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회귀의 전설
194장. 아! 베토벤이여! (1)
“아직이야?”
“파악 중입니다!”
“젠장!”
전직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의 경호팀장 에두아르가 인상을 썼다.
파리를 샅샅이 뒤졌지만 성을 빠져나간 새를 찾지 못했다.
루브르 박물관 CCTV를 밤새 살폈다.
의심 가는 자동차만 수백 대였다.
‘아가씨를 잃으면 우리 명예는…… 끝난다!’
조직원들 수백 명이 그들과 전쟁에서 죽었다.
아사신과의 전쟁은 언제나 피를 말렸다.
이번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게 뻔했다.
아가씨는 단장이 끔찍이 사랑하는 막내딸이다.
단장은 아내와 사별한 이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가씨를 사랑으로 키웠다.
세상과의 격리였다.
만약 그런 아가씨가 아사신에 의해 변이라도 당한다면…….
중동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아사신은 폭풍이 불기를 원했다.
피바람이 불어야 성전에 투신할 전사들이 늘어날 것이다.
가뜩이나 조직이 예민해져 있는 상황이다.
후세인이 제거된 이후 이라크에서 수니파 무장조직들이 점점 활동을 넓혔다.
유럽 쪽으로 난민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조직의 감시나 방어 한계를 넘는 테러 분자들도 유입됐다.
그들의 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상태다.
중요한 정보가 몇 번 새는 일도 벌어졌다.
기사단에 스파이가 침투해 있음이 확실했다.
‘게다가 놈들의 능력이 진화했다!’
뿐만 아니라 과거부터 특이한 능력을 사용하던 아사신들의 능력이 더 괴상하게 발전했다.
놈들은 총을 맞아도 죽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다.
이상한 주문을 외우면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기사단원들이 갑자기 자기의식을 지배당해 명령을 듣지 않았다.
또 정체 모를 무기에 공격을 당하는 일도 생겼다.
초능력을 뛰어넘어 마법을 쓴다는 소문이 조직원들 사이에서 돌기까지 했다.
사실 팀장 에두아르는 그 같은 상황을 직접 경험한 케이스였다.
총알 20여 발을 맞고도 끈질기게 조직원의 목을 물어뜯던 괴물 같은 아사신의 살수.
지금 떠올려도 진절머리가 났다.
위기감을 느낀 조직이 여러 공작 기관들과 합세하여 아사신들에게 괴멸적 타격을 입힘으로써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요 근래 들어 스멀스멀 놈들의 움직임이 다시 감지되었다.
바퀴벌레들보다 더 끈질긴 생명력이다.
“이 시간부로 특급 경계를 발령한다. 모든 정보원들은…… 파리를 포함해 온 유럽을 감시한다!”
“옛써!”
무려 10년 만에 발령되는 1급 경계령이다.
기사단 소속 기사들 모두 가슴의 검을 뽑아 들었다.
1000년 넘게 이어져 온 이교도들과의 전쟁이었다.
다시 처절한 피의 전투를 벌여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꺄아아아아아~. 축제야 축제!”
비비안이 방방 뛰었다.
바다가 보고 싶다던 그녀의 말에 마르세유를 찍었다.
그러나 이동하는 중에 만난 액상 프로방스 음악 축제.
비비안이 축제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찬성했다.
세잔 신의 고향이기도 했다.
가던 길을 턴해 도착한 액상 프로방스…….
“멋진데?”
빌딩만 쑥쑥 솟은 한국 도시의 풍경과 확연히 달랐다.
하늘은 푸르렀고 굵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건축된 고풍스런 건물들이 먼저 반겼다.
오랜 세월을 버틴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었다.
시내 곳곳에 분수들이 물을 뿜어 분위기를 더했다.
여유와 낭만이 숨 쉬는 도시.
가출 고양이와 집사 수준이 돼 버린 나는 축제 거리에 퐁당 빠졌다.
찰칵찰칵.
사진기를 들고 흐르는 시간을 담았다.
“다니엘~”
비비안이 분수 앞에서 포즈를 잡았다.
오다가 구입한 청바지와 새하얀 셔츠는 비비안의 미모를 훨씬 돋보이게 만들었다.
주변 남자들도 대놓고 곁눈질을 할 정도였다.
영화배우 같은 미녀가 활짝 웃는 모습은 절로 눈이 갈 만큼 시선을 끌었다.
