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화 (209/1,284)

 # 209

회귀의 전설

209장. 수상한 영주

장사꾼이 눈치가 제로다.

누가 봐도 현재 내 꼴은 거지 사촌 급이다.

상인이라면 마차에 이것저것 진귀한 물건들이 많을 것이다.

쓸모없는 금화 말고 옷가지들, 밀가루와 말린 고기, 향신료 따위를 주면 얼마나 좋을까.

영주 체통이 있어 콕 찍어 말하지 않았다.

“아! 그거요!”

제롬이 눈을 반짝이며 아는 체했다.

“그렇지! 그거!”

기대에 찬 눈으로 제롬을 봤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마력석은 마차에 없습니다.”

마력석? 그건 또 뭐야?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될 것 같다.

허접한 용병들 끌고 다니는 거 보니 큰 상인 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제롬 상인.”

“네. 영주님.”

“마차에 뭐가 실렸나?”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넌지시 물었다.

지구에서는 절대 이런 남자가 아니었는데 여기서는 어쩔 수 없다.

마차에 근사한 물건들이 가득할 것 같았다.

한 달 동안 하도 거지같이 살았더니 이것저것 많은 물품들이 필요했다.

“……영주님, 이 마차에는…….”

상인의 눈동자가 떨렸다.

안 털어 먹는다고!

공짜 탐했다가는 어둠의 마나 포인트를 적립할 게 빤하다.

일단 믿음이 필요할 것 같다.

오크들 시체에서 나는 비릿한 피 냄새가 진하게 맡아졌다.

“냄새가 지독하네.”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가죽을 벗긴 뒤 묻겠습니다.”

용병단장 탈만이 황급히 답했다.

“구덩이는 내가 파줄까?”

“네? 여, 영주님이요?”

제롬과 탈만이 놀란 토끼눈이 됐다.

내가 아는 지식에도 영주가 땅 파는 일은 없었다.

소설 속 영주들은 아무리 급해도 보통 이렇게 귀찮은 일은 맡아 하지 않는다.

마법사들도 콧대 높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내 땅 파겠다는데 불만 있나?”

“아닙니다!”

알파닥에게 당한 서러움을 까칠함으로 포장해 근엄으로 풀었다.

평범하고 좋게 좋게 대하고 싶었지만 이미 영주로 역할이 정해졌다.

한 번 가면 쓴 거 이대로 캐릭터 쭉 이어갈 생각이다.

“저기 좋네.”

내성 밖 공터를 가리켰다.

“노움. 나와 봐.”

가볍게 흙의 초급 정령을 소환했다.

꾸물럭.

발밑에서 아이만 한 흙덩어리가 나타났다.

“으아아아아! 저, 정령이다!”

“영주님이 정령사다!”

“세상에 정령사라니…….”

용병들이 난리가 났다.

정령사 보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닌 듯했다.

다들 환희에 찬 시선을 보냈다.

어깨 쭉 폈다.

“저기 구덩이 큰 거 파봐.”

노움에게 턱으로 땅을 가리켰다.

끄덕거리며 노움은 스르륵거리며 땅을 파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드드득.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더니 거대한 구덩이가 생성됐다.

내공이 쑥 빠져 나갔다.

“엄청난 친화력이다!”

“정령 기사님이라니…….”

용병들은 그 광경을 보며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사실 나도 정령이 낯설고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거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고 실제 있을 거라고는 믿지도 않았다.

그랬던 정령이 내 수중에서 말도 잘 들었다.

“탈만 단장.”

“넵! 영주님!”

“경비 세워.”

“명을 따르옵니다!”

탈만을 자신의 수하처럼 부렸다.

그런데 노움이 살짝 더 커진 것 같다.

살도 쪘고 키도 커졌다.

얼굴도 곰처럼 변했다.

소환도 빨랐고 행동에 힘이 넘쳤다.

진화했음이 확실했다.

짧은 순간 공터 하나가 깊게 파였다.

괜히 기분이 좋다.

“제롬 상단주.”

“네. 영주님.”

“오늘 저녁은 내가 책임지겠네.”

“네? 저녁을요?”

배고픈 영혼들에게 밥 주면 포인트를 번다.

