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8화
커다란 힘이 제 몸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칼릭스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식은땀이 흘렀다.
먼저 닿은 손을 떼어 낸 것은 드래곤이었다. 작은 몸집을 지닌 것 이상으로 힘차게 움직이던 녀석이 축 늘어져서는 힘겹게 꾸물꾸물 기어서 레이블라에게로 다가갔다.
그녀 곁에서 편한 자세를 취한 드래곤이 길게 하품을 하고서 눈을 감았다.
기운이 완벽히 빠진 것처럼.
그제야 칼릭스는 이 작디작은 생물이 저에게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임을 깨달았다.
‘어린 드래곤의 마력을 봉인하던 도구라더니 진짜였군.’
갓 태어난 드래곤이 저를 보자마자 봉인구를 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풀어 주려고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봉인구의 힘이 강력해 되레 어린 드래곤이 제힘을 빼앗긴 듯했다.
‘아직은 좀 기다려야 하나.’
저 드래곤이 자란다면, 그를 억누르고, 수명마저 앗아 가는 봉인구를 해결해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를 만나고부터 좋은 일들만 있는 것 같아.’
회색빛처럼 흐리기만 하던 그의 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색채를 띠었다.
늘 캄캄하기만 했던 밤에 별이 무수히 있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 바로 그녀였다.
칼릭스는 레이블라의 머리에 제 머리를 맞대며 금방이라도 별빛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자,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졌다.
가로막힌 것이 없는 탁 트인 세상.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 상태의 자유로움.
어쩐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이게 행복이라면 영원히 이어졌으면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제를 떠올린 칼릭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곁에 둔 칼을 강하게 움켜쥔 그가 조용히 홀로 다짐했다.
그를 제거하겠노라고.
* * *
며칠 밖에서 고생한 탓일까.
그렇게나 찾았던 칼릭스와 함께 있음에도 레이블라는 대화하던 도중 곯아떨어지고야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비체라발리 공작이 레이블라를 안아 들기에 좀 더 대화를 나누겠노라 투정도 부렸지만, 이후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숙소에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이 도마뱀은 뭐지?’
막 깨어난 레이블라의 곁에는 한 뼘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작디작은 도마뱀이 있었다.
빨간색 몸에 장식처럼 삐쭉 튀어나온 것은 아마도, 날개인 듯싶었다.
“……드래곤?”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면서 몸통이 부풀어 올랐다가 꺼지는 것을 보니 살아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자는 모습이 제법 귀여워 보이는 것 같기도?
근데 언제 알이 깨진 거지?
‘그러고 보니 어제 로이안이 뭐라고 소리쳤던 것 같은데.’
그대로 잠들어 버려서 로이안이 무어라 말하는지 몰랐는데, 어제 칼릭스와 함께 있을 때 알이 깨진 모양이었다.
레이블라가 손가락으로 살짝 볼을 누르자, 드래곤이 슬쩍 눈을 떴다.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는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하암.
입을 쩍 벌리기에 하품으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크게 벌린 입에서 불이 튀어나왔다가 사라졌다. 마치, 성냥불이 확 피어올랐다가 꺼지듯이.
“뭐야?”
어리둥절한 마음에 드래곤의 입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뜨거운가, 하는 마음에.
그러다가 덥석. 물렸다.
다행히 아프지는 않았다. 강하게 씹지는 않고 오물오물하는 것이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했다.
……드래곤은 뭘 먹지?
“파리라도 잡아서 줘야 하나?”
파충류는 도대체 무엇을 먹나 심도 있게 고민하는데, 샬럿이 가까이 다가왔다.
“파리요?”
“응. 얘가 배고파하는 것 같아서.”
눈앞의 드래곤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레이블라만 주목하고 있던 샬럿이 차갑게 말했다.
“그냥 밖에 던져두면 알아서 먹고 오지 않을까요? 감히 아가씨의 손가락을 물다니. 그대로 쫓아내 버려요.”
감히라니, 샬럿. 얘 드래곤이거든?
“……그냥 우유 좀 갖다줄래?”
샬럿의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지지 않게 슬쩍 내보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작은 접시에 우유를 담아서 가져왔다.
곧장 드래곤의 앞에 두고, 살며시 고개를 그쪽으로 기울이자, 드래곤이 날름날름 우유를 먹기 시작했다.
그사이, 레이블라는 조심스럽게 드래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얌전히 우유를 먹으면서 손길을 느끼는 것이 신기했다.
