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1,284)

 # 190

회귀의 전설

190장. 그녀의 초밥

2008년 7월 10일. 새벽 05시 20분.

뉴욕상업거래소.

1872년 뉴욕 버터, 치즈 거래소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여 1983년 원유 선물거래를 시작해 전 세계 원유 선물의 67프로를 소화하는 거대 선물거래소가 됐다.

니멕스(NYMAX)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뉴욕거래소는 평일과 다름없이 조용했다.

“오늘도 오일들 최고가 찍을까?”

“미친 거 아냐? 지금도 최고간데…….”

“저 미친 핏트레이드 놈들 봐. 내일 지구 해가 뜰 거라고 확신에 차 밀고 있잖아.”

“머저리 같은 것들.”

“아우! 그래도 빌, 우리는 선방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아. 이러다 한 방에 훅…….”

“생각만으로 끔직하다.”

거래소 중앙 타원형 플로어를 바라보며 야간 거래를 끝낸 트레이더들이 2층에서 커피를 마시며 피곤을 달랬다.

세계 경기 위험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는 와중에 원유를 비롯한 원자재들은 미친 듯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트레이더들도 대부분 짐작하고 있었다.

이 위험한 버블이 곧 폭발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총대를 메지 않았다.

자기만 아니면 됐다.

전쟁터에서는 언제나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었다.

“데이빗, 그런데 얼마 전부터 흐름이 이상하지 않아?”

“뭐가?”

“가격은 오르는데 매물을 교묘하게 바꿔치기 한다는 느낌이 들어.”

“빌, 너도 느꼈어?”

“너도?”

“아무래도 새로 들어온 트레이더 놈들이 문제인 것 같아. 1년 사이 놈들이 한 짓은…….”

“개미 떼들 같았지. 한 번 물고 늘어지면 반드시 승리를 거뒀어!”

“젠장……. 이 바닥 돈을 놈들이 다 쓸어가는 것 같아.”

트레이더 빌과 데이빗은 부러운 시선으로 한쪽을 바라봤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신흥 트레이더들이 보였다.

솔로 트레이더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한 몸체 같기도 했다.

사실 그들 각자가 서로에 대해 잘 몰랐다.

그렇지만 승률은 엄청났다.

“8월물 146 매도!

“8월물 146 매수!”

“9월물 146.5 매도!!!”

“오케이! 던(done)!"

그 때 갑자기 선물시장 플로어가 시끄러워졌다.

대개 이 시간쯤이면 한풀 꺾여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한쪽에서 시작된 함성이 피곤한 자들을 깨웠다.

“10월 146. 매도!”

“콜! 던!!!”

“146.3 매도!!!”

“매수!!!”

“뭐야! 미친 거 아냐?”

“어디 전쟁이라도 났어? 미친놈들 왜 저래?”

갑자기 플로어가 화끈 달아올랐다.

전쟁이나 9.11 테러 같은 큰 사건이 아니라면 08시 폐장을 위해 조용히 흘러가야 할 타이밍에 불이 붙었다.

냄새를 맡은 핏트레이더들이 개떼처럼 달라붙었다.

핏 하나에 수십만 불의 이익이 움직였다.

눈이 충혈된 하이에나들이 전쟁터에 뛰어 들었다.

“매수!!!”

“콜!!!”

“올던!!!”

광인들이 전광판을 보고 미친 듯 주문을 냈다.

헤드셋을 통해 지시를 받았다.

“으아아아아아!”

흥분을 참지 못하고 사방에서 괴성이 터졌다.

요 근래 없었던 물량이 폭발했다.

“왜, 왜 이래?”

“비상이야! 비상!”

트레이더들 중 한 무리가 멍청해졌다.

비정상적인 에너지에 중독된 마약꾼들처럼 서로 치고 받기 바빴다.

거래 금액이 순식간에 백억 달러를 넘었다.

뉴욕 상업 거래소뿐만 아니라 시카고 상품 거래서에서도 불이 났다.

원유로부터 시작된 불길이 식량과 광물 시장에까지 번졌다.

팀장 트레이더들이 뉴스 속보를 보거나 아는 곳에 전화를 돌렸다.

