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회귀의 전설
195장. 아! 베토벤이여! (2)
“아!”
아일라는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얼마 전에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최연소 객원연주자로 선정됐다.
빈 음악원에서 천재 소리를 듣던 그녀는 지금 처절하게 무너지는 자괴감을 맛봤다.
베토벤을 사랑했던 아일라.
그녀는 지금 베토벤의 헌신을 목도하고 있었다.
상상도 하지 않았던 동양인이 무대로 다가올 때 깜짝 놀랐다.
자신의 연주를 듣고 난 이후 무대에 오를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없어야 했다.
그녀는 액상 프로방스 음악 축제를 위해 시에서 초청한 정식 피아니스트였다.
시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각본에 따라 피아노를 연주했다.
아일라가 사모해 온 베토벤.
자유롭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부터 14번 ‘월광’.
그리고 아일라가 가장 자신 있어 했던 21번 ‘발트슈타인’까지 열정을 아끼지 않고 연주했다.
온몸의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 연주했다.
따스한 프로방스의 오후가 주는 축복에 베토벤을 그리며 최선을 다했다.
스스로도 대단히 만족했다.
음계와 화음은 단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정확했다.
베토벤 소나타답게 박력이 부족했지만 기교로 메웠다.
그런 그녀도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은 건드리지 못했다.
아일라가 마지막에 연주했던 ‘발트슈타인’과 함께 베토벤 중기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
난이도가 달랐다.
대중들이 연주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오는데 35년이 걸린 명곡이었다.
베토벤은 당대에 따라올 자가 없었던 피아노 테크닉의 선두주자였다.
그런 베토벤이 마음먹고 창작한 소나타 23번 ‘열정’.
형식이 파괴되면서 나타나는 음량의 거대한 진폭과 머리에 그려지는 격정적인 색채감은 오케스트라 음색에 비견된다는 찬사를 받았을 정도다.
친구이자 후원자인 프란츠 폰 브룬스비크 백작에게 헌정되었다고 알려진 23번 소나타는 베토벤의 용암 같은 사랑의 열정이 가득한 곡이기도 했다.
딴딴딴딴딴딴~♩ 따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딴딴따따단~♪.
어느새 동양인 피아니스트는 3악장의 거친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정신을 산산 조각내는 격렬함에 아일라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눈에 보이는 뒷모습이 거대했다.
브룬스비크의 두 여동생을 보고 고뇌에 차서 만들어 낸 피아노곡.
요제피네의 관능미와 테레제의 지적미에 방황했던 베토벤.
1악장은 오제피네의 관능미에 대한 괴로운 반항으로 2악장은 순수한 테레제에 대한 영감이 가득한 곡.
3악장은 두 여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베토벤의 모든 심정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천재 작곡가의 뜨거운 사랑의 결정판이 바로 소나타 23번 ‘열정’이었다.
딴! 딴따다딴! 딴다다딴~♫ 따랑따랑따랑 둥~ 뚜르르르르르 따라라라라라~♬.
사랑의 괴로움에 빠져 행복과 불행, 번뇌와 거부, 욕망 사이의 모든 에너지가 흠뻑 들어차 있는 3악장도 끝을 향해 갔다.
“으음…….”
아일라는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연주했던 소리보다 더 넓고 맑게 퍼졌다.
야생성이 살아 꿈틀거리는 동양 남자의 넓은 등이 꿈틀거렸다.
딴딴따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딴따다다다다~♩♫.
“…….”
듣고 있는 사람들 모두 숨을 죽였다.
음악을 조금이라도 아는 교양인이라면 지금 얼마나 위대한 연주를 듣고 있는지 알 것이다.
피아노 선율이 퍼질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음악의 신이 강림한 듯한 이 순간.
모두 침묵으로 최고의 경배를 올렸다.
작은 소음도 없었다.
어느새 광장 주변은 빼곡히 사람들로 뒤덮였다.
‘동양인? 한국 남자 같은데???’
운집한 사람들 중에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던 《월간 음악》의 기자 윤세인도 섞여 있었다.
휴가 겸 유명한 휴양지인 액상 프로방스의 음악 축제를 취재 중이었다.
세계적 거장들이 참가하는 관현악 연주 및 연극과 오페라까지 올라오는 프로방스 음악 축제는 음악인들 사이에 관심이 매우 높았다.
