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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7)화 (87/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7화

    레이블라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하자, 로이안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얄미운 놈 같지만, 그래. 알았어. 렐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정해 주겠다는 태도였다. 키득 웃음이 나왔지만 속으로 삼켰다.

    “오라버니, 아까 진짜 멋있었어.”

    “깨졌는데도?”

    아까는 시원하게 패배를 받아들이더니, 내심 기가 살짝 죽은 목소리였다. 레이블라가 힘껏 그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멋진 건 승패와 상관없어. 오라버니가 웃으면서 패배를 인정했을 때가 제일 빛나 보였거든.”

    “그, 그랬어?”

    “그럼. 그 모습을 황녀 전하께서 보셨다면 반했을걸? 나야 오라버니를 존경하게 되었지만.”

    로이안이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쓸었다.

    레이블라가 힘주어 말했다.

    “내가 확신하는데, 오라버니가 10년 후에는 아빠보다도 강해질 거야.”

    “정말, 그런 날이 올까?”

    조금 자신이 없는 목소리였다.

    아니, 우리 남자 주인공이 왜 이러시나.

    그대는 말이지요. 아버지를 이기는 것은 물론이요, 그 미친 황제까지 이기니 마니 할 정도로 검술의 정점이 되는 사람이거든요?

    “정말이지. 믿어도 돼. 나 믿지?”

    그에 발끈한 레이블라가 로이안의 어깨동무를 하며 힘차게 말하자, 로이안이 수줍게 끄덕였다.

    그때,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칼릭스가 무릎을 꿇고 있고, 비체라발리 공작이 칼릭스의 목에 검을 대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 서로가 눈을 마주치는가 싶더니, 칼릭스가 한숨과 함께 패배를 시인했다.

    “많이 배웠습니다.”

    그제야 공작이 검을 거두었다.

    “다행이군.”

    잠시 대화를 멈춘 그들이 슬쩍 레이블라와 로이안이 있는 자리를 번갈아 보았다. 공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는 듯하더니 로이안을 불렀다.

    “예, 아버지.”

    로이안이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대뜸 비체라발리 공작이 로이안의 어깨를 붙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로이안이 반항하는 듯했지만, 아버지에게 끌려가는 것이 어쩐지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렇게 로이안과 멀찍이 떨어졌다.

    아마도 칼릭스와 대화하라고 손수 로이안을 데리고 간 모양이었다.

    레이블라는 두 사람의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이며 칼릭스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곁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칼릭스가 길게 숨을 토해 내며 웃었다. 아까의 로이안과 닮은 미소였다.

    “이제 말해 줘.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황제가 널 그냥 보낼 리가 없잖아.”

    레이블라가 참았던 궁금증을 토해 냈다. 아까 말을 돌리는 기색에 더 묻지 않으려 했으나 궁금했다. 그가 지금 처한 상황이.

    “그쪽에서는 내가 죽은 줄 알아.”

    “무슨 일 있었어?”

    “그냥, 그런 일이 있었어.”

    역시나 더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기색이라 레이블라는 차마 더 묻지 못했다.

    그냥 칼릭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릴 뿐이었다. 그가 그 손길을 느끼듯 눈을 감으며, 툭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간 고민했어.”

    딱 한마디였지만, 레이블라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비체라발리와 손을 잡았으면 좋겠다’라고 제안했던 것에 대한 답이었다.

    납치당한 채 홀로 남겼던 날 칼릭스가 구해 주러 왔을 때. 레이블라는 그에게 ‘왜 전쟁터로 나가야 살 수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그 방법에 관해 설명했었다.

    ‘나는 네가 헤시온 상단을 통해서 공작님께 연락을 취했으면 좋겠어.’

    ‘헤시온 상단?’

    ‘비체라발리에서 운영하는 비밀 상단이야. 규모가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름을 달리한 작은 규모의 상단이 각 지역에 퍼져 있어. 정보를 모으는 상단이야.’

    ‘그 상단을 통해서 연락하라고?’

    응. 국경 지역에서 운영하는 세 상단을 알려 줄게. 그 상단에서 헤시온 상단을 언급하면, 알아챌 거야. 반드시 그쪽을 통해서 연락해. 황제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알았지?’

    칼릭스가 전장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황제가 감시를 소홀히 할 리가 없었다. 대놓고 비체라발리 공작과 접선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두 사람 모두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도 가장 늦게, 결말에 다다라서야 로이안이 알게 되는 비밀 상단을 칼릭스에게 건넸는데. 도움이 되어 다행이었다.

    “용병이 되는 건 어떻게 생각한 거야?”

