 것 있으면 비서실로 전화해. 장 실장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건 일단 받아 챙겼다.
“한수야!”
갑자기 큰 소리로 장한수 실장을 부르는 임성철 회장
“네? 네에엡! 회, 회장님!”
졸다가 화들짝 놀란 장한수 실장이 일어났다.
직장인의 비애다.
“너도 많이 늙었다. 크크크.”
“회, 회장님.”
“집에 가자. 피곤하다.”
“모시겠습니다!”
언제 취했냐는 듯 정신 바짝 차린 장한수 실장이 임성철 회장을 보필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오지 마라. 여기서 자고 가. 저 친구 옮기지도 못하겠다.”
“오늘 저녁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그럼 다음에는 네가 사라.”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오늘 만나서 반가웠다.”
악수를 나누고 사라지는 임성철 회장.
거인의 뒷모습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로버트 우리도 집에 가죠.”
“그럴까요? 보스.”
코를 골며 자는 척했던 로버트가 씩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와 임성철 회장 대화 시간을 만들기 위해 연기를 펼쳤던 로버트다.
기감으로 그의 배려를 이미 알고 있었다.
“달빛 참 곱다.”
하늘에 두둥실 뜬 보름달.
오늘따라 더 크고 밝게 보였다.
***
“꺄아아아아악! 저, 정말이죠 대표님! 뻥 아니죠?”
“대표가 뻥이라뇨…….”
“대박! 언니 우리 자가용 비행기 타보는 거야?”
로버트 미국 가는 김에 두 사람을 태우고 가라고 했다.
LOR 투자 전문회사의 고위급 직원들에게 대표의 능력을 확실히 보여주고 싶었다.
“너 아빠 자가용 비행기 없었어?”
“나 첩 자식이잖아. 안 태워줬어.”
도도희의 저 당당함은 항상 본받고 싶다.
첩 자식이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올바르게 자란 인간성이 모범이었다.
“공짜 아닙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요? 선물 사와요? 그거 다 먹었어요?”
유세라 팀장은 가끔 저렇게 맹할 때가 있다.
호주에서 선물로 사 왔던 캥거루 에센스를 아직도 기억하는 것 같다.
“그거 다 먹었어요. 어찌나 효과가 좋던지~.”
“저, 정말요?”
“그건 진짜 뻥입니다.”
“으앙! 대표님 완전 못 됐어!”
“앞으로 그런 선물 던져주면 회사 문 안 열어줄 겁니다.”
“그럼 조건이 뭐예요?”
도도희가 새카만 눈동자를 반짝였다.
오늘따라 복장이 매우 옳았다.
여름 패션의 정수를 보여줬다.
새하얀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반바지에 선글라스, 가슴골이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민소매 셔츠는 유혹 그 자체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도움이 필요한 세 남자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천사가 되어주면 됩니다.”
“뭐, 뭐예요? 지금 소개팅하라는 건가요?”
유세라 팀장이 놀랐다.
“언니는 참! 천사라잖아! 엔젤!”
도도희는 바로 알아들었다.
“로버트가 도와줄 겁니다. 그곳에서 에어비앤비라는 신생 공유 플랫폼 스타트업 회사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지분 51프로를 획득하면 됩니다. 간단하죠?”
도도희 눈동자에 생기가 팍 돌았다.
사업가 집안의 피는 못 속이는 거다.
아마 휴가보다 더 재미있을 거라 장담한다.
“공유 플랫폼을 아는 대표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투자자금은요?”
“로버트가 알아서 할 겁니다. 투자금을 비롯해 법률 자문을 서포터 받을 수 있습니다.”
“흐음~ 알아서 한번 해봐라. 능력을 보여 달라는 말씀인 거죠?”
“밥값 해야죠. 저도 땅 파서 장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겨울 휴가 5일 더 추가해 줄 거죠?”
밀당의 맛을 아는 도도희다.
“콜!”
“그럼……. 나도 콜!”
“에라 모르겠다. 나도 콜이에요!”
요즘 유행하는 콜.
셋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어났다.
폭풍 속으로 들어가는 세상에서도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는 씨앗을 뿌리는 이 맛.
임성철 회장도 안 부러웠다.
오직 나만 누릴 수 있는 투자 특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