축제에 오고 가는 관광객들 중 비비안의 미모가 탑이다.
내가 전생에 몇 개 나라를 구했음이 확실했다.
회귀 버프가 심하긴 심했다.
찰칵.
비비안의 웃는 모습을 사진에 가득 담았다.
체형도 예쁘고 날씬한 데다 얼굴도 작아 카메라에 담는 족족 전부 화보였다.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연인인가?”
그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프랑스인 노신사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네……. 그게.”
“요즘 젊은 사람들 커플티 입는 모습이 보기 좋아. 우리 시절엔 못 그랬지. 청춘은 한 번뿐이라네. 사랑하고 사랑해도 부족한 시간이야.”
“그, 그렇죠.”
비비안 덕분에 낯선 곳에서 커플티를 입게 됐다.
차를 타고 오면서 잠깐 들렀던 옷집에서 나도 청바지와 셔츠를 골라 입었다.
비비안이 권한 콘셉트였다.
싫다는데 비비안이 기어코 입혔다.
자연스럽게 그녀와 팔짱도 꼈다.
축제이니 사랑하는 연인 코스프레한다고 생각하란다.
“보기 좋아. 저 처자 딱 보니까 명망 있는 가문의 딸이야.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있어.”
프랑스 할배 소싯적에 좀 날린 것 같다.
비비안을 한 번 훑어보고 정체를 파악했다.
세상은 넓고 고수도 많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재밌게 즐기게. 젊은이를 보니 내 청년 시절이 생각나~.”
할배가 가벼운 인사를 하고 멀어졌다.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
키도 훨씬 작고 배도 나와 뒤뚱거리는 할배가 어떻게 나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다니엘. 사진 잘 나왔어?”
“어? 그럼!”
예술적 감각은 사진에서도 발휘됐다.
탄탄한 팔과 다리는 카메라를 정확하고 흔들림 없이 받쳤다.
각을 잡고 보는 시선도 다른 이들과 달랐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숨은 미묘한 세상의 이면이 보였다.
카메라도 좋아 더할 나위 없었다.
“우와와와! 대단해!”
비비안이 다가와 화면 속의 자신을 보고 방방 뛰었다.
행복한 고양이 같은 그녀.
그 모습에 자칭 집사는 행복했다.
“우리 다른 곳에 가자.”
비비안 모습이 진심으로 해피해 보였다.
웃음 바이러스에 감염된 듯 프로방스 시내에 온 이후 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사락.
그녀가 다시 팔짱을 꼈다.
이제 보니 키가 꽤 컸다.
적어도 177은 될 것 같다.
나와 10센티 정도 차이가 나니 보기에 딱 좋았다.
“허리는 안 아파?”
“괜찮다니까.”
“텐트에 들어오라니까~.”
어젯밤 비비안의 끈질긴 유혹을 물리치고 차에서 잤다.
2인용 텐트는 그렇게 넓지 않았다.
괜히 들어갔다 사고 칠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들이 거주한다는 프랑스지만 난 한국인이다.
로마에 가서도 한국법대로 살 것이다.
“오늘 큰 텐트 사서 같이 자자. 꼭!”
“어? 어…….”
이거 봐라, 먹지도 못하는 감 찌르면 재밌나?
일격을 당한 비비안이 말을 머뭇거렸다.
“가자. 비비!”
애완 고양이 애칭 부르듯 그녀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았다.
비비안은 거부하지 않았다.
따뜻했다.
액상 프로방스의 7월 음악 축제 여파로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비비안의 손을 잡고 인파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누가 봐도 연인 포스다.
비비안도 거부하는 기색 없이 따라왔다.
따랑~♫. 타라라라라라랑~♪.
그때 멀리서 맑은 피아노 연주가 들렸다.
“베토벤 소나타야!”
귀족 가문 여식으로 짐작되는 비비안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베토벤 형님의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을 단박에 알아봤다.
“우리 가서 듣자~.”
오케이!
비비안의 손을 잡고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광장으로 향했다.
딴따라라라~♫ 따라 따라라 따라라라라~♬.
베토벤 형님이 34살 때 작곡했던 이 곡은 그의 후견인 발트슈타인 백작을 위해 헌정했던 작품이다.
베토벤이 어려울 때 백작은 경제적, 정신적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다른 소나타와 달리 열정적인 에너지가 담겨 스케일이 컸다.
표현과 기교면에서 다른 곡들과 확실히 달랐다.