    칼릭스가 자기 편을 만드는 건 정말로 잘한 일이었다. 앞으로 큰 세력을 만들어야 할 칼릭스에게 든든한 방패가 생긴다면, 그의 어깨에 얹어지는 부담이 덜어질 테니 말이다.

    “그냥, 별생각은 없었어.”

    “그래도 다들 좋아하는 것 같은데.”

    “멍청해.”

    담담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 가차 없었다.

    “그래서 그 멍청한 사람들은 어떻게 만나서 친해진 거야?”

    레이블라가 또다시 묻자 잠시 칼릭스가 주춤하더니 한숨과 함께 답했다.

    “절벽에서 떨어져 폭포에 휩쓸렸다가 우연히…….”

    “……뭐?”

    절벽? 폭포?

    레이블라가 깜짝 놀라자, 그가 진정시키려는 듯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황제의 첩자를 떨어뜨리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어.”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지금 막 일어난 일처럼 레이블라가 그를 살피자, 칼릭스가 웃었다.

    “괜찮아. 정말로.”

    “진짜야?”

    칼릭스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라는 듯이.

    하지만 레이블라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앞에 마주 앉은 채 한껏 진지해진 얼굴로 협박하듯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랑 헤어진 후로 있었던 일 하나도 빼지 말고 전부.”

    무섭게 으름장을 놓는데도 칼릭스는 기쁜 듯, 난감한 듯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레이블라의 손끝을 잡았다.

    “너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면.”

    누가 먼저 말하나 실랑이를 하는 꼴이었다.

    이러다 흐지부지 넘어가게 둘 수는 없지.

    레이블라는 고민 없이 빠르게 운을 뗐다.

    “그럼 나부터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네가 사라지고 난 후에…….”

    그에 대해서라면 모든 걸 알아 두고 싶었다. 책에 한 줄도 나오지 않은 그의 이야기를.

    * * *

    칼릭스는 제 어깨에 기대어 고롱고롱 작은 소리를 내며 잠든 레이블라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내도록 제 허벅지를 꼬집었음에도 여전히 믿기지 않은 상황이었다.

    헤어지고 나서 얼마나 눈에 그렸던 얼굴인지. 얼마나 귓속에 맴돌던 목소리였는지. 이 아이는 알고 있을까?

    살며시 볼을 만지자, 레이블라가 비비적거리면서 더 밀착해 왔다. 그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이 손을 잡고 먼 곳으로 달아나고 싶을 만큼.

    그렇게 엔딩을 맞이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랬을 테지만, 칼릭스는 그게 끝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가 아직도 찾고 있겠지.’

    급류에 휩쓸려 사라졌음에도, 황제는 ‘칼릭스 벤야 트리셰인’의 흔적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드래곤의 힘을 지닌 인간이 그런 하찮은 일에 죽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도망치는 것보다 비체라발리에 있는 게 너는 안전하겠지.’

    자신은 아직 지독하리만큼 집요한 황제에게 속박되어있지만, 레이블라라도 그놈들에게 벗어나서 다행이었다.

    비체라발리라면, 괜찮을 것이다. 검을 마주한 카시우스 비체라발리는 황제만큼이나 강했으니까.

    그러니 그녀가 안전한 울타리에 머무는 사이, 힘을 기르고 또 길러서 황제와 황녀에게서 레이블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기다려 줘, 레이블라.’

    내가 너를 지킬 수 있을 때까지. 당당히 네 앞에 서는 그날까지.

    그렇게 되뇌며 칼릭스가 조심스럽게 레이블라의 볼을 만지려는데, 뽀각-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났다. 아까 레이블라가 안아 주었을 때도 들렸던 소리였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레이블라가 메고 있던 작은 가방으로 향했다.

    그 순간, 가방 안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일었다. 곧 빛이 사그라들자 꿈틀꿈틀하더니 쏙, 붉은빛이 도는 도마뱀이 가방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조금 더 상체를 내밀자, 작디작은 날개가 달린 몸통이 드러났다.

    도마뱀이 찢어진 눈동자 속에 칼릭스를 담았다. 도마뱀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번뜩였다.

    황금빛 눈동자에 작은 날개를 지닌 도마뱀?

    “……드래곤?”

    그가 알기로 이러한 모습을 지닌 파충류는 드래곤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느낌이 왔다. 잔잔한 듯 강하게 소용돌이치는 기운은 드래곤의 피를 이은 사람이거나, 드래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를 상황에 칼릭스가 갓 태어난 드래곤을 응시하고 있으니, 녀석이 꾸물꾸물 기어 왔다.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쓱 앞발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것과 닿는 순간.

    “윽……!”

    마치 거대한 망치로 몸을 두드린 것 같은 충격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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