그걸 알고도 기회를 날릴 수 없었다.

지구 귀환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짓 다 해야 한다.

“왜 안 돼?”

“아,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영주님.”

“그럼. 다들 수고하라.”

말을 남기고 내성으로 들어갔다.

용병들을 보고 있자니 탐이 났다.

성에 사람들이 북적이자 제법 영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롬에게 여러 가지 물어보고 싶었다.

이 성이 왜 이렇게 됐는지 그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차도 탐이 났다.

닭들이 떠난 자리에 금이 수북했다.

그거 내주고 모조리 교환하고 싶었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니 재물로 안 되는 건 없을 것이다.

생각이 바빴다.

포인트를 받기 위해서는 용병들 먹일 배부르고 맛있는 요리가 필요했다.

오크 잡느라 배 쫄쫄 굶었을 용병들이다.

포인트에 꽂혀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후려치는 만큼 벌 수 있는 짭짤한 포인트 수장.

먹어 본 자만 아는 설탕 마약이었다.

***

“마, 마족은 아닌 것 같지?”

“아마도요.”

“끄응.”

자신감 없는 탈만 대장의 말에 제롬은 신음을 냈다.

영주가 수상했다.

마족일 리는 없었다.

마족은 정령을 소환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믿고 안심하기에는 능력이 범상치 않았다.

눈빛이 수시로 변했다.

웃다가 찡그렸다가 얼굴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오크를 때려잡는 솜씨는 용병들이 본받아야 할 정도로 완벽했다.

“마나를 능숙하게 사용 가능한 정령기사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용병들에게 주의를 주게.”

“애들 눈치 하나는 빠릅니다.”

‘최소 중급 용병이다.’

탈만은 처음보다 영주 경지를 높게 쳤다.

초급 정령이지만 저렇게 빨리 소환할 수 있는 정령사는 보기 힘들었다.

“그래 되도록 조심하게. 특히 저녁 식사를 조심하라고 해. 아무거나 덥석 먹지 말고.”

“넵!”

두런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제롬과 탈만.

경계심을 갖고 을씨년스런 성을 살폈다.

일단 위기를 넘겼지만 오래 머물 수 없는 위험한 베르샤 성.

빨리 오크들이 물러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치이이이이익.

넓은 철판 위에 뿌려진 올리브유가 사방으로 톡톡 튀겼다.

꿀꺽.

“으으으으.”

용병들이 사방에서 침을 꼴딱 삼켰다.

단장이 영주가 주는 음식을 조심하라 경고했다.

영주가 요리를 내주면 배가 부르다는 핑계를 대기로 했다.

딱딱한 육포와 마른 빵을 침을 발라 먹었다.

그러던 중에 벌어진 영주의 저녁 요리 시간.

영주는 큰 솥을 가져와 내성 마당에서 요리를 했다.

외성에서 감자를 캐와 수프를 끓였다.

양파와 파를 집어넣고 육포를 찢어 넣었다.

제롬에게 올리브유와 소금을 얻어 끓였는데 냄새가 기가 막혔다.

저녁에는 날씨가 쌀쌀했다.

오크에게 쫓겨 따뜻한 스프를 열흘 전에나 먹어봤다.

특히 용병들을 괴롭히는 건 철판 위에서 먹음직스럽게 튀겨지는 정체 모를 야채 튀김이었다.

별 볼일 없는 야채를 넓게 펴서 양파와 파, 소금과 밀가루가 전부인 요리였다.

감자를 채 썰어 튀기기도 했다.

호박도 잘게 다져졌다.

육포를 물에 불려 그것도 튀겼다.

냄새가 기가 막혔다.

먹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코는 벌렁거렸고 눈은 그곳으로만 향했다.

내성이라 냄새가 빠져나가지도 않고 계속 한자리를 맴돌았다.

“제롬~ 마차에 와인 있지?”

“네? 네…….”

영주가 기가 막히게 찍어 맞혔다.

“한 통 꺼내와 봐.”

“네…….”

“공짜 아니야. 돈 주고 살게.”

오크 퇴치비로 제공했던 가죽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던졌다.

