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90화
“저는 딱히…….”
다시 공부하게 될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크게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인재는 전부 황녀가 휩쓸어 갔기도 했고.’
소설의 1부에서 황녀는 황제와의 관계를 개선시켜 나가는 동시에 수많은 인재를 영입해 댔다.
회귀 전 알게 된 사람들을 찾아, 자기 편으로 만들어 2부에서 그들과 많은 일을 함께했었다.
황녀의 스승인 데릭 헤스키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황녀에게 업적을 빼앗긴 줄도 모르고 웃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사람 성격이 아주 이상하긴 했지.’
지난날 그와 있던 일 하나가 떠올랐다. 황녀의 방을 정리하던 중 가구의 치수를 재느라 사칙 연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수식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쫓아왔었다.
‘이 문자가 들어간 수식은 뭡니까, 대체!’
……도망치느라 진짜 귀찮았는데.
‘황녀에게 포섭되지 않은 인재가 있었나?’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인재라면 전부 황녀 주변에 있었다.
‘차라리 로이안의 스승님을 내가 데려가고, 로이안에게 새 스승님을 붙이는 게 나으려나?’
로이안의 스승은 ‘레이블라 비체라발리’에게 관심이 있는 듯 보였으니, 배움을 청하면 거절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고 황녀라면 로이안이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이든 건네줄 사람이었다. 로이안의 스승을 구한다고 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실력자들을 소개시켜 줄 것이었다.
‘로이안의 스승이라면…….’
차분하면서도 정직하게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황녀의 인재 수집 목록을 떠올리고 있는데, 문뜩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 지질학자.’
탈렌.
황녀가 후원한 학자 중 하나로, 2부에서 절대 파괴되지 않는 금속인 아다만티움을 찾아내는 것도, 새로운 마석 광산을 찾아내는 것도 모두 이 사람의 공로였다.
이 사람과 친분이 생긴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광산을 획득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 사람은 아직 황녀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라.’
처음 등장하는 것이 2부였으니까!
‘이 사람을 데려오면 황제의 세력이 커지는 것도 막을 수 있을 거야.’
원작에서 황실은 이자 덕에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부는 권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러니 탈렌을 가로채는 건 그 하나를 빼앗아 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쯤 수도에 있을 텐데.’
이 사람은 펠리시티의 영지를 학문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먼저 황궁을 찾았다가 황녀와 만났다고 했다. 그러니 현 시점에선 수도에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 펠리시티 영지로 들어가려면 황제의 허락이 필요하니까.’
땅을 조사하려면 보통 그 땅의 주인인 영주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펠리시티는 멸문한 관계로 모든 권한이 황제에게 있었다.
펠리시티가 건재할 때는 누구에게도 지질 조사를 허락하지 않았었다. 굳이 그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펠리시티가 멸문한 지금,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펠리시티 영지의 지질 조사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학자라면 누구라도 가고 싶어할 것이 당연했다.
눈을 반짝이는 레이블라의 모습을 바라보던 카시우스가 미소를 감추듯 입매를 쓸었다. 그러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블라가 활기찬 목소리로 부탁했다.
“저! 로이안과 함께 수도로 갈래요!”
* * *
“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 부탁이라서 허락한 거야.”
마차에 탑승한 로이안이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정말 나는 할 일이 많은데…….”
“고마워, 오라버니. 정말로 고마워!”
레이블라가 돌연변이 도마뱀으로 위장한 드래곤을 품에 안고 있다가 내려놓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보자, 로이안이 저도 모르게 입매를 허물어뜨리려다, 이내 오빠로서의 위엄을 잡고자 하는 건지 표정을 굳혔다.
“그럼, 도와줄 거지?”
“뭐를?”
“숙제. 너 때문에 내가 석 달 치나 받았어. 말이 돼?”
로이안의 시선이 마차 한쪽에 쌓인 책으로 향했다. 두꺼운 책이 몇 권이나 있는지 세는 눈빛이 시름으로 가득 찼다.
레이블라는 그와 함께 책을 보면서 어제 로이안의 스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가씨께서 많이 도와드리십시오. 수도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연락해 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학업에 공백이 없도록, 소홀히 하지 않도록 지켜봐 달라 부탁받았지만, 레이블라는 그런 적이 없는 척 말했다.
