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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3)화 (83/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3화

“너, 넌 누구야!”

“묻고 있지 않나. 감히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느냐고.”

카시우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검을 가볍게 쳐내었다. 하늘 높이 솟은 검은 기사의 뒤편으로 날아가 거친 소음을 내며 떨어졌다.

부들부들 떠는 기사의 목에 비체라발리 공작의 은빛 칼날이 닿았다.

“말하지 않을 텐가?”

“아, 아무 짓도…….”

“누굴 바보로 아는 건가.”

쯧. 비체라발리 공작이 혀를 찼다.

“로이안.”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튀어나온 작은 손이 그녀의 귀를 막았다. 그리고 눈앞에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 로이안이었다.

“늦게 와서 미안해.”

귀를 어떻게 막은 건지, 먹먹하니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로이안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말만큼은 정확하게 읽혔다.

‘마음고생 많이 했나 보다.’

며칠 만에 만난 로이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했다. 식사하지 못한 것인지 조금 살이 빠진 듯했고, 곱고 고운 피부는 까칠했다. 눈 밑이 거무죽죽한 것이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그의 손이 귀에서 떨어졌다. 동시에 로이안이 레이블라를 힘껏 품에 안았다.

“걱정했어.”

떨리는 목소리로 꼭 안아 주는데,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꽤 잘 버티고 있다 생각했는데. ‘어쨌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사실은 불안했던 걸까.

“레이블라.”

삽시간에 두 기사를 처리한 비체라발리 공작이 다가왔다. 그리고 레이블라를 힘껏 안아 들었다.

레이블라는 그를 꼭 안으면서 너른 품에 기대었다. 쿵쿵, 제 몸까지 울리는 아빠의 심장 소리와 저를 토닥이는 손길을 받았다.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왔다.

가족이었다. 그녀의 가족이 거짓말처럼 곁에 나타났다.

“정말이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구나.”

다정한 비체라발리 공작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왔다.

“……죄송해요.”

“괜찮으냐.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다정하게 물어 오는 말에 레이블라가 끄덕였다. 그러자 카시우스의 손이 레이블라의 볼을 살며시 꼬집었다.

“살이 좀 빠진 것 같구나. 겨우 찌워 놨더니.”

“저보다는 아빠랑 오라버니가 많이 수척해진 것 같아요. 식사는 하셨어요?”

“누가 누굴 걱정해?”

로이안이 아래서 투덜거렸다.

“헤어지기 전보다 홀쭉해졌잖아. 거기다가 옷은 또 그게 뭐야. 속상하게.”

레이블라가 새삼스럽게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얗던 속치마는 풀물이 들어 얼룩덜룩했고 흙바닥을 뒹굴어서인지 온몸에 먼지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게다가 머리는 산발을 넘어서 원시인에 가까웠다. 꽃만 귀에 꽂으면 정신이 살짝 나간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새삼 조금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애써 민망함을 숨기며 레이블라가 씩씩하게 말했다.

“옷이 너무 비싸서 그래. 그거 입고 있다가 납치당할까 봐 벗어서 버렸어. 그래도 보석은 있어! 주머니에 몇 개 주워 뒀어. 잘했지?”

“……하. 내가 못 살아.”

속상한 얼굴로 툴툴대던 로이안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면서 까치발을 들어 공작의 품 안에 있는 레이블라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내가 지켜 줬어야 했는데.”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로이안. 많이 걱정했지?”

로이안이 힘없이 끄덕였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가라앉은 분위기에 레이블라가 카시우스에게 말했다.

“그래도 저, 주웠어요. 알! 잘했죠?”

그녀의 말에 비체라발리 공작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래, 잘했구나. 우리 딸이 무슨 모험을 했는지, 천천히 들어야겠어.”

“저도요. 저도 하고 싶은 말이 하늘부터 땅만큼 있어요.”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정령을 본 것과 정령 때문에 드래곤 알을 만난 것. 그 알 때문에 동굴 안에 갇혀서 허우적대다가, 결국 이 마을에 오게 된 일까지. 그리고 아이들과 보낸 며칠간의 일들도 이야깃거리였다.

새삼 짧은 사이, 많은 일을 겪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그런데 어떻게 오신 거예요?”

레이블라가 이 마을에 오게 된 이유는 드래곤 레어에서 이곳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마탑주를 잡아다가 네가 있는 곳을 찾아내라고 했다.”

“예! 제가 찾았습니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자기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 사내가 불시에 대화에 끼어들며 모습을 드러냈다.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최소 16살에서 18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오렌지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한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응? 저 사람, 혹시?’

레이블라가 눈을 크게 뜨면서 바라보자, 그가 싱긋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저는 필 레이턴. 마탑주입니다. 앞으로 아가씨의 고객이 될 사람이지요.”

