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회귀의 전설
193장. 동행 (2)
“안아를 무너트린 게 일개 대학생이라고?”
“그렇습니다. 회장님.”
대한민국 제계 서울 1위인 오정 그룹 삼성동 집무실.
회장 임성철은 비서실장 장한수의 보고를 받았다.
갑작스럽게 재계에서 사라진 안아 그룹에 대한 정보였다.
“한국대 법학과…… 허어. 이제 스무 살?”
“나이는 어려도 엄청난 능력자입니다. 3년 동안 몇 천만 원의 자본으로 수조의 이익을 냈습니다. 증권가에서는 주식의 신, 선물의 신, 환치기의 신 등으로 불립니다.”
“수조? 푸하하하하하하하. 이거 분발해야겠어. 핸드폰 팔아서 번 순익보다 더 많이 벌면 이 자리 내줘야지.”
임성철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수익률이었다.
주식과 선물, 외환으로 돈 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세계적 투자자들에 버금가는 이익이었다.
“오정 증권에 영입도 못하겠어. 이건 뭐…… 신이네. 신.”
임성철은 보고서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이 아닌 한국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수익률이다.
“안아 주인이라는 말인가?”
“소유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미국에서 로버트라는 투자자를 비롯해 여러 투자 회사들과 협의를 한 것 같습니다. TS라는 그룹명으로 바뀐 뒤에 투자자들이 파견한 이사들과 감사가 상당합니다.”
“투자자금도 상당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임성철은 동물적 감각으로 냄새를 맡았다.
보통 해외 자본이 M&A에 성공하면 국내 금융권에서 부족한 자본을 충당한다.
그런데 안아는 그렇지 않았다.
안아 악성 부채 모두 해외 투자자본으로 갚아버렸다.
지금까지 있었던 패턴이 아니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대웅 애들이 선장 지시는 잘 따라. 우리 애들은 그런 면에서 너무 깔끔해~.”
“오정만의 장점 아니겠습니다.”
엘리트에 의한 엘리트를 위한 엘리트의 회사가 바로 오정이었다.
“그래도 가끔 아쉬워. 멧돼지처럼 밀어붙이는 놈들이 그립거든. 클클.”
임성철은 정체 모를 웃음을 흘렸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그럴까?”
“직접 만나보고 판단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 안아가 작은 그룹도 아니고 이것저것 서로 필요한 것도 있으니…….”
임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앤장 손대균도 친한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날짜 한 번 잡아 봐.”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스마트 폰 준비는 어떻게 돼 가나?”
“일단 방통위를 통해 아이펀 출시를 막고 있지만 최대한 빨리 제품을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구글 애들이 욕심이 많아. 조율 잘 하라고 해.”
“지시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지는 임성철 회장의 명령.
대한민국 서열 1위 기업 오정에서 젊은 천재에게 관심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그 밑에 그룹들도 안테나를 높게 세웠다.
장사 한두 번 해본 업자가 아닌 그룹의 오너들.
위기와 경계심 그리고 부러움으로 눈에 띤 인재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
딸그락딸그락.
버너 위에서 프라이팬이 일정한 리듬으로 물결처럼 움직였다.
소금을 뿌린 끓는 물에 적당히 익힌 스파게티 면을 건져내 볶았다.
방울토마토도 적당히 여행자용 스텐 접시에 담았다.
발사믹 식초를 살짝 뿌리고 바질 잎으로 장식했다.
스파게티에도 올리브유를 첨가하고 레몬과 치즈를 넣었다.
빵으로 대충 허기는 가셨지만 한국인은 밥심으로 살아가는 민족이다.
화르르르.
불을 더 강하게 올리고 다진 마늘, 안초비, 자른 피망을 넣었다.
야채가 더해지자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탁탁탁.
눌어붙지 않게 집게로 빠르게 뒤적였다.
스파게티 삶은 물을 한 컵 정도 더 넣었다.
전분 맛이 더해지면 면이 더 탱글거린다.
브로콜리와 로즈메리도 넣었다.
이제 거의 완성된 요리.
