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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92)화 (92/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92화

복지의 수혜는 비체라발리에게 봉사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야 비체라발리의 기사가 선망받는 직업이 될 테고, 다들 기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을 테니 말이다.

“그 일을 그대가 도와주었으면 좋겠어요. 같은 생각을 지닌 지질학자가 있다면 모두 데려와도 좋아요. 물론, 다시 면접을 봐야겠지만요.”

“그럼, 정말로 제가 지원을 받게 된 겁니까? 다른 두 사람이 아니라, 제가요?”

레이블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만 지원하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예?”

“굴러 들어온 자원을 썩힐 수는 없잖아요.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한 명만 고르라는 법도 없으니 전부 지원해 주기로 했어요.”

직접 만나 보고 나서 알았지만, 레이블라가 처음 찾으려고 했던 사람은 눈앞의 세 번째 지질학자가 맞았다. 그가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기 위해 가져온 문서에는 지질학 외에도 도시 생태학, 기상학 등 다양한 학문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이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뛰어난 인재라는 건 일찍이 알았지만, 앞선 두 사람도 나름의 성과가 있는 인재였다. 그래서 그냥 다 함께하기로 했다.

인재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아! 그리고 일주일에 세 번은 수업을 해 줘야겠어요. 학생은 비체라발리 소공자예요.”

그 제안에 하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많이 놀란 듯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 제가 말입니까? 소공자님의 스, 스승이 되라고요?”

“네. 사실 이쪽이 제일 중요한 일이에요. 무려 차기 가주의 교육이니까요. 공작님께서도 허락하셨으니 잘 부탁해요!”

레이블라는 원래의 목적이었던 로이안의 교육에 관해 조금 더 설명했다. 그에게 어떤 과목을 가르쳐야 하고, 수업은 언제였으면 좋겠다고.

작은 아이가 마치 학부모라도 된 듯 말하자 하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당황한 듯, 놀란 듯, 혹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설명을 마치고 나서 레이블라가 다시 물었다.

“또 궁금한 점이 있나요?”

“어, 없습니다…….”

조금 얼떨떨한 반응을 비치는 그에게 레이블라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즉시 그에게 종이를 내밀며 명령했다.

“그럼 이제 서명하세요.”

넌 이제 내 거다, 라는 속마음을 감춘 채 호기롭게 웃으면서.

* * *

“내 스승님이 될 사람을 찾던 거 아니었어?”

세 사람 모두 제각기 역할을 맡긴 채 돌려보내자, 지켜보고 있던 로이안이 의문을 품었다. 레이블라는 드래곤의 손에 간식을 쥐여 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퍼에게 부탁했어. 일주일에 세 번 수업을 하기로 했어.”

“세 번?”

“응. 이르지만 로이안의 교사를 과목별로 나눌까 해서. 로이안은 뭐든 빨리 익히는 편이니까 한 사람에게 한 가지 의견을 들으며 교육받는 것보다,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과목별로 교사를 둘까 해. 아빠와도 상의했어.”

“그래서, 교사는 정했어?”

“물론이지. 앞으로 더 데려올 거야. 헤넌의 추천 리스트를 보고 나도 의견을 보탰어. 최종적으로는 아빠가 결정했어.”

지금은 셋이지만 로이안의 학문 깊이가 조금 더 깊어지면 그때 또 교사를 늘릴 예정이었다. 그날을 위해 레이블라는 미리 수도에 있을 때 교사를 모집해 둘 생각이었다. 인재는 역시 수도에 많으니까.

‘하지만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

좋은 사람은 이미 황녀가 선점해 간 터였다.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소문으로만 가늠하며 조사하기에는 막막했다.

‘펠리시티가 왜 교육에 힘썼는지 알겠어.’

어째서 펠리시티가 그토록 인재 양성과 관리에 목을 맸는지 ‘제대로 된 사람’을 찾기 시작하면서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비체라발리를 위해 무언가 하려고 할 때마다 그에 맞는 사람을 찾고 섭외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게다가 찾는다고 해서 모두 함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황제의 견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면 학교를 세우는 것부터 알아봐야겠다.’

당연히 교육 대상은 평민이었다. 귀족에겐 황실에서 운영하는 제국 학술원이 있으니 인재를 두고 황실과 실랑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황실과의 인연, 황실 학술원이라는 타이틀을 포기하고 머나먼 비체라발리 영지에 올 것 같지도 않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하지만, 기다려 줄 수 있어.’