마탑주라면 2부에서 황녀의 발 닦개가 되는 남주 후보였다.

‘쟤, 미친놈이었는데.’

서브 남주답게 황녀에게 완전히 돌아 버린 놈이라서 그런지 누가 황녀에 대해 작은 불만이라도 토해 내면 웃는 표정으로 아무렇게나 사람을 죽이고, 죽이면서 웃는 미친 사이코패스였다. 어떤 면에서는 소설 속 비체라발리 공작보다도 더 가까이해선 안 될 인물이었다.

슬금, 레이블라가 비체라발리 공작의 품으로 숨어들었다. 미친놈에게서는 멀어지는 것이 정답이니까.

* * *

찰랑찰랑. 귓가를 간질이는 물소리에 레이블라가 눈을 뜨자, 바로 눈앞에 오리가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서 누군가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레이블라의 몸을 씻기는 중이었다.

“……샬럿?”

“네, 아가씨.”

익숙한 손길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당연하다는 듯이 답이 돌아왔다.

몽롱한 눈을 비비려 하니 샬럿이 비눗물이 눈에 들어간다며 직접 닦아 주었다. 그제야 눈앞이 깨끗하게 보이며, 샬럿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샬럿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암살자 아니셨나요.

“미안해.”

레이블라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제 손에 묻은 비눗물을 보고 손끝을 말았다. 그러자 샬럿이 그 손을 살며시 잡고 배시시 웃었다.

“뭐가 미안하세요. 아가씨께서 고생하셨는데. 얼굴이 물에 녹은 솜사탕처럼 되셨어요.”

“……그래?”

“얼른 식사하셔야겠어요. 이제 이제 깨끗한 물로 씻으시면 돼요. 얼른 씻고 옷 갈아입어요.”

레이블라는 샬럿의 다정한 손길을 받으며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 레이블라가 있는 장소는 제국의 끝자락에 위치한 어느 마을.

루빈디시로 돌아가기 전에 비체라발리 공작이 만날 사람이 있다고 해서 찾아온 장소였다.

‘너도 씻고 쉴 시간이 필요하니까.’

물론, 레이블라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눈총을 받는 존재인데, 후줄근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머물게 되었는데, 숙소가 제법 안락하다 보니 눕자마자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것도 ‘또다시 사라지면 곤란하다’라고 말하는 비체라발리 공작의 곁에서.

‘냄새 많이 났을 거 같은데…….’

킁킁. 괜히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이제 막 샤워를 한 탓에 뽀송뽀송 포근한 향만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그때였다. 쿵. 쿵.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 보니 선반 위에 알이 있었다.

왜 자기를 자꾸 내버려 두느냐는 듯이.

‘저거 언제 버리지……?’

하는 행동을 봐서는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은데. 그냥 버렸다가 비체라발리에 벼락이라도 내리면 어떡하지.

한숨과 함께 알을 품자, 부르르 떨던 알이 제 자리를 찾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아가씨, 그 알은 뭔가요?”

가늘게 뜬 눈으로 알을 노려보는 샬럿의 눈빛이 매서웠다. 당장에라도 깰 기세라 레이블라가 다급히 설명했다.

“드래곤 알이야! 주웠어.”

“아. 도마뱀이 아가씨를 힘들게 하는 거군요. 깰까요?”

……응? 샬럿. 드래곤이라니까?

하지만 샬럿은 솜사탕이 찌그러지는 건 아닐까 염려하고만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깨려고 들다가 페릴세테의 기사들처럼 전기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레이블라는 재빨리 샬럿의 주의를 돌렸다.

“마탑주는?”

“아, 그분께서 아가씨를 무척이나 뵙고 싶어 했어요.”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저에게도 마석을……!’

그렇게 난리 쳤었으니까.

얼마나 마석이 필요했으면, 가장 정교하고 힘이 많이 필요하다는 워프 마법을 직접 사용하여 여러 명을 이곳까지 데려다줄 정도였다.

‘워프가 편하긴 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제약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에는 워프 게이트를 각 지역에 만들고 그것을 이용했다고도 하는데, 문제는 그 워프 게이트를 통해 적국의 침입이 쉬워졌다는 점에 있었다.

갑작스러운 침략과 전투. 전쟁이 빈번해졌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사라졌다.

이후 대다수 워프 게이트가 사라지고, 마차나 말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황녀는 사용하잖아?’

2부 중반쯤 지나서 황녀는 그 오렌지빛 머리의 마탑주를 홀려서 기술을 빼내어 자유롭게 워프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마탑주와 한번 거래를 해 봐?’

황녀가 해냈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것이 없잖아?

조금, 아니, 심하게 무섭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지만 직접 마주하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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