“알았어, 로이안. 내가 무조건 도와줄게. 나만 믿어!”
로이안은 제 부탁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는 소년의 얼굴이 마치 꽃봉오리가 만개하듯 화사했다.
“너랑 여행 가게 되어서 좋다. 그럼 한 달간 내 공부도 함께하고 수련도 봐 주는 거지?”
잠깐만요. 조금 전에 투덜거리던 분 어디 가셨죠?
“로이안, 레이블라.”
레이블라가 로이안을 밉지 않게 흘겨보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마차 곁으로 다가온 비체라발리 공작, 카시우스가 두 사람을 불렀다. 레이블라가 쪼르르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빠.”
그러자 그가 한쪽 팔로 살포시 레이블라를 안으면서 다른 팔을 벌렸다. 카시우스의 시선이 로이안에게로 향했다.
로이안은 쭈뼛쭈뼛거리며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오다가 카시우스가 와락 끌어안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곧 따라가마.”
“예, 아버지.”
“천천히 오세요.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카시우스는 이미 이번 전쟁에 참전할 의사를 모두에게 밝힌 상태였다. 그에 따라 병사들의 자원을 받고 물자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그 또한 수도로 가 황제의 앞에서 출정식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마탑주에게 필요한 것을 주면서 아빠를 수도까지 이동시켜 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러니까 저희 걱정하시느라 말 타고 오지 마시고, 마탑주와 편하게 오시는 거예요, 아셨죠?”
“그래.”
그가 레이블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를 위해 예절 교사를 준비해 두었다. 수도에 가면 기다리고 있을 거다.”
“네, 열심히 해서 비체라발리의 이름에 흠이 되지 않도록 할게요!”
레이블라가 씩씩하게 답하자, 카시우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비체라발리에게 흠은 없다. 너희가 비체라발리 그 자체이니.”
그가 레이블라와 로이안을 믿음직한 눈으로 보았다.
“너희를 무시하는 자들이 있다면 밟고, 누르면 그만이다. 그러니 완벽해지려고 애쓰지 마라.”
‘너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웃어넘기고 그러도록 내버려 둬라. 그리고 돌아서서 철저히 짓밟아.’
펠리시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아빠들은 왜 이렇게 전투적인지 모를 일이었다.
속마음을 삼킨 채 레이블라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시우스가 레이블라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고, 로이안의 어깨를 토닥인 후 놓아주었다.
그러고서 아이던에게 명령했다.
“레이블라와 로이안을 잘 부탁한다.”
“예, 주군.”
“출발하라.”
카시우스가 마지막으로 눈을 마주치며, 직접 마차의 문을 닫아 주었다. 레이블라는 출발을 외치는 목소리와 함께 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느끼면서 마차의 창에 찰싹 달라붙었다.
레이블라는 창밖으로 계속 손을 흔들었고, 로이안은 가만히 카시우스를 응시했다.
왠지 모르게 비체라발리 공작성이 멀어지는 모습이 아쉬워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오라버니가 있잖아. 외로워하지 마.”
로이안이 어깨동무를 하며 레이블라의 볼을 톡 두드렸다. 그를 돌아보자, 그는 다정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새삼 신기하네.’
펠리시티가 멸문당하고 황궁에 시식가로 끌려갔을 때만 해도 절망적이었다.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이 세상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기에.
이 세상은 주인공들을 위해 존재했고, 이름 없는 존재인 그녀는 그저 주인공을 빛내기 위해 끼워 넣은 부속품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 꽤 많았다.
로이안만 해도 그러했다. 처음 비체라발리 공작성에 들어섰을 때 원작 남주인 그를 절대 마주치지 않겠다, 자신을 죽일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저에게 이토록 다정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달라진 것이 있었어.’
그러니까 느리더라도 차근차근 노력해 나가면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이블라는 로이안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었다가 이내 떨어뜨리면서 손뼉을 짝, 하고 마주쳤다.
“자! 그럼 오라버니. 이제 공부 시작하자!”
이 행복을 오랫동안 지키기 위해서 힘을 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