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회귀의 전설
192장. 동행 (1)
“위치 추적기는?”
“꺼져 있습니다.”
“찾아! 세상에 아가씨를 잊어버리다니! 눈은 뜨고 다니는 거야!”
“죄송합니다. 코린 경.”
“죄송한 건 아가씨를 찾고 이야기하라고! 지금 아사신의 개들이 사방에 깔렸다. 놈들이 이 사태를 알면…….”
“…….”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 16구의 대저택.
대화가 급박하게 오고 갔다.
“DST(프랑스 첩보기관)을 이용해도 돼! 아직 파리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CCTV를 풀로 돌려서 찾아!”
“알겠습니다.”
가문의 집사이자 기사인 코린의 말에 경호원 책임자가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단장님이 출타 중에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코린의 이마 주름이 깊게 파였다.
언제나 통통 튀던 가문의 막내 아가씨가 드디어 탈주에 성공했다.
프랑스 제 4 대학인 소르본에 입학한 후부터 자유를 부르짖던 그녀.
철저하게 감시해 왔는데 틈을 타 철창을 떠났다.
지금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부활한 아사신의 후예들이 기사들을 노렸다.
훈련받은 용병들 10명쯤은 가뿐하게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아사신.
그들의 타깃이 될 첫 번째 대상은 기사단장의 딸이었다.
지금쯤이면 이곳의 소식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최대한 빨리 안전하게 집 나간 아가씨를 찾아내야 했다.
집사 코린에게 울타리를 벗어난 아가씨는 친딸과 다름이 없었다.
***
“이것도 필요하지 않아? 통후추가 풍미가 훨씬 좋아~.”
딸깍.
말과 함께 신이 난 루브르 고양이는 후추를 담았다.
“어머! 밀카 초콜릿이네~.”
그리고 초콜릿도 카트에 추가 됐다.
“가끔 야영한다고 했지? 그럼 텐트도 필요하겠네!”
“저기 비비안…….”
“비비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나이도 같은데 친구끼리 그러면 못써.”
“…….”
비비안의 말에 그녀를 다시 봤다.
여기는 믈렁시의 동네 마켓이다.
다행히 오늘은 야간 늦게까지 오픈 하는 날이란다.
루브르에서 만난 고양이의 파리를 벗어나 달라는 말에 차를 몰았다.
쫓아오던 남자들과 그녀의 다급함에서 본능적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한참 달려 믈렁이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그제야 그녀는 긴 한숨을 쉬었다.
왜 쫓기느냐고 묻자 그녀가 당당하게 말했다.
가출이란다.
헐!
혹시 몰라 미성년자인지 확인하자 파리 4대학에 다니는 성인이었다.
신분증을 보여줬는데 확실했다.
생년이 나와 같았다.
바로 친구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목적지가 어디냐 물었다.
배낭여행 중임을 밝혔다.
같이 가잖다…… 세상에!
한국이었다면 이거 난리 날 일이다.
갑자기 주차장에서 출발 직전 차에 탄 가출 여자 성인.
낯선 남자 여행자와 함께 여행을 한단다.
누가 봐도 그녀의 말이 정상일 수 없었다.
나도 남자라고 믿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박물관을 좋아하는 남자치고 악한 남자 없단다.
독특한 사고방식을 소유했다.
평범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입을 다물고 한참 창밖을 응시하던 옆모습은 시크하기 그지없다.
날렵한 눈썹 아래 자리 잡은 깊숙한 눈동자는 이중적 색감을 띤다.
연녹색과 연푸른색이 불빛에 따라 신비롭게 반짝였다.
콧날은 준수했다.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도톰하고 붉은 입술은 라인까지 예뻤다.
모자를 벗자 대충 흐트러진 금빛이 살짝 섞인 진갈색 머리칼이 쏟아져 어깨를 덮었다.
그 모습에 담배 하나 물면 평소 상상했던 프랑스 여성의 정석이 된다.
자유롭고 독특한 성격에 거리낌이 없는 행동과 외모에 말투까지.
그런 그녀와의 동행이 당황스럽다.
“다니엘. 큰 사이즈는 필요 없을 것 같아. 2인용이 적당하지?”
