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4화
“어디 있어?”
“원래는 이 앞에 계셨는데, 공작님 앞으로 끌려갔어요. 공작님과 도련님은 뒤뜰에서 훈련 중이시고요.”
목에 예쁜 리본까지 착용하고 난 다음, 레이블라는 빠르게 창문으로 다가가 창문 너머를 보았다. 샬럿의 말대로 비체라발리 공작과 로이안이 검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마탑주가 밧줄에 묶인 채 질린다는 눈빛으로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레이블라가 빠르게 뛰어 1층 복도로 가서 먼저 카시우스를 부르려는데, 언제 밧줄을 풀었는지 마탑주가 누구보다도 빨리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시킨 일은 다 했습니다. 꼬마 아가씨.”
그가 말하는 ‘시킨 일’이라는 것은 비체라발리 공작이 죽인 기사들의 뒷정리. 그리고 마을 우물에 물을 담아 달라는 것이었다.
가뭄 때문에 농작물이 잘 자라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를 떼어 놓고 싶은 마음에 부탁했는데, 뜻밖에도 흔쾌히 들어주어서 조금 놀랐었다.
“굉장히 궁핍해 보이는데, 그 정도만 해도 괜찮아요?”
“충분해요.”
사실 그 마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마을에서 막은 물길을 내고 불합리한 과세를 멈추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그건 타국 사람인 레이블라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괜히 서툴게 도와주려다가 그들이 ‘라스텔 제국과 연관이 있었다!’라는 오해라도 받으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차라리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옳았다.
“제가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비체라발리지, 다른 곳이 아니니까요.”
누가 보면 냉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레이블라에게 있어 우선순위는 비체라발리였다. 아직 비체라발리를 위해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했는데,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마탑주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마석에 관해 이야기해 보죠.”
“진짜 원하는 걸 이야기해 주세요.”
“……네?”
“마석을 원해서 저에게 오신 게 아니잖아요?”
마석의 판매는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일임하겠다고 선언했고, 그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진 터였다. 그런데 굳이 자신을 찾아와 마석을 운운하다니 불필요한 행동이었고, 그 저의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물었더니, 마탑주가 키득대며 웃었다. 조금 오싹해져서 상체를 물리고 싶었지만, 꼿꼿이 참고 기다리자 그가 가만히 상체를 붙이며 작게 속삭였다.
“피를 좀 주세요, 아가씨.”
라고.
……얘 미쳤나 봐.
스치듯 든 생각에 슬그머니 상체를 뒤로 물리면서 그를 보았다. 얼굴에 꺼림칙해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찰나의 순간에 감정이 내비친 모양이었다. 그가 픽 하고 웃었다.
“뭘 할 생각은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펠리시티 피에 무엇이 있어서 정령을 불렀나, 해독제가 없는 독을 먹고 어떻게 살아남았나, 같은 거요.”
살짝 미간을 찡그렸던 레이블라가 슬쩍 마탑주의 시선을 피해 그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아빠가 저 뒤에서 칼을 던지려고 하는 것 같아요.”
검의 정점에 다다른 사람이라 그런 걸까.
마탑주가 작게 속삭였음에도 비체라발리 공작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안다는 듯, 죽일 듯이 마탑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마탑주가 갑자기 레이블라를 덥석 안아 들었다.
“이러면 못 던지겠죠?”
“내려놔.”
어느새 가까이 온 비체라발리 공작이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곧이어 로이안까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마탑주가 싱글대며 대꾸했다.
“피를 조금만 나누어 주시면 돌려 드릴 텐데.”
꼭 피를 뽑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
‘역시 미친 사람은 가까이하는 게 아니었는데.’
레이블라는 자신이 한 행동을 짧게나마 후회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마탑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혹시 빛을 머금는 식물을 구하고 있지 않나요?”
“……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레이블라가 웃었다. 무척이나 비밀이 가득한 미소라서 마탑주는 끄응, 소리를 내며 답답함을 삼켰다.
“실험에 필요한 식물이 있다 들었어요. 빛을 쬐면 죽는 식물을 키워야 하는데 그 식물을 키울 때 반드시 빛이 필요하다면서요? 저는 그 식물 키울 수 있는 방법 알고 있는데. ‘해티’라는 식물 찾아보세요.”
이에 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제가 실험하는 주제에 관해서는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만.”
“제가 이전에 속했던 가문의 이름을 잊으셨나요?”
레이블라가 싱긋 입꼬리를 올리자, 그가 크게 숨을 토해 내며 웃었다.
