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5화
* * *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디로 가길래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까지 바꾸고 로브도 챙겨 입는 거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묻자, 비체라발리 공작이 옅게 웃으며 그녀를 커다란 말 위에 올려 주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뒤에 올라탔다.
“가 보면 알게 될 거다. 너도 좋아할 장소야.”
“로이안, 너도 몰라?”
“응. 모르겠는데. 레이블라 내 말에 타면 안 돼?”
로이안이 자기 승마 실력이 뛰어나다며 소년다운 허세를 부리자, 비체라발리 공작이 조소를 머금었다.
“넌 아직 어리다.”
“하지만 저도 렐과 함께 타고 싶어요.”
“레이블라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 딸은 유리와 같아서…….”
예전부터 계속 유리를 운운하는 것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었다. 딸은 약한 존재라고 단단히 세뇌당한 듯했다.
‘우리 딸은 유리보다도 연약한 것 같구나.’
가끔 펠리시티에서 그런 놀림을 받기는 했었는데. 설마, 출처가 펠리시티인가……?
두 아빠끼리 꽤 친분이 있었다 하니 확실히 신빙성이 있었다.
“자자, 이만 가요! 저 얼른 샌드위치 먹고 싶어요. 제가 만든 샌드위치요!”
“그래, 가자.”
“돌아올 땐 내 말에 타는 거야, 알았지?”
귀찮은 나머지 로이안에게 그러겠다고 약속하자, 서서히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타는 말은 정말로 재미있었다.
스치는 바람을 느끼는 것도 그렇고, 그 속도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도 좋았다. 무패의 기사라는 비체라발리 공작이 실수로 사고를 낼 위험도 없으니, 안정감은 최고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승마를 즐기다 보니 이내 낯선 풍경이 두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넓은 대지에 둘러놓은 울타리와 그 속에 가득 찬 수많은 막사였다.
막사 중심에 금빛 독수리가 새겨진 깃발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고, 반짝이는 갑옷 위로 붉은 망토를 두른 기사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제국 황실의 이름을 짊어진 황궁 기사단이었다.
‘군영에서 피크닉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비체라발리 공작이 이곳에 볼일이 있어서 잠시 머문다고 했었다. 전쟁과 관련된 일인 걸까.
그렇게 의아해한 것이 무색하게도 비체라발리 공작은 깔끔하게 군영을 지나쳤다. 이미 기사들이 경비를 서는 시각마저 완벽히 알고 있는지, 개미 한 마리도 마주치지 않은 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을 더 달리자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규모도 작고, 집들도 왜소해서 고즈넉한 마을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입구부터 떠들썩했다. 입구 쪽으로 다가가자 사람들이 다가왔다.
“헤시온 상단에서 온 분들인가?”
마을의 입구에 선 사내가 먼저 물었다.
비체라발리 공작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거구에 등에는 창을 메고 있는 사내였다. 수염을 제대로 깎지 않아 까칠해 보이다가도 햇빛에 그을린 얼굴에서는 호탕함이 엿보였다.
‘헤시온 상단은 비체라발리의 숨겨진 상단인데.’
헤시온 상단은 비체라발리에서도 상단에 관해 아는 자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은밀한 존재였다. 국경 지대에 머물면서 타국과의 교류를 활발히 하는 소규모의 상단이지만, 주 업무는 타국의 은밀한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상’이기 때문이었다.
상단 일인가?
‘직접 나서다니 되게 중요한 일인가 봐.’
그럼 로이안과 함께 기다리고 있어야겠다, 라고 생각하는데, 불쑥 사내가 말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우리 막내를 보시겠다고?”
사내가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 킬리의 리더요. 탄이라고 부르시오.”
“이전에 연락한 용병은 있나?”
공작의 물음에 그가 마을 안을 향해 고갯짓했다.
“따라오시오. 미리 말하지만 고놈 까칠해서 아가씨나 아드님 호위로 쓰기는 어려울 거요. 워낙 말주변도 없고 의욕도 없어서.”
용병이 의욕 없으면 어쩐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내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제법 그 일 안 하는 용병 꼬마를 무척이나 아끼는 기색이었다.
‘그 아이를 로이안의 호위 기사로 쓰려는 건가?’
저에게는 아이던이 있으니, 아마도 저 사내가 아끼는 아이는 로이안의 기사로 배정될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로이안이 그때 그놈 때문에 따로 시종을 두지 않았지.’
로이안이 직접 데려와 시종으로 쓰던 아이가 ‘토도리아 풀’을 레이블라의 음식에 넣은 적이 있었다.
그 시종은 황제가 시켜서 한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로이안으로서는 자신의 허락도 없이 주제넘은 행동을 했다고 여겼다. 게다가 그 방법이 어머니의 사망 원인과 같은 ‘독’이었기에, 더욱 끔찍하게 생각했다.
그를 내친 후로는 따로 시종을 두지 않은 채 때에 따라 필요한 사람을 쓰곤 했었다.
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해야 할 그이기에 이왕이면 좋은 친구를 만났으면 했다.
이번에 만날 용병이 그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 주면 좋을 텐데.
‘누구지?’
이맘때쯤 이름을 날리는 어린 용병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하면서 사내를 따라 걷다 보니 둥글게 원을 그린 채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중심에는 로브를 쓴 소년과 커다란 사내가 있었다.
“헤리, 멍청아. 그러다가 또 진다.”
“아! 좀 닥치고 있어!”
“휘익! 릭! 그냥 뭉개 버려!”
“릭! 릭!”
