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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2)화 (82/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2화

“아니. 행상인인 롭 아저씨가 그러는데, 이번 전쟁이 일어난 건 다 황제가 국보를 강탈해 갔기 때문이랬어.”

“바보야. 그게 아니라, 다른 지역도 우리처럼 당한 곳이 몇몇 있다고 했어. 그래서 다른 나라랑 손잡는 거래.”

“내가 듣기로는 황제가 우리나라 왕자를 죽였다던데. 황녀의 탄생 연회 때 참여했는데, 죽어서 돌아왔대. 그 이후로 왕이 미쳤다고 했어.”

전쟁이 일어난 이유로 꼽히는 게 한둘이 아닌데, 공통점이 황제라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왕자는 왜 죽였지? 혹시 황녀 핏줄 가지고 헛소리한 건 아니겠지?’

소설 속에서도 종종 황녀의 출신을 두고 헛소리를 지껄인 사람들이 나왔다. 어머니가 사생아라는 둥, 진짜 아빠는 누군지 모르지 않냐는 둥. 그런 이야기들.

당연히 딸 바보 황제는 그런 놈들을 두고 보지 않았다. 나쁜 말을 지껄인 자가 누구든지 철저하게 응징해 주었었다.

상대가 귀족이면 멸문시켰고, 상대가 왕족이라면 목숨을 앗는 것과 함께 그 나라를 무너뜨리기까지 했다.

혹시, 이번 전쟁도 그러한 경우인가?

‘주변 인간들은 말리지 않고 뭘 한 거지?’

보나 마나 뻔했다. 말리든 말든 황제는 당연하게 왕자의 목숨을 앗아 갔을 테고 신하들은 ‘주변 국가와의 관계가…….’ 어쩌고 꿍얼거리면서도 결국 ‘그래도 죽어 마땅한 놈이었습니다.’라고 했겠지.

‘……이래 놓고 이 전쟁을 또, 비체라발리에게 나가라고 했던 거야?’

독자였던 시절에는 사실 전쟁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일어났다고 하면 일어난 것으로 알았고, 해결되면 해결되었다고만 보았었다.

그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누가 그 전쟁에 참여했고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주인공이 이겼구나, 했을 뿐.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의아했다.

도대체 왜 비체라발리 공작은 소설 속에서 악역으로 묘사됐을까. 실상 미친놈 뒤치다꺼리만 하는 불쌍한 사람이었는데.

정작 주인공인 황제는 분란만 일으키고, 할 일은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전부 미뤄 버린 인간이었다.

폭군이란 이름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소설에서는 폭군이었던 황제가 황녀 덕에 개과천선하는 것으로 그려졌는데, 직접 겪는 현실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황녀에게만 지극정성일 뿐이지.

이런 놈을 언제까지 황제라고 떠받들어야 하는 걸까?

* * *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아이들과 잔뜩 음식을 모은 레이블라는 다시금 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평소 고즈넉한 느낌이 들던 마을이 떠들썩했다. 그 중심에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있었다.

“수, 수상한 자들이라니요…….”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 기사들의 발치에서 목소리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네 명의 기사들의 표정은 비웃음으로 가득했다.

“그러니까, 너희가 수상한 녀석을 숨기지 않았느냐는 말이야. 너희는 전적이 있잖아.”

“하오나 저희는, 저희는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

기사들이 낄낄 웃었다.

“누가 그래?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기사 하나가 서늘하게 말하면서 어르신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리가 말 한마디만 하면 이 마을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서, 설마…….”

“우리에게 잘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잖아? 응?”

어르신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결국 보다 못한 다른 이가 가져다준 몇 푼을 받고서야 기사들의 행패가 멈추었다.

짤랑짤랑. 금화가 든 주머니를 흔들며 그들이 말했다.

“누군가 정보를 제국에 흘리고 있어. 수상한 녀석들이 있으면 신고하라고.”

“수, 수상한 자들이라면…….”

“누구겠어? 첩자지. 한 놈 잡아서 털어 보니 제국 녀석들이 코 묻은 애들까지 동원해서 정보를 수집한다더군.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유유히 떠나가면서 남기는 말이 심상치 않았다. 이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숨어 있던 레이블라가 바짝 긴장한 채 도르륵 눈을 굴렸다.

다행히 제 곁에서 같이 숨어 있는 아이들은 익숙해진 상황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품에 안은 버섯을 보면서 침을 꼴깍 삼키기도 했다.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사람이 딱 하나 있지 않아?

아이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했지만, 그래도 더는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어른들의 경계가 한층 더 강해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다행이야.’

혹시나 해서 어른들이 있는 곳으로는 가지 않았는데, 그게 바람직한 선택이 될 줄이야.

만약 저들이 자신에 대해 알았다면 벌써 기사들에게 알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제국의 첩자라니. 이곳까지 들어오는 건가?’

혹시, 만날 수 있으려나?

