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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0)화 (80/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80화

드래곤 레어는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곳, 드래곤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아니었나?

갑자기 그런 곳에 똑 떨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드래곤’이 아니고서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레이블라의 시선이 다시금 ‘고귀한 알님’에게로 향했다.

“……너, 드래곤 알이야?”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는데,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알이 흔들거렸다.

“진짜로?”

흔들흔들.

환장하겠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그, 그러니까 여기가 엄청나게 높은 산이라는 말이지? 너는 드래곤이고?”

이어 레이블라의 떨리는 시선이 우쭐대듯 얼굴 주변에서 팔랑거리는 나비에게로 향했다.

“그럼 너는 정령이고……?”

팔랑팔랑. 그 말이 정답이라는 듯이 빛을 펑펑 터트려 댔다.

“……전설이 모두 사실이었다니.”

그거 다 개소리 아니었어?

그럼 뭐야. 지금 이곳에 온 이유가 전부…….

“……내가 한 말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거지?”

이게 다 스스로 판 함정이었다니.

“내가 왜 거기서 그런 소릴 했을까.”

초대 펠리시티 이야기를 허투루 들었다. 자신은 그 후손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을 때 좀 더 예민하게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축복의 나무 앞에서 뭔가 찝찝하더라니.’

그제야 먼 과거 아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돼.’라고 했던 것이었다.

아마도 말에 따라 정령이 장난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펠리시티의 피를 이은 사람들에게서는 간간이 일어나는 일인 모양이었다.

“왜 이제야 생각난 거지?”

한숨이 나왔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탓에 조금, 아니 많이 위험해지기는 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한숨 쉬면서 자책할 시간에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레이블라가 다시금 마수, 아니 드래곤의 알을 불렀다.

“‘용알’아.”

일단 친해지기 위해선 이름부터 불러 줘야 하는 법. 이름을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대충 지어 불렀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답하듯 흔들리던 알이 조용했다.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무 귀여운 이름이었던 걸까 싶어 좀 더 위엄을 살려 보기로 했다.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고 대단한 드래곤님?”

흔들.

태어나지도 않은 주제에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다.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레이블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돌려보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다시 조용해졌다.

정말 자신에게 왜 이러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알에는 입이 없는 걸까.

“여기에 드래곤님이 있었다는 사실은 절대 알리지 않을게요. 죽을 때까지 다시 찾아오는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욕하려면 쟤를 욕하세요. 쟤가 데려온 거예요.”

레이블라가 힘껏 손가락을 뻗어 나비를 가리켰다. 그러자 나비가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더듬이를 파들파들 떨기 시작했다.

뭐. 왜. 어쩌라고. 너 맞잖아?

“네? 제발요.”

양손을 모아서 파리처럼 싹싹 빌어도 보았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대치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반응 없는 알을 앞에 두고 염불을 외고 있자니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아! 그럼 어쩌라고! 비밀로 한다니까. 못 믿겠으면 같이 가든가!”

참다못한 레이블라가 빽 하고 소리쳤는데.

흔들흔들.

알이 세차게 흔들렸다.

“……같이 가겠다고?”

흔들흔들.

싫은데…….

드래곤 알의 귀중함을 모르지 않았다. 저 짱돌 같은 것을 상전처럼 모시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나랑 같이 가려는 거야?”

혹시 드래곤 레어에 들어온 벌을 주려는 것이면, 벌을 줄 대상은 바로 저 나비였다. 애초에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모두 저놈 탓이었다.

그렇게 열변을 토했는데. 알이 잠잠해졌다.

그런데 그 잠잠한 모양새가 아까처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알이 할 말이 있다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부터가 터무니없었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잠시 후, 가만히 있던 알이 흔들흔들 움직였다. 마치 잡아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찜찜하기는 했지만, 이곳을 나갈 방법이 하나뿐인지라 결국 레이블라가 양손으로 알을 잡고 품으로 당겼다. 원래 제자리였다는 것처럼 찰싹 안겨 드는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이겠지.

‘여기만 빠져나가면 대충 아무 데나 버려야겠다.’

속으로 다짐하면서 말했다.

“주웠으니까 빨리 데려다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등불처럼 앞길을 밝히며 나아가는데, 꾸불꾸불하고 거친 길만 이어지던 아까와는 달리, 가는 길이 편안했다.