몇 년 동안 없었던 광기가 줄 파장에 피가 말랐다.

틱들의 변화가 몇 단계를 훌쩍 넘었다.

“8월물 145.9 10개 매도!”

“더어어언!!!”

그리고 폭풍은 미친 듯 휘몰아쳐 트레이더들의 혼을 쏙 빼갔다.

***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시원한 광소가 터졌다.

뾰족하게 솟아오르던 붉은 깃발이 절벽을 향해 고개를 떨궜다.

세상 물정 모르던 오일의 목을 내가 벴다.

하루만 지나면 시작될 운명의 디데이를 바꿨다.

짜릿했다.

혹시 모를 나비효과를 대비해 정교하게 매매 프로그램을 세팅하고 로버트에게 지시를 내렸다.

“미국식 히어로? 엿이나 드셔~.”

도도희가 말했던 연방 준비 은행의 수순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히어로가 되어 세상을 구한다는 식상한 스토리를 꿰뚫고 있다.

히어로가 나올 판을 깔아줬다.

세상이 망한다 울부짖을 때 히어로가 프린트 된 달러를 하늘에서 뿌린다.

못 받아먹으면 3대 바보 인증이다.

오늘도 제대로 빨았다.

브렌트 오일이 고개를 처박는 순간부터 총성 없는 전쟁의 2막이 울렸다.

모든 선물과 옵션을 강력 매도에 맞췄다.

콜을 매도하고 풋은 매수했다.

정확히 통계를 내지 않았지만 로버트와 비밀 법인을 통해 요즘 한 달간 수익이 1,000억 달러가 넘었다.

그래 봐야 로스트 차일드 가 재산에 비하면 발톱의 때다.

“링 위에 다들 올라와봐!”

쫄지 않았다.

투지가 화르르 끓어올랐다.

로스트 차일드 가도 다른 세력들과 전쟁 중이다.

그들도 미래를 설계할 뿐이지 지배는 못했다.

빈틈은 그래프로 드러났다.

오직 나만 안다.

“수천억 달러 벌면 뭐하노. 미래에는 기업들 가치가 1조 달러 넘는 놈들이 수두룩한데.”

개인에게 엄청난 자금일지 몰라도 미래 가격을 따져보면 아니다.

2020년 애플과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알리바바, 인텔, 텐센트 등이 시총 1조 달러를 넘봤다.

IT 업계는 처절한 승자독식 게임으로 몸을 불린다.

패배한 자는 쓴 잔을 마시고 인수합병에 도장을 찍었다.

강한 자만이 모든 걸 지배했다.

종자돈이 많이 필요했다.

현물과 선물이 폭락하는 7월을 기점으로 세상은 격변에 돌입한다.

그 동안 축적했던 자본을 풀 때가 다가왔다.

스마트폰이 출시된 이후로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변화한다.

4차 산업을 선점하기 위해 기업 리스트를 쫙 뽑아 놨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국대학교 입학까지가 서론이라면 이제 인생 본론에 들어갈 시점이다.

스르륵.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국은 새벽을 향해 달려갔지만 한국은 지금 저녁에 접어들었다.

낮이 길어졌지만 찾아오는 밤을 이길 수 없었다.

도로 위로 길게 늘어진 차들이 평화롭다.

몇 달 후면 제2의 IMF를 맞이했다며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다.

미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여유로움이 낯설었다.

과거였다면 나도 저들처럼 오늘 밤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재수학원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저녁을 먹고 PC방 한 번 들렀다 독서실에 갔을 시간이다.

그렇지만 이번 생은 완벽하게 달랐다.

주변 인연들이 나로 인해 수없이 운명이 바뀌었다.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들, 조 변호사님을 비롯해 로버트까지 변화의 범위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안아 그룹은 이 당시 위기를 극복하고 당당히 재벌 서열이 상승했다.

그러나 현재 안아 그룹과 오 회장 일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이 모르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후우웁.”

길게 숨을 들이켰다.

갈수록 어깨가 막중했다.

이웃집 개들만 때려잡으면 될 줄 알았는데 얽히고설킨 줄들이 많았다.

그들도 나도 실체를 파악 못한 채 전쟁터에 던져졌다.

