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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91)화 (91/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91화

    * * *

    수도로의 여정에는 꼬박 4주가 걸렸다.

    꽤 긴 시간이었지만, 레이블라와 로이안은 정말로 알차게 시간을 보내었다.

    레이블라는 미리 부탁받은 대로 로이안에게 경영학과 수학, 회계학 공부를 도와주었고 때때로 먼 미래에 황녀와 함께 춤을 출 로이안을 위해 사교 댄스 연습도 했다.

    로이안은 쉼 없이 공부를 하면서도 마차가 멈추는 점심, 저녁때가 되면 항상 아이던과 함께 검술 훈련을 이어 갔다. 이전보다 검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해진 만큼, 검술 훈련은 매우 거칠게 진행되었다.

    당연히 레이블라는 약속한 대로 그의 곁을 지키며 오늘은 무엇이 좋았는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매일같이 설명해 주어야만 했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대단한 드래곤님이 어찌나 까탈스럽게 구는지, 하루에 22시간을 자고 딱 2시간 일어나 있는데, 떼어 놓으려고 하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따로 없었다.

    갓난아기처럼 징징대는 터라 한 번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풀숲에 내려 놨더니 섭섭했는지 일대를 태워 먹을 뻔한 적도 있었다.

    기껏 돌연변이 도마뱀이라고 속여 놨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정체를 들킬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유해 동물이라 아무 곳에나 풀어놓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다음에 마탑주를 만나면 다시 드래곤 레어에 놓고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야외에서 매일 지내다 보니 고단한 면도 있었지만, 마차 안은 편안했고 풍경이 바뀌는 것을 보는 건 즐거웠다.

    특히 비체라발리 영지를 벗어나 다른 영지 마을의 풍경을 관찰하는 것은 꽤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4주가 지나고, 수도에 도착했다.

    수도는 여전했다. 머리에 꽃이라도 달린 것처럼 마냥 행복하다고 실실대는 사람들과 시도 때도 없이 열리는 축제. 그야말로 웃음이 가득한 삶.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수도에 있는 비체라발리 저택에 도착해, 과거 머물렀던 방에 배정받고 나니 새삼 몇 달 전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도 들었다.

    물론, 아주 잠깐이었다.

    “렐! 봤어? 내 방이 렐의 맞은편이야. 성에서랑 똑같이!”

    방 위치 때문에 흥분하는 로이안과,

    “햇볕에 녹은 솜사탕처럼 흐물흐물해지셨어요. 빨리 씻고 쉬시는 것이 좋겠어요.”

    시도 때도 없이 솜사탕을 걱정하는 샬럿. 그리고, 아무거나 입에 오물오물 넣고 다니는 드래곤 때문에 과거를 되새길 여유가 없었으므로.

    “저기 탁자 위에 쌓인 것은 뭐야?”

    레이블라가 한쪽 테이블을 가리키며 묻자, 마침 방으로 들어온 수도 저택의 집사장, 레오날드가 설명했다.

    “아가씨께 온 서신들입니다. 두 분께서 오신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인지 도착하시기도 전에 각 가문에서 두 분을 뵙고 싶다는 연락을 취해 왔습니다.”

    “혹시 황궁에서도 왔나요?”

    “황궁에서는 아직 기별이 없습니다.”

    황궁이 아니라면 굳이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그럼 다 거절해 주세요. 예절 교사는요?”

    “부르시면 언제든지 온다고 합니다.”

    “그럼 내일 당장 부탁해요. 아, 혹시 모르니 오라버니께도 물어봐 주세요. 스케줄은 오라버니에게 맞춰야 하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도련님과 의논하여 다시 말씀 올리겠습니다. 아가씨.”

    집사장이 깍듯하게 인사하고 사라지자, 레이블라가 샬럿에게 물었다.

    “지질학자는?”

    “아가씨가 말해 주신 조건에 세 사람 정도가 부합한다고 해요. 바로 데려올 수 있다는데 지금 부를까요?”

    ……비체라발리, 생각보다 더 대단한 가문 아닌가?

    사실, 지질학자 탈렌은 소설 속에서도 큰 묘사가 없는 사람이라 외모나 배경을 특정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제일 많이 언급된 것이 이름이었지만, 문제는 ‘탈렌’이란 이름이 훗날 황녀가 내린 성이란 것이라는 점이었다.

    지금은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딱 한마디의 정보만 던졌었다.

    ‘펠리시티 영지를 조사하려는 지질학자.’

    그런데 이걸 세 사람으로 압축해 왔다고……?

    ‘혹시 아빠가 로이안에게 당한 건 주인공을 위한 밸런스 패치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단어 몇 개로 사람을 찾아내는 능력을 지닌 자가 아들이 반란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이야?”

    “한 사람은 거만하고, 한 사람은 열정적이고, 또 한 사람은 무능력자라고 했어요.”

    ……무능력자?

    한 사람만 너무 카테고리가 다른데.

    “좋아, 내일 만나는 거로 할게. 오늘은 편지를 써야 하니까.”