녀석은 손길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꼬리를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그 꼬리 짓에 먹던 우유를 조르륵 쏟고야 말았다.
레이블라가 닦으려고 하자 샬럿이 먼저 다가와 녀석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 행동이 불쾌했는지, 드래곤이 입을 쩍 벌려서 픽 불을 쏘았다.
하지만 역시나 켜지다 만 성냥불처럼 픽 나갔다가 금세 사그라들었다.
“너 진짜 드래곤 맞니. 아무래도 그냥 젖은 성냥불 같은데.”
어쩐지 드래곤이 뚱하게 보이는 건 착각인가.
“미안.”
살살 달래면서 쓰다듬자, 드래곤이 작게 트림하더니 다시금 눈을 감고 고롱고롱 잠들기 시작했다.
레이블라는 그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뒤늦게 아차 싶은 얼굴로 샬럿에게 물었다.
“내 친구는?”
“아래층에 계세요. 어제 아가씨께서 내일 보자고 말씀하셨다면서 기다리셨어요.”
잠결에 그런 약속을 한 모양이었다.
레이블라가 다급히 아래층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칼릭스가 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나무 색으로 물들였으나, 몰라볼 수가 없었다. 저토록 신비로운 눈동자와 눈동자만큼이나 예쁜 이목구비의 주인은 칼릭스뿐이었다.
“칼릭스!”
레이블라가 달려가서 앞에 서니 칼릭스가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반겼다. 오늘도 왼쪽 눈 아래 점이 매력적으로 돋보였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진짜 어른이 되면 어떤 분위기를 풍길지 무척 궁금했다.
“오늘은 제대로 인사하고 가려고 왔어.”
헤어진다는 말만으로도 벌써 섭섭했다. 어제 그렇게 잠드는 게 아닌데. 좀 더 대화해야 했는데.
하지만 조금 더 있어 달라고,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칭얼대지 않았다. 웃으면서 그를 배웅해 주고 싶었으니까.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칼릭스.”
어제 헤어지기 전에 칼릭스의 동료들을 모두 보았었다. 다들 굉장한 베테랑이었다. 칼릭스가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로 보였다.
“네가 있을 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릴게. 그러니까 꼭 편지 해야 해. 내가 어디 있는지 이제 알고 있지?”
칼릭스가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레이블라의 손끝을 잡았다.
“기다려 줘, 레이블라. 반드시 네 곁으로 돌아올게.”
“……응. 꼭이야.”
한 걸음, 물러나면서 칼릭스가 웃었다.
레이블라는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가서 그를 안아 주었다.
꼬옥. 그를 안자, 칼릭스가 꽉 마주 안았다.
그것을 끝으로, 그가 멀어졌다. 조금씩 조금씩. 그가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레이블라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가만히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깨에 커다란 손이 올라왔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비체라발리 공작이 곁에 있었다.
보고 있었던 걸까?
레이블라는 여전히 칼릭스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며 먹먹해진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참전하시는 거죠?”
“그래.”
비체라발리보다 칼릭스가 더 소중했을 무렵, 레이블라는 비체라발리 공작이 전장에 나서게 될 것을 예상하며 칼릭스에게 살아남을 방법을 제안했었다.
하지만 지금, 칼릭스도 비체라발리도 소중해진 상황이었다. 누구도 전장에 나서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이런 마음과는 달리, 그들은 황제로 인한 이 전쟁에 참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칼릭스는 황제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비체라발리 공작은…….
“아빠가 나가지 않으면 전황이 더 안 좋아질 것이 뻔하니까?”
“그래.”
그가 참전을 거부하는 동안 전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소설에서 언급되었듯이 페릴세테 공국을 중심으로 황제에게 도발당한 주변국들이 서로 연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가 멍청하게 주변국을 도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공작이 조금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좀 더 너희들 곁에 있어 주고 싶었는데, 결국 황제의 뜻대로 되었군.”
이 세상 사람들은 황제와 황녀가 축복이라고 했다.
그들이 존재하기에 제국은 부강해졌으며 행복으로 가득 찼다고. 모두가 황녀가 나타난 이래로 생긴 축복이라 칭송했다.
하지만 그건 다 바보 같은 소리였다.
실제로 이 제국을 지키고 있는 것은 비체라발리 공작뿐이었다.
황제는 제멋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나 몰라라 하는 중이고, 황녀는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나비 효과를 불러올지도 모른 채 그저 제 욕구대로만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들이 정말 축복이기는 한 걸까?
신이 왜 그들을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일지, 의문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