손해는 아니지만 제롬의 속 쓰림은 컸다.

오크만 아니었어도 전혀 지출되지 않았을 금화다.

이 정도 통행비는 상단 운영비의 반절이나 됐다.

항상 이익이 날 수 없는 노릇이기에 이번 상행은 반쯤 포기했다.

“루멘. 포도주 한 통……. 아니 세 통 가져와!”

“알겠습니다!”

초급 상인 후보생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올해 제조된 포도주가 담긴 통이 배달됐다.

중급 품질의 포도주였다.

발효가 목적이 아닌 생산년도에 바로 마시는 포도주였기에 막 굴려도 상관없었다.

뽕!

영주가 포도주 통 마개를 열었다.

단단하게 밀봉된 녀석이 영주의 손가락 놀림 한 번에 가볍게 뽑혔다.

“흐음~ 괜찮은 포도주군. 품질도 적당하고 탄닌 맛도 제법 배었어. 숙성은 힘들겠지만 마시기에는 딱 좋아.”

포도주에 관해 영주가 제법 아는 게 많았다.

콸콸콸.

영주는 나무 대접에 포도주를 시원하게 따랐다.

꿀꺽 꿀꺽.

거침없이 포도주를 대접 째 마셨다.

일반적인 귀족은 아니었다.

정통 기사도 아니고 자유 기사가 분명했다.

“크으! 죽인다~.”

입가에 붉은 포도주를 살짝 남기며 감탄하는 영주.

“…….”

용병들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렸다.

언제나 죽음과 동행하는 그들에게 술은 영혼의 안식처였다.

침이 줄줄 입 밖으로 흘러 나왔다.

단장 탈만도 마찬가지였다.

‘으으으. 도대체 왜 우리들을 고문하는 거야!’

제롬은 그 와중에도 정신을 차렸다.

흑마법사들이 인간을 먹을 것으로 꾀어 잡아먹는다는 옛 이야기가 생각났다.

며칠 동안 쉬지도 제대로 먹지 못한 상단에게 이렇게 잔인한 고문도 없었다.

“다들 안 먹을 거야? 오늘 오크 때려잡아 본 영주가 거하게 쏜다니까~.”

악마의 미소를 흘리는 영주.

“탈만이라고 했지?”

“네? 넵! 영주님!”

“아~ 해봐.”

“여, 영주님…….”

태어나 귀족에게 이런 대접 처음 받아보는 탈만이 당황했다.

부하들에게 영주 음식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는데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영주가 주는데 안 먹을 거야?”

“그게…….”

덩치에 안 맞게 울상이 된 탈만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 됐다.

“독약 안 탔다.”

영주는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으로 큼지막하게 집은 낯선 음식을 내밀었다.

눈앞까지 다가온 밀가루 튀김의 고소함에 탈만은 마음 굳게 먹었다.

그리고…….

“!!!”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순간 눈동자가 왕방울만큼 커졌다.

“자~ 술도 한 잔해. 오늘 밤은 안전할 것 같으니까.”

콸콸 나무잔에 듬뿍 부어주는 포도주.

고소하면서도 탱탱한 식감, 거기에 더해 오랜만에 맛본 기름 향에 탈만은 정신없이 씹어 삼켰다.

거침없이 포도주도 따라 마셨다.

단장이라고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

“꿀꺽, 꾸우우울꺽!”

단숨에 포도주를 비웠다.

“캬아!!!”

저절로 터져 나오는 추임새에 탈만은 천국을 맛봤다.

그 어느 순간보다 안주와 술이 죽여주게 좋았다.

일정을 끝내고 마시는 한 잔의 포도주!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어때 죽이지?”

“영주님……. 존경합니다!”

탈만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그럼 한 잔 더할래?”

“영주님!!!”

그걸로 끝났다.

대장이 저렇게 나오자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제롬~ 뭐해. 포도주 화끈하게 다 풀어!”

고개를 젓는 제롬.

그날 밤……. 제롬은 마차 한 대분의 포도주를 모두 팔았다.

귀족 영주가 손수 만들어 준 각종 안주.

제롬도 맛봤다.

그중에 감자 호박전을 먹고 제롬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