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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6)화 (86/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6화

“어딜 감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로이안이 칼릭스를 쏘아보았다. 칼릭스의 짙은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누구야?”

칼릭스가 고집스럽게 레이블라를 응시하며 물었다. 늘 고저 없이 느른하던 목소리에 살짝 날이 섰다.

레이블라는 그제야 아, 하고서 답하려 했다.

“오라버니다.”

그러나 대뜸 로이안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대답을 가로챘다.

“……오라버니?”

“그래! 렐이 내 동생이다.”

로이안은 절대로 내어 주지 않겠다는 듯이 레이블라를 꼭 안으며 선언했다. 그 모습은 마치 고양이가 하악질하는 것과도 비슷했다.

‘로이안이 왜 이러지……?’

제 앞에서야 어린아이처럼 굴 때가 많았지만, 사람들 앞에 서면 누구보다도 어른스러운 태도를 잘 꾸며 내던 로이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칼릭스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내가 낯선 사람이랑 친해서 그런가?’

그렇다면 얼른 소개해 줘야 할 듯했다.

레이블라가 웃으면서 칼릭스에게 설명했다.

“내 가족이야. 여기 귀엽고 멋진 사람은 로이안 오라버니. 저기 나무 옆에 서 계신 멋진 분은 카시우스. 아빠야.”

“……카시우스 비체라발리?”

“응.”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는 새로운 가족을 찾고 안정을 찾았는데, 그는 아직도 이 전장에서 홀로 목숨을 걸고 있었다. 실제 누구보다도 귀한 혈통인 그가 이렇게 용병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눈빛으로 그 마음을 읽었는지, 칼릭스가 죄책감을 덜어 주었다.

“다행이야, 안전하게 있어서.”

“그래도 미안해.”

“그런 생각하지 마. 오히려 안심했어.”

칼릭스가 예쁘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자, 레이블라가 그 손을 맞잡고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손은 또다시 로이안의 손에 쏙 들어갔다.

“……오라버니.”

“응. 렐. 이제 돌아갈래? 국경은 너무 위험한 것 같아.”

“자꾸 그러면 전하께 편지 쓸 거야. 자꾸 애처럼 군다고.”

“……뭐? 내가 언제!”

“지금 그러고 있잖아. 내 친구한테 자꾸 무례하게 굴 거야?”

“하지만 렐. 그게 저놈이 자꾸 너를 이상하게…….”

“오라버니?”

“아, 알았어! 알았다고. 안 하면 되잖아.”

로이안이 툴툴거리면서 레이블라를 놓아주었다. 레이블라는 조금 삐쳐 보이는 로이안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제야 로이안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오라버니, 저기 아빠랑 있어.”

레이블라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공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았어. 대신, 그 전에…….”

로이안이 앞으로 나서면서 보란 듯이 제 허리춤에 있는 검에 손을 얹었다.

“나랑도 어때?”

그의 도발에 내내 레이블라만을 응시하던 칼릭스의 눈이 로이안에게로 향했다. 칼릭스가 약간은 날이 선 눈빛으로 가만히 그를 보더니,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출중한 외모?”

“뭐?”

칼릭스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더니 턱짓으로 공터를 가리켰다. 로이안은 약간은 흥분된 얼굴로 레이블라에게 말했다.

“오라버니가 꼭 이기고 올게.”

“응? 뭐야. 두 사람 대련하는 거야?”

정말로?

“다녀올게.”

칼릭스가 살며시 레이블라의 손끝을 잡았다가 놓아주면서 먼저 레이블라의 곁을 떠났다. 이어 로이안이 그의 뒤를 따르다가 빠르게 앞질러 나가 공터의 중심에 섰다.

곧장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쳤다.

대련의 시작이었다.

* * *

실력 차는 명확했다. 칼릭스가 우세였다.

처음에는 비등비등한 듯 보였다. 로이안이 빠른 속도로 칼릭스를 파고들며 쉴 틈 없이 그를 몰아붙였으니까.

한번은 칼릭스가 크게 휘청거렸는데, 그때는 정말로 로이안이 이기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칼릭스는 차분하게 모든 공격을 막아 냈으며, 이어지는 공격 또한 여유롭게 방어해 내었다. 그리고 로이안의 검이 살짝 느려졌을 때를 놓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실전으로 다져진 검술은 대단했다. 그의 검은 빠르고 묵직하게 로이안의 허를 찌르며 이곳저곳을 파고들었다. 로이안도 그의 공격을 막아 내기는 했지만, 점점 자세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끝내는 검을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허억, 헉…….”

검을 떨군 채,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인 로이안이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레이블라는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하고서 즉시 로이안에게 다가갔다.