치즈와 바질을 넣고 마무리 했다.
탕!
스텐 접시 위에 면을 두 개로 나눠 담았다.
“흐음~.”
맛있는 스파게티 요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와아아아! 지금 요리 한 거 맞지?”
캠핑장에 도착하자마자 간이 샤워실로 향했던 비비안이 나타났다.
캠핑장 요금이 상당히 비쌌지만 시설이 만족스러웠다.
차 옆에 텐트를 펼 수 있는 데크가 있었다.
전생 군대 다녀온 경력으로 10분 만에 완성했다.
고양이가 목욕하는 동안 난 요리에 들어갔다.
짝짝짝!
비비안이 감격의 물개 박수까지 쳤다.
“재료가 부실하지만 오늘은 이렇게 먹자.”
“너 요리사였어?”
비비안이 얼굴 정면으로 큰 눈을 훅 들이댔다.
“!!!”
물기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에 화장기 하나 없는 여인은 위험한 무기다.
훅하고 쏟아진 샴푸 냄새와 비누 향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것도 취미.”
“으흐흐. 좋다! 요리까지 잘하는 남자와 자동차 여행이라니!”
비비안! 너만 좋냐? 나도…… 좋다.
“식기 전에 먹자.”
와인도 오픈했다.
빵에, 각종 샐러드와 메인 요리에 와인까지 늦은 정찬이 캠핑장 탁자 위에 펼쳐졌다.
시간은 저녁 10시에 가까웠다.
휘리리리링.
캠팽장에서 훤히 보이는 센강을 타고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 위에는 별이 총총 떴다.
쪼로록.
와인을 스텐 컵에 따랐다.
와인잔이 아닌 게 아쉬웠지만 자동차 여행에 이 정도면 극상의 호사였다.
쨍!
잔을 부딪쳤다.
한 모금 마셨다.
와인의 신이 갖고 있는 기억에 의해 포도주 맛이 느껴졌다.
구스베리와 오크향, 은은한 산미가 개운하게 입을 스쳤다.
후루루룩.
빵으로 만족하지 못한 비비안이 폭풍 흡입을 시작했다.
“!!!”
스파게티를 입에 물고 놀라는 그녀.
“마, 맛있어!”
감동 젖은 눈빛으로 날 본다.
빙긋 웃으며 고추장 튜브를 꺼내 스파게티 위에 뿌렸다.
김치는 못 챙겼지만 고추장은 넉넉하게 준비했다.
스슥 비며 스파게티를 맛봤다.
상당히 괜찮았다.
스튜가 없는 게 아쉬웠지만 포도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그거 코리안 핫 소스지?”
비비안이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거침없이 포크로 고추장이 묻어 있는 스파게티를 말아 입으로 가져갔다.
“와우!”
고추장 스파게티에 비비안이 깜짝 놀랐다.
급히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그거 줘봐.”
고추장 튜브를 가져가 자기 스파게티 위에 뿌렸다.
“안 매워?”
“매운데…… 묘한 중독성이 있어. 살짝 뿌리면 좋을 것 같아.”
비비안도 미식가였다.
한국 고추장의 맛을 적당량 스파게티에 세팅했다.
“샐러드도 먹어봐.”
“완전 죽음이야~. 다니엘~ 나 네가 너무 좋아~. 으흐흐.”
저 음흉한 웃음은 도대체 뭘까?
그렇게 비비안과 센 강을 바라보며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평일이라 캠핑족이 많지 않았다.
“끄읍.”
비비안은 배부르게 먹고 트림까지 했다.
입을 손으로 가리고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오늘 처음으로 본 비비안의 여성스러움이다.
“다니엘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민망한지 배시시 웃는다.
“맛있어서 다행이네.”
비비안이 없었다면 대충 빵으로 때웠을 것이다.
넉넉하게 조리했던 스파게티와 샐러드가 바닥이 났다.
구입했던 빵들 중에서도 반절의 양이 사라졌다.
“내가 설거지 할게.”
비비안은 구김살이 없었다.
“고마워. 그럼 난 한국식 진한 커피 타줄게.”