이 밤 지구 반대편에서 이 시장이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다들 핸드폰에 화음을 넣지만 음질이 편치 않아 평범하게 다녔다.

그런 녀석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 대표님~. 뭐 하세요?

도도희 상무다.

“이제 퇴근하려 합니다.”

- 그럼 같이 저녁 먹어요.

도도희도 독특한 캐릭터다.

어제 ‘혹시….’라 말하며 나를 긴장시키던 도도희는 엉뚱한 말을 뱉었다.

정체가 뭐냐고 묻더니 다음 질문이 걸작이었다.

혹시 여윳돈 있으면 자신에게 투자를 해 달란다.

삼룡 같은 망해가는 자동차 회사보다 자신에게 투자하면 몇 배로 불려준다는 어이없는 말을 뱉었다.

공대 누나 슈퍼컴퓨터 이후 오랜만에 당황스러웠다.

미래를 보는 자신의 예지력을 높이 사달란다.

어이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예지력이지만 난 미래를 찍고 왔다.

수배가 아니라 수십 배도 더 벌 수 있는 나를 꼬드기려 했다.

단칼에 거절했다.

먹고 죽으려고 해도 돈 다 떨어졌다 뻥카를 날렸다.

아버지가 어릴 적 친구 보증 섰던 문제로 집이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말했다.

절대 아는 사람하고는 돈 거래 하는 거 아니라고 말이다.

물론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아는 분에게 돈을 빌려줬고 또 날렸다.

그런 나에게 투자금을 빌려 달라고?

어림없는 소리다.

“돈 빌려달라는 소리라면 사양합니다.”

“치잇! 돈도 많은 분이 왜 그래요? 1,000억도 안 돼요?”

“네버!”

“와아아아. 진짜 짜다.”

“도 회장님에게 말씀하세요. 그깟 1,000억.”

“……아버지 개털이잖아요. 알면서~. 으흐흐.”

도도희의 웃는 모습이 상상됐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

미녀들이 머리까지 좋을 때는 조심해야겠다고 이번 생에 뼈저리게 깨달았다.

- 대표님~ 밖으로 나오세요. 초밥 먹어요.

“네?”

대표실 밖에 불이 켜졌다.

유세라 팀장이 퇴근한 후였기에 올 사람은 하나다.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끊었다.

도도희의 매력은 무궁무진했다.

“길 건너편 초밥집에 갔다가 대표님 생각나서 사 왔어요. 저 잘했죠?”

도도희가 웃는다.

새하얀 피부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그녀와 잘 어울렸다.

보는 거 자체가 유혹이다.

“도도희 씨. 우리 짚고 넘어 갑시다.”

초밥을 탁자 위에 오픈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뭘 짚어요?”

“도 회장님이 주문했습니까. 제가 미인계에 약할 것 같답니까?”

확 들이댔다.

야심한 밤에 초밥 들고 오는 여자 위험했다.

초밥 옆에 소주는 왜 있는 거야!

“제가 두려워요?”

그 정도는 아니다.

다만 요즘 들어 내가 날 못 믿었다.

“대표님~ 쉬운 남자 아니라는 거 다 알아요. 대부분 이 정도 꼬리치면 넘어오는데……. 대표님 의외로 철벽이잖아요.”

아니다. 나 쉬운 남자다.

다만 여자가 무섭다.

“세라 언니 말로는 대표님 다음 주에 휴가라던데…… 유럽 가는 거예요?”

도도희가 갑자기 대화 주제를 바꿨다.

유세라 팀장에게 유럽 항공권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걸 알아낸 것 같다.

“배낭여행 계획 중입니다.”

대학생 시절에 그 맛이 최고점이라는 배낭여행.

위시 리스트 중 하나다.

“그럼 대표님…….”

젓가락으로 초밥 한 점 집어 나에게 건네는 도도희.

못 이기는 척 초밥을 받아먹었다.

이런 서비스 처음이다.

미모의 여성을 직원으로 둔 보람이 넘쳤다.

행복 그까짓 거 별거 아니다.

“그 여행 저와 같이 가실래요?”

“컥!”

갑작스런 도발에 초밥이 목에 탁 걸리기 전까지…….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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