로이안은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다. 처음으로 제 또래에게 무참하게 패배한 것은 그에게 큰 충격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걱정했건만. 뜻밖에도 로이안은 웃고 있었다.

그가 거친 숨을 긴 호흡과 함께 털어 버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딘지 상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야, 너 잘하는데?”

“너도.”

다가온 칼릭스가 먼저 손을 내밀자, 로이안이 손을 잡으며 일어섰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전생에서 본 스포츠 만화나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아서, 레이블라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레이블라가 느릿하게 다가가자, 칼릭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얘랑 친해졌어.”

“……뭐? 아직 아니거든?”

“안 친해?”

발끈하는 로이안을 향해 칼릭스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로이안은 그의 모습에 숨을 들이켜면서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더듬거리며 답했다.

“뭐, 뭐, 치, 친하게 지내고 싶으면 그러던가!”

……진짜 애네.

로이안의 답변에 또다시 칼릭스가 레이블라를 보았다. ‘나 잘했지?’ 하는 얼굴이었다.

칼릭스가 왜 뜬금없이 ‘친한 것’에 집착하나, 싶어 머리를 굴리는데 문뜩 예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비체라발리 소공자께서 정말 외모가 출중하시대요. 두 분께서 친해지시면 좋을 것 같아요.’

지난날 칼릭스에게 로이안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전쟁에 나서게 된다면 도움을 받을 집안이기도 하고, 더군다나 로이안은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니 친해져서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니. 몽롱한 눈빛으로 항상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그 순간에도 차곡차곡 그에게 자신의 말이 쌓이고 있었다.

내심 감격한 레이블라는 칼릭스에게로 다가가 그를 꼭 안아 주었다. 로이안이 조금 당황하는 듯했지만, 아까 약속한 것이 있어서인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그저 지켜보고 있기만 했다.

“기억해 줘서 고마워. 칼릭스.”

어떻게 이렇게 순수하고 착한 아이가 있을까.

이런 아이가 행복해져야 하는데.

그때, 어디선가 뽀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단단한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에 레이블라가 커다랗게 눈을 뜨고 힘껏 안았던 그를 놓아주었다.

시선을 마주친 칼릭스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던 그의 시선이 멀찍이 떨어져서 탄이라는 사내와 대화를 나누는 비체라발리 공작에게로 향했다.

칼릭스가 다시 검을 쥐고서 레이블라의 곁을 지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비체라발리 공작 앞이었다.

그가 상체를 숙이며 공작에게 말했다.

“한 수 부탁드립니다.”

이에 모든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던 카시우스가 검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로이안이 손길에 레이블라가 멀찍이 비켜서자, 칼릭스의 선공으로 또다시 대결이 시작되었다.

* * *

칼릭스와 비체라발리 공작의 실력 차이는 세 살배기 꼬마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처음부터 명확했다.

칼릭스는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으나, 비체라발리 공작은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르면서 두 손으로 달려드는 그를 완벽하게 막아 내었다. 어찌 보면 비체라발리 공작이 칼릭스를 농락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빠는 역시 자비가 없네.’

로이안에게도 그러했듯, 그는 이번에도 무자비하게 칼릭스를 짓밟고 있었다. 아직 어린애일 때 기를 죽여서 다시는 검을 쥐지 못하게 하고 싶은 건가 의심될 정도였다.

하지만 로이안에게는 둘의 전투가 달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렐은 어떻게 저런 괴물이랑 알게 된 거야?”

“괴물?”

“저거 봐. 아버지 다리가 움직이고 있잖아. 나도 아직까진 아버지의 발을 움직이게 하진 못한다고.”

그러고 보니 매일 로이안이 비체라발리 공작의 발을 이야기하면서 약 올라 하던 것이 생각났다. 자세히 보니 칼릭스와 대련할 때의 그는 확실히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서 만났어?”

“……황궁에서. 칼릭스가 날 구해 줬거든.”

“구해 줬다고?”

“응. 그것도 두 번이나. 정말 칼릭스 아니었으면 로이안이랑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몰라. 진즉에 죽었을 테니까.”

“……정말?”

돌이켜 보면 칼릭스의 도움은 정말 결정적인 순간마다 찾아왔다.

처음에는 독을 먹고 사경을 헤매었을 때.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고 있던 순간에 그가 해독초를 구해다 먹여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죽어 버렸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때 건네준 해독초 덕분에 남은 황궁 생활을 편히 보낼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일찍이 독을 먹고 죽었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황녀 때문에 납치되었을 때도 그의 손에 구해졌다. 누구도 찾지 않았던 그녀를 유일하게 찾아 준 사람이 바로 칼릭스였다.

그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고, 이후 레이블라는 황녀를 구출해 준 공로를 인정받아 비체라발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로이안이 칼릭스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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