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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9)화 (89/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9화

    * * *

    칼릭스와 헤어지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레이블라는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축제를 성황리에 마쳤다니 다행이야.”

    루빈디시에 도착하고 나서 가장 먼저 궁금했던 소식은 바로 축제에 관한 것이었다.

    7년 만에 열린 축제였건만 냉큼 납치를 당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을까 염려스러웠다. 카시우스와 로이안이 ‘괜찮았다’라고 하는 말은 어쩐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저를 배려해서 한 소리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사용인들에게 물었는데, 다행히 정말로 축제는 잘 넘어간 모양이었다. 마수의 알 찾기 이벤트는 공녀가 알을 찾고 돌아간 것으로 하고 그대로 진행했으며 로이안 또한 마수를 잡아 왔다고 했다.

    덕분에 레이블라가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극소수였다.

    이 말을 전하는 밀리아 또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 중 하나였다.

    “갑자기 별장으로 간다고 하셔서, 바쁘게 옷을 챙겨 드렸는데 어떠셨어요? 아가씨께서 떠나신 후에 온 옷들이었는데.”

    “다 좋았어.”

    “그렇죠? 특히 아가씨께서는 화려한 색상도 잘 어울리셔서 옷을 고르는 게 정말 재미있어요!”

    “아가씨, 간식이에요.”

    그때 샬럿이 다가와서는 마카롱 하나를 내밀었다. 레이블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와구와구 입 안에 넣었다.

    “맛있어.”

    “이전보다 더 괜찮아졌죠? 디저트 박람회 이후로 조리실에서도 깨달은 바가 많다면서, 엄청나게 노력하셨어요!”

    밀리아가 발랄한 목소리로 신이 난 듯 말했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시면 드시게 하겠다고 요리장님께서 얼마나 기대하셨는지 몰라요.”

    외부의 가게들을 위해 연 행사였는데, 공작성 내부 분위기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거리의 디저트 가게들에도 조금이지만 손님들이 돌아오고 있대요. 젊은 층은 아직이지만, 귀부인들께서 주로 찾고 계신다고 했어요.”

    “향수를 자극하는 맛이었을 테니까.”

    “아가씨께서는 어리신데도 대단하세요. 어떻게 그런 기획을 하셨어요?”

    “유행은 돌고 도는 법이라고 누가 그랬거든.”

    이전 삶에서도 한참 지나간 유행이 10년, 20년 후에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었다. 이곳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니 다르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레이블라는 그저 그 시기를 조금 당긴 것일 뿐이었다. ‘올드하다’며 한 시대의 유행으로 치부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물론, 판을 깔아 주었을 뿐, 그 열기를 이어 가는 건 가게들의 몫으로 남았다.

    “아가씨께서는 수도에 가시나요?”

    한참을 재잘대던 밀리아가 물었다. 레이블라의 눈이 의문을 품었다.

    “수도?”

    “도련님께서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셨기에 이제 수도에 정식으로 인사하러 가신다고 들어서요.”

    그러고 보니 그런 행사가 있기는 했다.

    새로이 가문의 후계자가 된 아이들을 모아서 황제에게 인사시키고, 그들끼리 교류할 수 있도록 마련된 행사.

    ‘작은 짐승들의 서바이벌이죠.’

    펠리시티일 적, 예법을 가르쳐 주던 마담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은데.

    ‘펠리시티는 포식자이니 짐승들이 노는 것을 그저 지켜보시기만 하면 된답니다.’

    듣기만 해도 피곤한 행사구나 했었는데. 갈 일이 없어진 것만큼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는 로이안이 참석하지 않았겠지?’

    1부 완결 후 황녀와 10년 만에 재회한다고 했으니, 행사에 참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와 사이도 나쁘고, 비체라발리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지가 불안했을 때일 테니까. 한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안정되었으니, 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레이블라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이안의 서재를 찾았다.

    마침 수업이 끝났는지, 서재의 문을 닫고 나오던 로이안을 가르치는 교수가 그녀를 보며 아는 체를 해 왔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안녕하세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그럼요. 제 수업에 오시지 않아 섭섭합니다. 아가씨께서 초롱초롱하게 수업을 들어 주시는 것도 즐거웠는데요.”

    “로이안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요.”

    “도련님께서는 아가씨께서 계실 때 더 수업 태도가 좋으신데 말입니다.”

    레이블라는 이전에 로이안의 관심을 끌고자 수업에 참관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로이안과 친해지기 전이라서 수업 태도가 굉장히 엉망이었다. 로이안은 내내 레이블라를 쏘아보고, 짜증 내고. 레이블라는 그런 그를 구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업을 굉장히 방해했던 터라 이후로는 로이안을 위해서라도 절대 가까이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럼.”