축제 음악으로 듣기 좋았다.
밝고 경쾌한 피아노 선율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하아~.”
비비안도 만족한 듯 깊은 숨을 내쉬며 빠져들었다.
연주자는 젊은 여성이었다.
단아하게 머리를 묶은 상태에서 파도를 타듯 온몸으로 건반을 누볐다.
축제 기간이라 약간 높은 단상 위에 설치된 그랜드 피아노 소리가 사방으로 흘렀다.
듣기 좋았다.
다만 베토벤 형님의 굵은 선을 따라가기에는 여성의 힘이 약했다.
쇼팽과 모차르트라면 모를까 베토벤 작품들은 여성들이 소화하기에 벅찼다.
띠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링~♫. 띠링 띠링 띠라라라라라라라라~♬.
그래도 역시 듣기 좋았다.
적당히 바람이 부는 축제가 펼쳐지는 광장에서 오후에 어울리는 곡은 이만한 작품이 없었다.
띠리리링 띵~♫.
제법 길었던 소나타가 끝났다.
“휘이이이이이이이이이~”
“브라보!”
짝짝짝짝짝짝.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터졌다.
“앙코르! 앙코르!”
다음 곡을 원하는 청중들이 미친 듯 앙코르를 외쳤다.
하지만 여성 피아니스트는 지쳐 보였다.
베토벤 소나타를 저렇게 두들겨 댔으니 탈진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 점에서 베토벤은 여성 연주자들에게 참으로 불친절했다.
사랑에 상처받은 자의 쪼잔한 복수심일 수도 있었다.
결코 내 곡을 여자 따위는 연주하지 말라는 경고 같은 것 말이다.
“감사합니다~”
무대 위에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여성은 이십 대 중반의 상당한 미모의 피아니스트였다.
키는 작지만 단단한 입매와 파란 눈동자는 예술에 대한 힘이 가득 차 있었다.
금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하, 한 곡 더 들려드리고 싶지만 이제 힘이 다했어요. 내일 오전 연주를 위해 오늘은 이만 멈춰야 할 것 같아요.”
숨을 헐떡일 정도로 연주자는 정말 힘들어 했다.
이번 곡이 첫 연주곡이 아니었던 것이다.
연주는 중노동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못내 아쉬워했다.
“더 듣고 싶은데…….”
가출 고양이 비비안도 아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 듣고 싶어?”
“응~”
음악적 감동에 빠져들다 멈춰버린 비비안의 아쉬움이 클 것 같았다.
20프로쯤 부족한 표정이다.
“저 대신 한 곡 더 들려주실 분 없으세요?”
갑자기 연주자가 관객들을 훑어보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광장에 모인 인파가 얼추 수백은 넘어 1,000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프로 연주자를 대신해 피아노 옆에 설 간 큰 놈은 없는 것 같다.
음정 하나 틀리지 않는 피아니스트를 대신해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비비안. 들고 있어.”
“어?”
카메라를 넘겼다.
비비안이 깜짝 놀라며 날 봤다.
“더 듣고 싶다며?”
“피아노…… 가능해?”
“취미 생활이 좀 많아.”
“괜찮겠어? 저 여자분 최소 교향악단 객원 연주자급이야.”
비비안의 눈빛이 의심으로 가득하다.
베토벤의 곡을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흡사하게 재현해 낸 프로 연주자의 다음 타자로 나서는 내가 미덥지 못한 눈치다.
하긴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몰랐다.
내 영혼 안에 누가 깃들어 있는지 말이다.
“감상평 잘 부탁해.”
싱긋 웃으며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다니엘…….”
비비안의 당혹한 목소리가 나의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이미 칼은 빼들었다.
단상 앞으로 다가섰다.
프로 연주자와 눈이 마주쳤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미인이다.
“내가 저들에게 한 곡 선물해 주고 싶습니다.”
저들이란다!
오만한 베토벤 형님이 겸손한 나의 마음을 점령했다.
거침없이 피아노 옆으로 다가갔다.
“!!!”
프로 연주자가 놀라는 사이.
멋대로 자리에 앉았다.
건반 음을 확인하는 손가락 운동 과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피아노 건반 위를 거침없이 헤엄치기 시작하는 손가락.
띠리리링~♬. 티리리링 팅~♪.
그리고 시작된 연주.
온몸으로 스며들어 영혼을 적시며 흠뻑 그가 찾아왔다.
아! 베토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