그런 축제 중 야외 저녁 시간을 홀려버리는 엄청난 실력의 피아니스트다.
한국대 피아노 전공자였던 윤세인은 경악에 빠졌다.
분명 관객들 틈에서 무대에 오른 남자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빈에서 요즘 떠오르는 신예 피아니스트인 아일라의 연주를 잊게 만들어 버렸다.
등만 보였지만 동양인이 확실했다.
그것도 체형은 익숙한 한국 남자 같았다.
키도 크다.
건반을 두들길 때마다 움직이는 남자의 몸은 예술이다.
그리스 신 뮤즈가 강림해 인간들에게 음악의 기쁨을 선사하는 것 같았다.
모든 이들이 침묵 속에 넋을 놓고 있다.
선율이 매혹을 넘어 영혼을 홀리고 있었다.
윤세인은 정신을 차리고 화면을 당겨 촬영에 집중했다.
거리가 있어 화질이 좋지 않았다.
아쉬웠다.
지금 이 장면은 요 근래 잠잠한 클래식계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게 확실했다.
타당~ 팅!!!~♪.
길었지만 엄청 짧게 느껴졌던 연주가 끝났다.
“…….”
갑자기 찾아온 진공 같은 침묵.
다들 얼이 나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흔한 박수를 치거나 휘파람을 부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격랑에 빠졌다가 이제 갓 건져진 느낌이었다.
“후우우우…….”
“하아!”
누군가 길게 숨을 쉬며 정적에 가까웠던 고요가 깨졌다.
천명이 훨씬 넘는 인파가 야외에서 이렇게 몰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스윽.
남자가 일어났다.
윤세인은 디카 줌을 당겨 남자 얼굴을 확인했다.
잘생겼다.
이 정도면 슈퍼 스타급 배우 외모다.
묵직한 예의가 몸에서 풍겼다.
남자는 정중하게 관객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앙코르!!! 앙코르르르르르르르!!!”
“최고다! 최고!!!”
사방에서 농축된 함성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앙코르! 앙코르! 앙코르! 앙코르!!!”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사방에서 외쳐지는 앙코르!
윤세인 역시 자신도 모르게 그 대열에 합류해 앙코르를 입이 터져라 외쳤다.
다시 듣고 싶었다.
뜨거웠던 첫 사랑 키스 때보다 더 감정이 벅차올랐다.
오늘 이 자리가 아니면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모두 열광했다.
“앙코르! 앙코르! 앙코르!!!”
미친 듯 앙코르를 외쳤다.
씨익.
남자가 웃었다.
입에 걸린 미소는 당당하고 오만했다.
그러나 반감이 일지 않았다.
절대자에게는 모든 게 허락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모두 단 한 가지를 소망했다.
환상 속으로 이끌었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아앗.
야간 조명이 남자를 비쳤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피아니스트는 마치 신처럼 보였다.
우매한 인간들을 위해 계몽에 나선 음악의 신 같았다.
“그럼, 이번에 들려드릴 피아노 소나타는…… ‘천상의 환희’입니다.”
처음 듣는 피아노 소나타 제목이었다.
“존경하는 베토벤을 위해 헌정하는 곡입니다. 그럼~.”
무려 창작곡을 연주하겠다는 말이다.
한 마디 선언하고 자리에 다시 앉는 피아니스트.
“…….”
모두 두 손을 움켜잡고 다시 숨을 죽였다.
아일라도 윤세인도 그 어떤 누구도 한 마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스르륵.
가만히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자세를 잡는 피아니스트.
티리리링~♫.
경쾌한 첫 음으로 울리는 선율이 시작되었다.
티리리리링 티리리링~ 티리리리라라랑~♬.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화음의 질주.
“아!”
“오…….”
“신이시여…….”
조용히 터지며 전이되는 경탄의 찬배.
“아…….”
윤세인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가슴 깊이 파고드는 천상의 화음이다.
온갖 꽃이 핀 광활한 천상을 유영하는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카타르시스가 물밀 듯 온몸을 파고들었다.
주르르르륵.
신께 용서받은 영혼이 일순간 깨끗하게 정화되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두 줄기 눈물이 볼을 적셨다.
윤세인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눈가를 적시는 이슬방울 느끼고 있었다.
인세에 다시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환희를 맛보며 행복함 가득한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있었다.
따라라라라라 따라라라랑 따라라라랑~ 따랑~♫.