뭐 어쩌자고!
텐트를 둘러보며 웃는 그녀의 미소가 아이처럼 순박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상한 상상을 하는 내가 병자 같았다.
“꺄악! 브리치즈다!”
종잡을 수 없는 비비안은 갑자기 치즈 코너를 향해 달렸다.
프랑스인에게 치즈는 향수보다 더 귀한 친구라 누가 그랬던가.
치즈 매장 옆에 빵도 보였다.
저녁 식사용으로 갓 구워낸 바게트 냄새가 영혼을 홀렸다.
꼬로록.
배가 고팠다.
정신없이 도주하다 보니 밥시간을 놓쳤다.
외국에 나오니 배꼽시계가 더 정확해진 것 같다.
마켓 안에는 먹거리가 많기도 많았다.
직접 만든 샐러드와 올리브 절임, 라자냐 따위도 한 쪽에 보였다.
싱싱한 포도와 각종 과일도 입맛을 자극했다.
특급 호텔에서 편하게 머물며 즐길 수도 있지만 또 이 맛에 여행하는 것 같다.
비비안이 치즈를 고르는 동안 바게트와 크루아상 빵을 샀다.
무게를 재서 파는 샐러드도 두 개 가득 담았다.
포도와 방울토마토도 구입했다.
약간의 야채와 소스, 올리브유도 담았다.
“고마워요. 잘생긴 총각.”
“많이 파세요.”
프랑스어가 되는 동양 총각에게 다들 호의를 보였다.
요즘 잘 나간다고 엄청 무게 잡는 크리스 반스데일이 괘씸했지만 능력 하나는 잘 구매했다.
“다니엘~ 이 치즈 먹어봐. 정말 맛있어.”
프랑스 여자도 손으로 뭘 먹여준다.
돈도 하나 없이 가출한 여인이 당당했다.
내게서 받아간 유로를 잘도 썼다.
그래도 치즈는…… 맛있다.
“정말 저렴해. 한 덩어리에 100유로 밖에 안 해.”
현재 환율로 13만 원이다.
그게 저렴하단다.
보통 집 딸이 아님을 짐작 가능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래? 엄청 싸네~.”
물론 나도 평범한 집 아들은 아니다.
“그렇지? 그래서 두 개 구입했어. 조금만 더 가면 근사한 야영장이 있대. 샤워시설도 좋고 안전한 곳이래.”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물어왔다.
스마트 폰이 없던 시절에는 다들 이렇게 직접 물어 정보를 얻었다.
“와인만 한 병 구입해서 가자.”
“그래~. 나 배가 고파서 배가 등에 붙었어.”
활짝 웃는 비비안, 이 낯선 동행자.
워낙 날씬해 처음부터 배가 등에 붙어 있었다.
왜 계속해서 주변에 이런 미녀가 꼬이는지 모르겠다.
돈 많은 남자에게는 법칙처럼 여성들이 꼬인다 하지만 여기는 프랑스다.
미국에서야 블랙 카드가 위엄을 보였지만 이곳에서는 배낭 멘 이방인이다.
프랑스가 개방적인 곳이라지만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없을 수 없다.
비비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안도의 표정이 엿보일 정도다.
“샤또 발랑드로야! 으힛! 득템!”
나이가 어리긴 어렸다.
게임 용어를 사용하는 걸 보면 한 게임 한 것 같다.
“보르도 와인이네.”
“어? 이 와인 알아?”
알다 못해 빠삭하게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
“2005년도 산이네. 출시가가 165유로야.”
“와우! 그런 것도 알아?”
“와이너리 투어도 이번 여행 목표라고 했잖아.”
“멋있어. 다니엘~.”
비비안이 하트 뿅뿅을 날린다.
이제 만난 지 하루다.
아무리 빨라도 이건 아니다.
카사노바 형님이 나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이 생각났다.
형제에게서 동지의 향기가 난다…….
이제 점점 부정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와인까지 구매해서 차에 실었다.
예기치 않은 동행으로 짐이 늘었다.
신분증 말고는 돈도, 옷을 비롯해 일체 아무것도 없는 비비안.