“릭, 내가 너에게 30골드 걸었다. 이겨라!”
“뭐라고? 릭한테 걸었어?”
주변에서 소리칠 때마다 중심에 선 사내는 씩씩댔고 소년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여유롭게 검을 맞댔다.
그 뒤로 소년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우아했다. 커다란 검이 그를 향해 다가오는데도, 고운 선으로 검날을 휘둘러 상대의 일격을 가로막고 다시 날카롭게 파고드는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날카로운 금속 파열음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마침내 소년이 자신에게 뻗친 검을 옆으로 쳐내면서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어찌나 몸놀림이 빠른지, 머리에 쓰고 있던 로브가 움직임을 따라 펄럭이면서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던 모습이 살짝 드러났다.
밤을 따다 놓은 듯한 검은색과 예쁜 붉은빛.
아름다운 색채를 품은 소년이 저보다 두 배는 큰 사내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그 순간,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마을을 뒤흔들었다.
“릭!”
“릭 최고야!”
허탈한 듯 웃는 사내와 우아하게 검을 한 바퀴 돌린 후 제 검집에 넣는 소년. 커다랗게 진동하는 환호성.
레이블라는 마치 연극의 한 장면과도 같은 모습을 넋을 잃은 듯 보았다.
이 순간, 레이블라의 머릿속에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 남겼던 편지가 떠올랐다.
‘바다를 보러 가자.’
울컥, 목구멍까지 치미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레이블라가 힘껏 달려 소년의 허리를 휘감았다.
놀란 소년이 움찔대면서 제 허리를 휘감은 팔을 떼어 내려고 했으나,
“나도, 나도 너랑 바다가 보고 싶었어.”
이어지는 목소리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다급히 상체를 돌려 그녀를 마주한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눈빛은 노을빛처럼 아름다운 붉은색이었다.
“이제야 대답했다.”
레이블라는 맑게 웃으면서 다시금 그를 안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만나는 칼릭스였다.
* * *
“뭐야, 몇 달 사이에 키가 많이 컸어.”
레이블라가 까치발을 들고서 칼릭스의 곁에 섰다. 손으로 쓱 재어 봐도 자신이 그보다 작았다.
발꿈치를 내리며 그를 올려다보자, 칼릭스가 웃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북부 대공님의 미소는 정말로 예뻤다. 따스한 빛깔의 붉은 눈동자와 그 왼쪽 눈 아래 찍힌 눈물점까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하지만 희고 고왔던 피부는 전에 비해 까칠했고, 근육은 제법 붙은 듯했지만 살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손등에는 이전에 없었던 상처가 가득했다.
그간 그의 생활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져서 핑, 눈물이 고였다.
“어떻게 지냈어? 도대체 어떻게 지낸 거야?”
“…….”
레이블라는 누가 들을세라 작게 속삭이듯 다시 물었다.
“황제는, 황제가 널 그냥 보내진 않았을 거 아니야.”
황제는 칼릭스의 죽음을 바랐으니 전쟁터에서도 계속 감시의 눈을 붙였을 것이다. 그러니 분명 황궁의 기사와 함께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용병들과 함께 있는 걸까?
“레이블라.”
“응.”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칼릭스가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블라는 제 질문에 답하지 않은 그가 못마땅해 툴툴거리면서 답했다.
“찾아 달라고 부탁했어.”
“나 찾았어?”
“당연하지! 얼마나 찾았는데!”
“……걱정했구나.”
“그럼!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가 편지 하나만 두고 사라졌던 날이 떠올랐다. 종일 펑펑 울다가 황궁 시녀들에게 민폐를 끼쳤었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어떻게 편지 하나만 달랑 남기고 사라질 수가 있어!”
말하다 보니 그때의 감정,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투정 부리듯 서운했던 마음을 쏟아 내고 나니 눈물이 다시 글썽거렸다.
반면에 칼릭스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가 살며시 레이블라의 눈가를 훔쳤다.
“……손이 예전보다 더 거칠어진 것 같아.”
“미안, 아팠어?”
도리도리. 레이블라가 고개 저었다.
그러고는 더 해 달라는 듯이 얼굴을 내밀자, 칼릭스가 잠시 멈칫하더니 그대로 눈가를 쓸어 주었다. 손길은 이전보다 더 다정했다.
“미안.”
“알면 됐어.”
“기뻐, 찾아와 줘서.”
“칼릭스가 내 앞에 있어서 나도 기뻐.”
칼릭스가 사라지고 나서 하루도 그의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신이 직접 그를 전쟁터로 나가라고 종용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살아 있는지. 살아 있다면 건강하게 있는지. 혹시 외롭거나 힘들지는 않은지. 내내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엄마처럼 안절부절못할 때가 많았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마주하니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과 별개로 속상했다.
하지만 자꾸 슬퍼하는 모습만 보이면 그가 속상해할까 봐. 안 그래도 힘든 그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이 싫어서, 레이블라는 생글 웃었다.
그 마음을 아는 건지, 칼릭스가 나른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대뜸 미소를 지었다. 10살 소년의 미소라기엔 어찌나 아름다운지.
순간 넋을 잃을 뻔했다.
그때, 그가 물었다.
“안아도 돼?”
다소 그답지 않은 질문이었다.
조금 의외다 싶었지만, 레이블라는 금세 팔을 뻗었다. 칼릭스가 이에 반응하듯 가까이 다가와서는 감싸 안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누군가 레이블라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내 동생에게 닿으려면 내 허락을 받아야지.”
로이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