“기대할게.”
비비안이 그릇을 들고 사라졌다.
기본 예의가 있다.
그 사이 물을 끓였다.
주전자 작은 구멍으로 김이 뿜어져 나왔다.
“상쾌해~.”
깨끗하게 그릇을 씻고 나타난 비비안은 뭔가 해냈다는 뿌듯한 표정이다.
“깨끗하네?”
“그치? 설거지 처음 해봤는데 생각보다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세상에 저 나이에 설거지 처음이란다.
“귀하게 컸나봐?”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가 절대 부엌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어.”
비비안, 엄마가 없었다.
“마셔봐.”
물을 따라 봉지 커피 두 개를 타서 건넸다.
도 회장님 만난 이후부터 밤에는 믹스 커피가 땡겼다.
“뭐야? 크림 커피야?”
“정확한 명칭은 크림 설탕 커피.”
“와우! 이것도 재밌어!”
맛있다는 말보다 재미있다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프랑스 여행 첫 날부터 이벤트가 발생했다.
낯선 여인과의 낯선 동행.
같이 밥을 먹고 술과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커피 마시는 프랑스 여인이 눈앞에 있다.
고개를 돌리던 그녀와 눈이 맞았다.
“다니엘~.”
“응?”
“나 잘 때 무서운데…… 텐트에서 같이 잘 거지?”
“푸우우웃!”
너무 순수하게 묻는 비비안의 말에 입에 물고 있던 커피를 뿜었다.
초밥 테러에 이어 두 번째 당하는 이 당황스러움!
서울이나 파리나 요즘 여성들 왜 이렇게 센지 모르겠다.
역시 집 밖은…… 언제나 위험했다.
***
“닦아.”
비비안은 손수건을 건넸다.
“고마워.”
“우리 사이에~.”
“…….”
동양남자들이 보수적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줄 비비안은 몰랐다.
농담이었다.
비비안도 낯선 남자와의 여행은 처음이었다.
학교생활 말고 남자와 이렇게 길게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엄마가 신의 품으로 돌아간 그 날 이후 수녀원이 개설한 학교에서 생활했다.
대대로 내려오는 귀족 가문의 명예를 아빠는 21세기에도 소중하게 여겼다.
그리고 비밀리에 전수되는 기사단장이라는 직함을 목숨처럼 따랐다.
알지 못하는 적에 공격당할 수 있다는 말에 언제나 보디가드들을 대동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에야 약간의 자유를 맛봤다.
이후 맛본 자유는 미칠 듯 더 목말랐다.
친구들과 밤새 와인도 마시고 파티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문 위신과 명예 때문에 비비안은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살았다.
박물관 견학을 핑계로 탈주를 감행했다.
주차장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만한 차량을 물색했다.
마음속으로 엄마께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유롭고 평범하게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이다.
그때 이 남자가 나타났다.
콧노래를 부르며 차에 타던 그의 옆자리에 재빨리 올라탔다.
경호원들에게 들킬 뻔한 그 순간 엄마가 보낸 천사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파리를 빠져나왔다.
오는 동안 나름 그를 살폈다.
다니엘은 유쾌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안심이 되고 그에게 빠져들었다.
아는 지식도 많았고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했다.
프랑스어가 통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좋았다.
요리도 잘 했다.
그와 있는 동안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손에 차고 있는 시계를 두 번 누르면 당장 위치추적기가 가동된다.
10분이면 유럽 어디에서든 비비안의 안전은 보장된다.
하지만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비비안, 침낭에서 자면 푹신할 거야.”
유혹에도 넘어 오지 않았다.
“잘 거야?”
비비안은 괜히 서운함을 느꼈다.
“내일 운전해야지.”
“그래 그럼…….”
비비안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니엘의 뺨에 비주 인사를 남겼다.
친밀감의 표시.
남자가 살짝 몸을 떨었다.
“우리 바다 보러 가자…….”
비비안이 남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얼굴이 떨어졌다.
마주치는 눈빛.
비비안은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이렇게 활짝 웃고 있었다.
그것도 낯선 한 남자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