가볍게 입을 추리닝 세트도 구입해줬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미녀는 몸빼 바지도 어울린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평범한 동네 추리닝 패션이 모델급으로 승화 됐다.
평소 관리 받은 듯 피부도 정말 깨끗했다.
“으아아아! 자유다! 자유!”
뭐가 저렇게 좋을까?
차에 타면서도 그녀는 자유를 외쳤다.
창문을 열었다.
그녀는 내비게이션에 캠핑장 주소를 찍었다.
프랑스 여름은 낮 기온이 25도를 넘지 않았다.
습도도 적당해 한국의 시원한 5월 같았다.
여행하기 딱 좋은 계절이었다.
차를 출발했다.
“다니엘. 그런데 프랑스어를 어쩜 그렇게 잘해? 프랑스에서 살지 않았지?”
일찍도 물어 본다.
“취미로 배웠어.”
친구 먹고 말이 편해진 부분은 좋았다.
“오늘 이 아름다운 인연을 허락한 에르스 신께 찬사를~.”
프랑스 문학과 비교문학이 전공이라는 비비안은 말투가 꽤 과장됐다.
그렇다고 듣기 거북하지는 않았다.
프랑스도 이 시기가 방학 기간이다.
그녀도 나처럼 잠깐의 자유로운 삶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말하는 폼과 행동으로 보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100유로를 동네 껌값으로 아는 그녀가 보통 사람일 리 없었다.
“집에 안 돌아갈 거야? 부모님 걱정하시지 않아?”
동갑이지만 내심 걱정이다.
이번 유럽 배낭여행은 철저하게 혼자 느껴보는 세상이 주제였다.
일탈과 가출은 짧을수록 좋았다.
그 점에서 비비안이 걱정스러웠다.
그녀의 미모라면 누가 납치를 꿈꿔도 이상할 게 없었다.
겁도 없는 프랑스 여인 같으니라고!
나 같이 셀프 철벽 방어 전문가 아니라면 큰일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다니엘. 운명은 우리 행위의 절반을 지배하고, 다른 절반은 우리 자신에 맡겼다고 존경하는 마키아벨리 님이 말했어. 그러니까 이렇게 엮인 인연 소중하게 알고 우리 쭉 행복한 여행길을 걷도록 하자~. 친구.”
비비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행길이 나쁠 것 같지 않았다.
비비안은 유쾌했고 지적이다.
언제 이런 프랑스 미녀를 만날 수 있겠는가.
“배고픈데 나 빵 먹을 거야.”
고소한 바게트 빵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비비안은 빵을 뜯어 먹었다.
“아~ 해봐.”
그리고 내 입에도 친절하게 고소한 빵 한 조각을 물려줬다.
반려 동물도 아닌 데 요즘 들어 손가락 끝으로 받아먹는 재미를 알아버렸다.
그것도 여인들과의 유쾌한 식사 시간.
바람둥이라 욕해도 할 말 없다.
은연중에 노바 형님과 연결된 이상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했었던 바다.
봉인이 풀린 남자의 세계.
그냥 비비안 말대로 운명에 맡겨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뭐래도 난 스무 살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팔팔한 청춘이었다.
***
“성에 사는 파랑새가 새장을 나갔다고?”
“그렇습니다. 장로님.”
“알라께서…… 복수의 기회를 허락하셨도다. 알라후 아크바르!”
“알라후 아크바르!”
신을 위해 바치는 향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지하 모스크.
눈이 먼 장로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신을 찬양했다.
그 아래 부복한 자들도 같은 자세로 경배했다.
“피의 전사들을 보내라. 기사단의 이방인들에게 똑똑히 보여라. 우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라! 위대한 성전이 끝날 때까지 우리의 피는 계속 뜨겁게 흐를 것이다! 결코 같은 하늘에서 그들과 살 수 없음을 증명하라!”
복수심 가득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알라후 아크바라!”
다시 외쳐지는 주문.
시리아의 어느 골짜기, 차가운 지하 석실에서 살인 명령이 하달 됐다.
그리고 피의 전사들은 빠르게 새장을 벗어난 파랑새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지금 파랑새가 어느 나무 어느 가지에 앉아 쉬는지 알지 못한 채…….
아사신의 전사들이 전쟁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