피아니스트만이 홀로 도도하게 화음의 파도를 헤쳐 나갔다.
‘다니엘…….’
비비안은 제멋대로 파르르 떨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지금껏 태어나 수많은 피아노 소나타와 합주곡을 들었다.
가문의 성에서 열리는 연주회가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있었다.
내로라하는 유럽 상류층들과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를 비롯한 음악계 거물들이 참석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아빠와 함께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연주를 들었던 비비안이었다.
스스로 음악적 조예가 대단하다 자부했던 그녀였다.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수준급으로 연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신 앞에 발가벗겨진 인간처럼 자신의 미약한 능력에 감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동안 자신의 오만했던 자신감에 잣대를 들이밀지 못했다.
이건 인간의 음악이 아니었다.
저렇게 청아하고 맑은 화음을 연속 터트릴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세상에 없었다.
빠르고 경쾌하다 못해 폭풍의 바람을 머금은 돛단배처럼 선율들이 자유자재로 춤췄다.
감동과 환희, 살아 있음에 대한 찬사.
기쁨의 경배가 선율들 속에서 살아 꿈틀거렸다.
귀로 듣지만 코로 신선한 천상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착각이 들었다.
귀는 활짝 열렸고 심장은 미칠 듯 뛰었다.
온몸을 휘몰아치는 엔도르핀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미친 소나타다.
힘껏 쥔 두 주먹 때문에 손이 저려 왔다.
비비안은 다니엘을 다시 봤다.
엄마의 선물처럼 눈에 띄었던 기적 같은 남자.
만난 지 단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미칠 것 같은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그의 넓은 등이 눈에 보인다.
그의 가슴에 안기고 싶었다.
절로 눈물 흘리는 감동을 안겨주었다.
따라라라라라라라라라~따라라라라~♬.
소나타는 어느새 절정을 찍고 있었다.
듣는 이들 모두 알 수 없는 감동에 눈물을 흘리며 웃음을 띠었다.
‘천상의 환희’라는 제목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사락 사락.
비비안은 무엇에 이끌리듯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광장은 어느새 더 많은 사람들로 꽉 차 몇 발자국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였다.
몸을 부딪치며 앞으로 나아가도 누구 하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매혹의 선율에 자신을 맡겼다.
비비안도 소리에 귀를 이끌려 몸을 맡겼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
이대로 멈춰 선 채 서 있을 수 없었다.
따다다다다다다 따다다단 타아앙~♫.
피아노 소리가 멈췄다.
모든 이들의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이 커졌고 입은 다물려지지 않았다.
야외에서 울려 퍼진 완벽한 베토벤 헌정 피아노 소나타.
베토벤이 이 곡을 듣고 있다면 무한히 기뻐했을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이 메아리가 되어 광장에 울렸다.
앙코르 소리는 누구도 내뱉지 못했다.
다시 들을 자신이 없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영원한 기억 속에 남아있을 아름다운 추억을 훼손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박수도 없었다.
인간이 아닌 신인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피아니스트를 그저 볼 뿐이었다.
‘이 남자! 잡아야 해!’
아일라는 충격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여행객이 분명한 정체 모를 동양인 피아니스트.
방금 들었던 소나타 악보가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껏 들었던 모차르트와 베토벤, 그리고 슈만을 비롯한 어떤 위대한 음악가도 이런 소나타를 남기지 못했다.
연주 실력은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인간은 결코 저런 속도와 현란한 기교로 피아노를 칠 수 없었다.
하늘을 나는 천사를 잡으려는 어리석은 손짓일 뿐이다.
“오오!!!”
“뮤즈시여…….”
남자가 일어나 고개를 숙이자 부족한 박수 대신 고개를 숙이는 수많은 사람들.
이건 경외였다.
그런 남자 입에 걸린 만족스러운 웃음 한 자락.
귀는 멀었지만 위대한 음악을 세상에 선물했던 베토벤 같았다.
악성(樂聖)의 재림.
아일라는 그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금세 떠날 것 같은 신.
그를 붙잡아야만 될 것 같은 운명을 느꼈다.
“다니엘~!!!”
그때 피아니스트를 향해 아름다운 여인이 단상으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엄청난 인파가 바라보는 속에서 그에게 퍼붓는 강렬한 키스.
“하아!”
남자의 강한 팔이 여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 왠지 모를 허탈함에 아일라는 깊은 한숨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