10년이 지난다고 해도 로이안은 20살이었다. 지금 뿌린 씨앗을 충분히 이용하고도 남을 나이였다.

“렐이 가르쳐 줘도 충분하지 않아? 다 알잖아.”

“내가 알아 봤자 얼마나 알겠어. 같은 학문을 30년 40년 보고 익힌 사람들이 더 잘 알지.”

로이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무어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타이밍 좋게도 그의 말을 가로막는 사람이 등장했다. 수도 저택의 집사장이었다.

“아가씨.”

그가 다급히 다가오더니 말을 이었다.

“황궁에서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어제 보낸 서신에 대한 답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레이블라가 응접실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황궁의 사자가 서신을 건네었다. 꽃무늬가 들어간 봉투였다.

그 자리에서 밀봉된 봉투를 열자 은은한 향기가 피어오르는 편지지가 나왔다. 편지지 사이로는 몰래 숨겨 둔 듯한 카드 하나가 있었다.

황녀의 편지였다.

그 내용은 기꺼이 방문을 허락하니 당장 내일 만나자는 것이었고, 작은 카드에는 그녀가 ‘홀로’ 방문하기를 ‘명령’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카드는 황녀가 보낸 것이 아닌 듯했다.

이름 대신 새겨 넣은 화려한 금빛 문양의 인장 덕에 카드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바로 황제였다.

* * *

“이쪽으로 오십시오.”

마차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황궁의 시녀가 자연스러운 태도로 레이블라에게 인사를 건넨 후 정중하게 안내를 시작했다.

레이블라는 보폭이 좁은 제 걸음에 맞추며 천천히 이동하는 그녀를 따라 내부로 향했다. 조금씩 조금씩 안으로 들어갈수록 지극히 화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여전하네.’

그녀가 있는 장소는 황궁, 약 넉 달 만에 찾은 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혼자 가겠다고?’

서신을 확인하고 나서 레이블라가 내뱉은 말에 로이안이 미간을 찡그렸다.

‘안 돼. 너 혼자 보낼 수는 없어.’

‘전하를 뵙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게 아니라……! 렐, 너. 거기서 힘들게 생활했잖아.’

‘우리 오라버니. 내 걱정했어?’

‘그럼 당연하지! 그런 곳에 널 어떻게 보내. 절대 안 돼. 갈 거면 나도 같이 가. 저기 저 빨간 도마뱀도 가고 싶어 하잖아.’

로이안이 평소답지 않게 완강한 태도를 고수했지만, 레이블라가 앞으로 일주일간 로이안의 검술 훈련에 가 주기로 약속하면서 혼자 올 수 있게 되었다.

대신 샬럿을 옆에 꼭 끼고 있겠노라 약속해야 했지만.

“아가씨. 풍경이 여름 같아요.”

이미 잎이 떨어지는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황궁은 여전히 여름인 듯 눈에 닿는 곳곳이 초록빛으로 싱그러웠다.

“황궁 주변은 다른 곳과는 달리, 봄과 여름이 길고 가을이 짧대. 마법 때문이라던데. 신기하지?”

“네. 그럼 겨울은 어때요?”

“글쎄. 나도 봄과 여름밖에 나지 않아서. 다음에 오라버니가 황궁에 오게 되면 알려 달라고 하자.”

앞으로 로이안은 황궁에 올 일이 많아질 예정이었다. 사업도, 연애도 모두 황궁에서 할 테니까.

샬럿과 대화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황녀의 궁이 가까워졌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황녀의 직속 시녀로 함께했던 엠마였다.

“황녀 전하의 직속 시녀인 엠마 루인입니다. 황녀 전하의 궁부터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레이블라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후, 이곳까지 데려온 시녀에게 눈짓했다. 그러고는 앞서 걸어 나갔다.

“황녀 전하께서는 지금 수업 중이십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괜찮아요, 엠마.”

그것보다…….

“잘 지냈어요?”

작은 발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며 레이블라가 서글서글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이에 눈을 홉 뜬 그녀가 잠시 토실토실한 아기 토끼라도 본 것처럼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정중하게 답했다.

“예, 저는 잘 지냈습니다. 공녀님.”

“엠마가 좋아한다고 했던 디저트를 가져왔어요. 좀 있다가 제 하녀에게서 받아 가세요. 넉넉하게 사 왔으니까 같이 먹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이라면 발랄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처럼 반응할 그녀가 어쩐 일인지 딱딱했다. 말투와 태도에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당연한 일이겠지.’

과거에는 이 궁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제국에 유일한 공작가의 공녀였다. 대하는 태도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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