그렇게 얼마간 나비를 따라가니 마침내 바깥이 보였다. 바깥에서부터 눈이 부실 만큼 밝은 빛이 쏟아져 들었다. 그 너머에는 울창한 숲이 있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동굴을 탈출했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달려 나갔다.

축복의 나무가 있던 숲이겠지, 싶었는데.

‘……여긴 또 어디지?’

낯선 숲속 마을이 눈앞에 나타났다.

* *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대단한 드래곤님. 도대체 여기가 어디죠?”

가까운 나무숲으로 들어간 레이블라가 알을 향해 물었다.

집으로 가기로 한 거 아니었나? 왜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마을에 똑 떨군 거지?

레이블라의 질문에 답하듯, 알이 흔들거리더니 갑자기 알을 중심으로 강한 바람이 훅 휘몰아쳤다.

레이블라에게는 그저 분홍색 머리칼이 흩날리는 정도의 실바람으로 느껴졌지만, 주변 나무들은 태풍이라도 맞은 양 요동쳤다. 나뭇가지가 꺾일 듯이 휘어지고 이파리가 흩날렸다.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바람이 멎으며 숲이 다시 고요해졌다.

분명, 조금 전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어쩐지 몸이 조금 무거워진 듯했다.

의아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태양이 조금, 아주 조금 일그러져 보였다. 결정적으로 저 너머에는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곳은 평온하기만 했다.

……결계?

“설마, 결계를 보수하려고 날 여기로 끌고 왔다고?”

다소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집으로 보내 준다면야 이 정도는 괜찮았다. 그럴 수 있지.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그럼 이제 집으로 보내 줘. 비체라발리 공작성. 위치는…….”

정말 세세하게 설명하고 또 설명했건만 알은 잠잠하기만 했다. 너를 데려다줄 힘은 남아 있지 않다는 듯이.

이거 사기당한 건가.

“0살 사기꾼은 내가 처음 본다. 진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사기부터 친다니.

커다란 돌 위에 알을 내려놓고 한 차례 설교를 했지만,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나풀거리며 따라오던 정령마저 제 일이 아닌 양 사라져 버린 후라, 어디 하소연을 할 데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 상황을 스스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저 마을에 가서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알아봐야겠네.”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그때도 마을이 보인답시고 뛰어들었다가 고생했던 터라 찜찜하기는 하지만, 별달리 방법이 없었다.

“문제는 내 옷인데.”

처음으로 영지민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행사라면서 밀리아가 엄청나게 힘을 준 상태였다. 다행히 마수의 알을 찾아 쏘다녀야 할 것을 고려해 치렁치렁한 의상은 아니었지만, 여기저기 박힌 비싼 보석과 섬세하게 수 놓인 자수에 아름다운 레이스. 고급스러운 옷감. 누가 봐도 평민이 입을 만한 옷은 아니었다.

잠시 고민 끝에 레이블라가 겉옷을 벗었다. 혼자서는 벗기 힘들어서 끙끙대며 한참을 애써야 했다.

하얗게 나풀대는 잠옷 같은 속치마만 남긴 레이블라가 턱 하니 바닥에 앉아 겉옷에 달린 자잘한 보석을 떼어 냈다. 혹시나 돌아갈 때 돈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남은 옷은 대충 수풀 어딘가에 숨겨 버렸다.

그러고 나서 바닥을 뒹굴뒹굴 굴렀다. 새하얗던 옷은 금세 수풀의 물이 들어 얼룩덜룩해지고, 머리카락은 볼품없이 흐트러졌다.

“완벽해.”

근처에 있는 물웅덩이에 모습을 비추어 보니, 어딜 봐도 귀족으로 생각되는 꼴은 아니었다. 조금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럼 슬슬 마을로 가 볼까.’

때마침 한 무리의 아이들이 어딘가를 행해 가는 모습이 레이블라의 초록색 눈동자에 포착됐다.

그대로 달려 나가려니, 바위 위에 둔 사기꾼 알이 흔들거렸다. 자길 데려가라는 것처럼.

무시하자니 알을 깨고 나와서 복수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덜컥 무서워졌다. 혹시나 힘이 다시 충전된다면 저를 돌려보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를 으득 갈면서 한 손에 알을 들어 올린 레이블라가 숨을 고르고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얘들아!”

무척이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처럼, 친근하고, 발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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