‘아니야. 괜히 얽혀서 좋을 리 없어. 모른 척하자.’

멍청하게 그 존재를 들킨 것만 해도 괜히 얽혔다가는 같이 휩쓸려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계획대로, 공국 내부에 있는 비체라발리 상단과 연락하여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이틀 후면 온다고 했지.’

다행히 상인이 오는 날이 머지않았으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빠져나가서 그들이 오가는 골목에서 기다리는 편이 더 안전할 듯했다.

결심을 마친 레이블라가 입가에 침이 고인 아이들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는 떠나야 할 때였다.

* * *

모두가 잠든 시각.

레이블라는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무리를 벗어났다.

아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오히려 이렇게 되어 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은 아이들이 불쌍한 표정으로 저에게 손을 내민다면, 쉽게 거절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저벅저벅. 달빛이 비치는 환한 길을 걸으면서 지난 며칠을 반추해 보았다.

상황은 최악이었지만, 제법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내가 바리베 왕국으로 갔다면 이런 생활을 했을 수도 있겠다.’

보호자 없이 거리를 떠돌면서 음식을 구하느라 허덕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여름이라 그나마 괜찮지만, 추운 겨울이 찾아오면 이것마저 쉽지 않을 터였다. 하루하루가 고역일 것이 틀림없었다.

……누군가를 밀고하고 싶을 만큼.

레이블라는 제 앞을 막아선 두 명의 기사와 그 기사들 뒤쪽에 숨어 와들와들 떨고 있는 아이를 응시했다.

이가 빠진 채 싱글벙글 웃던 마을의 아이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선 기사들은 아까 전, 마을에서 어르신들을 괴롭히던 놈들이었다.

‘저 아이가 말했구나.’

어쩐지 저녁 식사 때부터 묘하게 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다. 내도록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해서 조금 신경이 쓰였는데. 속으로는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나 보다.

“수상한 꼬마가 있다고 했는데, 너냐.”

기사가 뚜벅뚜벅 다가와서는 레이블라의 앞에 섰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면서 눈으로 쓱 훑는 행동이 몹시 거만했다.

“확실히. 근처 쓰레기 더미 아이들과는 다른데. 어때?”

그가 뒤쪽으로 머리를 살짝 젖히며 묻자, 뒤에 있던 기사가 천천히 다가와 앞선 기사와 마찬가지로 레이블라를 뜯어보았다. 그러면서 가까이 고개를 내밀어 킁, 킁. 냄새를 맡고서는 중얼거렸다.

“더러운 냄새도 안 나고 피부도 하얀 데다가 예쁘장한 게, 귀족 같아 보이는데?”

“귀족? 얘가?”

거만하게 서 있던 기사가 상체를 숙여 레이블라에게로 다가왔다. 지그시 보는 눈빛이 더러웠다.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이 근방에 그럴 만한 집이 없잖아.”

“그럼 혹시 노예상이 흘리고 간 애인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만한 말투의 기사가 레이블라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얼굴을 들어 올렸다. 달빛을 받은 레이블라의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났다.

“그럴 수도 있겠네. 옷도 그렇고, 애가 곱상한 것도 그렇고. 목소리도 고운 게 딱 잘 팔리게 생겼는데. 데려다주면 돈 좀 만지려나?”

키득키득하는 꼴을 보니 금세 부푼 꿈에 젖은 듯했다.

‘노예상은 비체라발리에서 손대지 않은 사업인데.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이 사람들과 거래를 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가진 보석을 내어 주고, 놓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이 사람들을 신용할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어려운 시기에 불쌍한 사람들을 약탈하는 녀석들이니까.

다른 방법은 비체라발리와 통하는 상단의 이름을 대고 그쪽과 거래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드는 건데.

“그냥 우리가 팔면 안 되나?”

……이미 탐욕에 찌들어 버린 놈들에게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노예상이나 날 사간 사람에게 부탁해야겠네.’

비체라발리의 상단에게 편지를 보내 달라고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하겠지만, 그 정도야 감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를 데리고 가려는 거친 손길에도 반항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래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알에서 갑작스럽게 스파크가 튀더니 그 전류가 레이블라를 잡고 있던 기사의 갑옷으로 흘러 들어갔다.

감전된 기사는 끔찍하게 비명을 지르면서 레이블라를 뿌리쳤다. 바닥을 뒹구는 기사의 모습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에 다른 기사가 재빨리 검을 들었다.

그 검 끝이 향한 곳은 레이블라의 목이었다.

뜻밖의 상황에 레이블라가 눈을 꼭 감았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도 아픔이 찾아오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뜨자, 조금 전 그녀를 공격하려던 검이 보였다. 그리고 그 검을 가로막은 또 다른 검이 있었다.

그 검의 주인은…….

“감히 내 딸에게 무엇을 들이대는 것이냐.”

아빠.

카시우스 비체라발리 공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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