    깍듯하게 인사를 마치고 떠나는 강사를 보다가 로이안에게 고개를 돌리자, 로이안은 필기구를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들은 내용을 빠르게 복습하는 모양이었다.

    레이블라는 한창 집중한 상태인 그가 정리를 마칠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리려고 책 하나를 쥐고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으니, 이내 시선이 느껴졌다. 로이안이었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오늘은 무엇을 배웠나요, 오라버니.”

    “그냥 뭐. 영지 관리법에 관해서 배웠지.”

    “음. 어땠어?”

    “어려워.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많고. 그런데 재미있어.”

    필기한 부분을 다시 살피는 그의 입가가 기분 좋게 올라가 있었다. 어렵지만, 그래도 정복하는 맛이 있는 모양이었다.

    레이블라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그에게 물었다.

    “로이안은 수도에 가?”

    “수도? 아. 아버지가 말했던 그건가.”

    그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귀찮아. 그런 거.”

    “그래도 가면 황녀 전하를 뵐 수 있는데?”

    황녀, 라는 이야기에 또다시 그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사랑과 감기는 감출 수가 없다더니. 로이안을 보면 그 말이 정답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며칠 자리를 비우기도 했고, 검술 연습도 더 하고 싶어서. 이렇게 부족해선 어디 가서 비체라발리 소공자라고 이름 말하기도 그렇잖아.”

    “부족하지 않다니까.”

    “부족해. 좀 더 노력해야 해.”

    이런 말을 할 때의 로이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마다 레이블라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어 그의 말에 반박해 왔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부족하다’라고 내뱉는 로이안의 표정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조금 더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느껴졌다.

    ‘칼릭스의 영향인가?’

    이전에는 막연하게 의무를 수행하듯 행동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정확한 목표가 생긴 듯 추진력이 붙었다.

    그 모습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뜨겁네. 스포츠 정신. 근데 이게 스포츠가 맞긴 한가……?’

    어쨌든 뜨거운 열정을 품은 소년의 모습이니까!

    레이블라는 로이안의 변화를 맛있는 과자를 먹으면서 따스한 눈길로 지켜보기로 했다.

    그랬는데.

    “……교육이요?”

    그녀만 놀게 할 수 없다는 듯이 카시우스가 수업을 제안했다.

    “아직 어리나 배울 수 있는 건 배우는 것이 좋겠지. 공부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

    공부라.

    “딱히 없어요.”

    레이블라가 단호히 고개를 젓자 헤넌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럼 일단 숙녀 예절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연회나 다과회에 참석하려면 필요할 테니까요.”

    “그렇게 할게요.”

    “일반 학문은 차차 진행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지리, 역사, 문화. 상법과 제국법은 아직 배울 단계가 아니고…… 아, 경영학에 경제학은 배우셨지요? 어디까지 진도를 나가셨나요?”

    그가 줄줄 읊는 과목이 조금씩 늘어난다 싶더니, 배우지 않아도 될 것들까지 끼어들었다.

    “저는 배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역사, 문화, 회계 정도가 알맞지 않을까요?”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우는 게 좋다.”

    “하지만…….”

    지금 말한 것들은 전부 가문의 후계자가 배울 법한 내용이었다.

    ‘설마 로이안의 생일 때 선언한 걸 진심으로 받아들이신 건 아니겠지……?’

    의심쩍기는 하지만, 카시우스가 웬일인지 너무 완고한 태도를 보였기에 레이블라는 끝내 수긍했다. 어차피 비체라발리를 살아남게 하려면 여러모로 배워 두는 것이 좋을 테니까.

    “지리, 역사, 상법은 이미 모두 배웠어요. 제국법은…….”

    레이블라가 그간 배워 왔던 것을 설명하자, 헤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벌써 그만큼 배우셨단 말씀입니까? 상법, 제국법은 정식 후계자가 되어야 배울 만한 것들입니다. 경영이나 회계도 사실 아가씨 나이대에는 너무 이른데…….”

    헤넌이 놀란 눈초리를 하며 중얼거리자, 잠자코 있던 비체라발리 공작이 물어 왔다.

    “톨비쉬 르랑이 스승이었다고 들었는데, 맞느냐.”

    “네. 하지만 찾으실 필요 없으세요. 비체라발리가 펠리시티와 얽히는 건 피하고 싶어요.”

    펠리시티를 향한 마음은 여전했지만, 세간엔 반역도들에 지나지 않았다. 괜히 얽혀서 좋을 건 없었다.

    “그럼 배움을 청하고 싶은 교수가 따로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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