    “친하게 지내는 분이 있으셨어요?”

    “아니. 그냥 황궁에 보낼 편지.”

    수도에 도착했으니 황궁에서 그녀의 연락을 기다릴 것이 틀림없었다. 황궁에서 죗값을 치르다 황녀의 눈에 들어 입양까지 되었으니까.

    그러니 황궁에서는 레이블라’의 충심을 믿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레이블라는 그들의 기대감을 채워 주어야만 했다.

    그게 황궁이 그렇게나 소중히 여기는 ‘체면’이라는 것이니까.

    편지에 무슨 말을 써야 할까.

    한참이나 고민하던 레이블라가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끔찍하게 여기던 황궁을 방문하고 싶다는 메시지였다.

    * * *

    다음 날, 레이블라는 로이안과 함께 예절 수업을 마친 후 약속대로 지질학자를 만났다.

    세 명의 지질학자는 샬럿이 말한 대로였다.

    처음에는 비체라발리 공작이 부른 줄 알고 찾아왔던 사람들은 아이가 나타나자 묘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곧 그 아이가 자신의 투자자라는 사실을 인지한 듯 각자 준비해 온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 말들이 가관이었다.

    ‘그러니까 저에게 투자만 하신다면…….’

    ‘광물? 제 머릿속의 지도면 충분합니다.’

    아이라서 만만하다고 판단했는지, 돌팔이 약장사 같은 목소리로 계속 자신에게 투자하라고 떠드는 인간 하나.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 유명한 제국 학술원을 졸업했으며…….’

    ‘이 지층이 보이십니까? 이게 얼마 만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지식이 넘치는 나’에 도취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반응은 쳐다도 보지 않는 인간 하나.

    그리고 마지막.

    ‘돈을 주시겠다고요? 받겠습니다.’

    맨땅에서 구르고 온 듯 후줄근한 복장을 한 채 찾아와 대놓고 돈을 밝히는 수상한 인간.

    특히 마지막 사람은 실적조차 제대로 없는 터라 정말로 지질학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셋 중에서 레이블라가 가장 필요하다 느낀 사람은 바로 세 번째였다.

    모두가 의외라고 여기는 듯했다. 심지어 레이블라에게 부름을 받은 세 번째의 지질학자까지 자신이 왜 불려 왔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다음 날 그를 다시 불렀을 때, 지질학자, 하퍼는 다소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당신을 고용하고 싶어서요.”

    “……왜입니까?”

    돈을 주면 주는 대로 받겠다고 말했던 어제와는 달리, 고용한다고 하는데도 의아해하는 모습이었다. 어제 자신이 어땠는지 스스로도 아는 모양이었다.

    레이블라가 싱긋 웃었다.

    “집을 지으러 다니시죠?”

    “조사하신 겁니까?”

    “네. 관심 분야는 토목 쪽이시고요.”

    “그렇습니다만.”

    “그래서예요.”

    “……예?”

    그는 자신을 선정한 이유가 정말로 뜻밖이라는 듯이 얼이 빠진 표정을 해 보였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이 지질학자를 찾는 이유는 보통 미개척지를 돌면서 새로운 자원을 발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니까.

    실제로 어제 만났던 첫 번째와 두 번째 지질학자는 ‘자신에게 지원해야 할 이유’에 관해 설명하면서 제가 과거에 어떤 자원을 발견해 냈는지를 설명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사람은 세 번째가 유일했다.

    처음 수도에 올 때는 그를 로이안의 스승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그가 새로운 광물을 찾아 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4주간의 여행이 레이블라의 생각을 바꾸었다.

    “제가 토목지질학에 관심 있어요. 저는 도시 개발이 목표라서요.”

    수도로 오는 동안 수많은 마을들을 지나치면서 레이블라는 마을 간의 격차가 심각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제국에는 복지라는 개념이 없다 보니, 자원이 넘치다 못해 낭비를 일삼는 듯한 마을이 있는가 하면, 건조할 때는 물 한 방울 얻기 힘든 마을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비체라발리의 영지 상태는 어떨까, 하고.

    “저는 비체라발리 영지 곳곳에 있는 마을의 처우를 개선하고 싶어요.”

    영지를 부강하게 만들려면 영지민들의 생활이 안정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세금을 낼 테고 낫이나 괭이를 들 손으로 검을 쥘 여유가 생길 테니 말이다.

    특히나 전쟁에 있어 뼈가 굵은 비체라발리의 특성상, 많은 기사의 확보는 필수였다. 그러니 영지민들의 생활 기반을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각 마을의 수도 시설을 개선하고 물을 저장할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식수와 폐수를 분리하고 가뭄을 대비할 물 저장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일을 맡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모든 마을에 말입니까? 그 비용은…….”

    “물론 제가 댈 거예요. 제가 좀 부자라서요. 아, 물론 우선순위는 있어요. 가장 먼저 혜택을 받을 사람은 실버 울프의 기사여야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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