“저도 그 답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키우는 법을 몰라서요.”
“제가 알아요.”
“아가씨께서요?”
“네. 하지만 방법을 알려 드리지는 않을 거예요. 가문의 비밀이라서요.”
“펠리시티의?”
“비체라발리요. 저는 이제 비체라발리니까요.”
레이블라가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그가 내가 졌다는 얼굴로 레이블라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피는, 안 주실 건가요?”
“해티를 포기하시는 거예요?”
“제가 우물도 채워 놓고 왔는데…… 그거 쉬운 일 아닌데.”
“고마워요, 그래서 해티 드린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아빠가 마석도 몇 개 더 드릴 거예요. 필요하시잖아요, 마석.”
“몇 개든 내어 주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카시우스가 레이블라를 안았다. 레이블라는 카시우스의 품에 안겨 마탑주를 다시금 응시했다.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웬만해선 원하는 걸 들어주려고 했는데.’
그의 제안을 무시하고 화제를 돌린 것은 그의 말에서 수상쩍은 점을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해독제가 없는 독을 먹고 어떻게 살아남았나, 같은 거요.’
레이블라가 해독제가 없는 독을 먹은 적은 단 두 번이었다.
한 번은 ‘감사의 날’에 먹었던 독.
또 한번은 첩자가 되라며 황제가 직접 하사한 독.
전자라면 세상 모두가 ‘해독제가 없는 독’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만약 후자라면?
그가 황제와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에게 제 몸에 있는 작은 것조차 내어 주고 싶지 않았다.
비체라발리를 위해서라도 그와 멀어져야 했다.
* * *
“이제 돌아가실 거예요?”
식사를 마치고, 비체라발리 공작이 입에 넣어 주는 사과 한 조각을 오물거리며 레이블라가 물었다. 그러자 비체라발리 공작이 로이안에게도 사과 조각을 건네며 답했다.
“그전에 갈 곳이 있다. 레이블라, 너도 함께.”
“저도요?”
“헤넌이 가족끼리는 피크닉을 가야 한다고 하더군.”
피크닉?
“피크닉 가는 거예요?”
레이블라의 물음에 카시우스가 끄덕였다. 갑작스러웠다. 세 사람이 함께하는 피크닉이라니!
“예전 생각이 나요! 셋이 함께 정원에서 피크닉 한 적 있었잖아요.”
때는 바야흐로 두어 달 전. 로이안이 공작과 물고 뜯고 할퀴던 시절. 레이블라는 로이안과 카시우스를 화해하게 해 주겠다는 일념으로 같이 소풍을 즐길 기회를 마련했었다.
물론 결과는 실패.
‘다시는 부르지 마!’
단지 함께 간식을 먹으려 했을 뿐인데, 뭐가 그리 뿔이 났는지 갑자기 로이안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분위기를 망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씩씩대는 로이안과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만히 차를 들이켜는 비체라발리 공작을 보며 얼마나 진땀이 났는지.
레이블라는 분위기를 풀고자 그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건네기도 해 보았지만,
‘로, 로이안! 이거 맛있어!’
‘저리 치워!’
그가 손을 쳐내는 바람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졌고, 피크닉은 그대로 끝이 나 버렸다.
나중에 듣기로 그날 로이안의 분노는 엄청나게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공작님께서 도련님이 호수에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 멀찍이서 자기도 돌을 던지셨는데, 그 돌이 수면을 타고 더 멀리 가셨어요.’
둘이 붙여 놓으려고 공작을 호수 가까이 보냈을 때 그런 일이 생겼을 줄이야.
공작이 느지막하게 다가와서는 옆에서 완벽한 물수제비를 하고 있으니 저를 한심하게 생각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레이블라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아련한 눈빛을 하자, 로이안의 얼굴이 체리처럼 붉게 타올랐다. 이제는 양심 있는 아이로 거듭난 터라 지난날의 태도가 조금은 부끄러워진 듯했다.
“이, 이번에는 안 그럴 거야…….”
“응. 내가 케이크 내밀면 먹어 줄 거지?”
“그럼! 당연하지!”
“망고 케이크여도 먹을 거야?”
“그, 그건…….”
“좋아! 샬럿에게 망고 케이크 준비해 달라고 해야지.”
레이블라가 쪼르르 뛰쳐나가자, 로이안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다급히 뒤따랐다. 그와 장난을 치며 웃고 있으니 확실히 가족에게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새삼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