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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78)화 (78/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78화

    주의를 돌리려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임에도 제대로 답하고자 가만히 고민하는 동생의 모습이 참 귀엽고도 성실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한참을 고민한 끝에 레이블라가 답을 내었다.

    “그래?”

    “응. 하지만 만약 정령이 존재한다면 여기 있을 것 같기는 해. 아니, 있었으면 좋겠다. 혹시 알아? 정령이 있으면 나에게 멋진 마수의 알을 선물해 줄지.”

    “마수의 알이 갖고 싶어?”

    “마수 나름이지. 드래곤 알이면 갖고 싶을 것 같은데. 멋지잖아.”

    로맨스 판타지하면 역시 드래곤 애완동물 하나쯤은 있어야지. 애완 드래곤은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뭐,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는 없었지만.

    레이블라의 말에 로이안이 키득대면서 웃었다.

    “저번에도 관심을 보이더니. 우리 동생 진짜 드래곤 좋아하는구나. 이 오라버니가 동생을 위해서 얼른 드래곤 레어라도 털어야겠다.”

    “10년 후쯤이면 로이안도 가능할지도 몰라.”

    “그래도 내가 그전에는…… 렐?”

    로이안의 말이 뚝 끊겼다. 의아해하며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몸 주변으로 작은 불빛들이 퐁퐁 나타나기 시작했다.

    “응?”

    어라?

    “……이게 뭐야?”

    그러더니 그 빛들이 모두 투명한 나비의 형태로 변해 갔다. 빛나는 나비들이 레이블라에게로 몰려든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렐!”

    다급히 로이안이 레이블라에게로 다가갔지만, 빛이 그를 막듯 밀어냈다. 그사이에도 빛이 레이블라를 중심으로 몰려들며 태양처럼 구를 이루더니, 이내 터지며 빛줄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도저히 눈을 뜨고 쳐다볼 수 없는 강렬한 빛이었다. 로이안은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레이블라는 사라진 후였다.

    * * *

    “……사라졌다고?”

    낮게 깔린 차가운 음성이 조용했던 집무실의 공기를 흔들었다. 그 목소리와 함께 풍기는 기운은 평소와는 달리 조금도 정제되지 않아 숨이 막힐 듯 날카로웠다.

    “어쩌다가.”

    되묻는 카시우스의 목소리에 살기가 어렸다. 주춤한 아이던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주군. 하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정말로 처음 보는 빛이…….”

    아이던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분명,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의 아가씨는 여느 때처럼 귀여웠고, 도련님은 언제나처럼 늠름했다.

    특히 도련님은 정말로 믿음직했다. 어린 아가씨를 지키겠다는 의지하에 곁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때에 맞추어 아가씨에게 말을 걸어 주기도 하고, 앞길에 돌멩이를 치워 주기도 했다.

    덕분에 아가씨의 주의가 많이 흐트러져서 실버 울프 기사들이 들키지 않은 채 몰래 따라갈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평화로웠었다.

    물론, 수십 명의 기사들이 꼬꼬마들이 노는 축제에 몰래 숨어들었다는 사실부터가 평화와는 거리가 멀기는 했지만.

    아이들만 참여하는 앙증맞은 행사에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몰래 숨어든 이유는 단 하나.

    원로회 가신들이 그의 아가씨를 대상으로 불손한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자객들이 제법 나타났고 아이던과 기사들은 몰래 처리했었다. 몰래 처리한 이유는 카시우스, 주군의 명 때문이었다.

    ‘내 딸이 모르게 처리해.’

    그간 많은 일을 겪었을 레이블라가 그저 즐겁게 축제를 즐겼으면 좋겠다고. 그러니 아이가 모르게 조용하게 처리하라고.

    그 마음은 기사들도 모두 공감하는 바였기에 정말로 조용하게 많은 자객을 처리하며 아가씨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랬는데…….

    ‘드래곤 알이면 갖고 싶을 것 같은데. 멋지잖아.’

    해맑게 미소 지으면서 장난 섞인 농담을 하던 아가씨의 곁으로 갑작스럽게 수많은 나비가 몰려들었다.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듯, 투명하고 찬란한 빛깔을 띠던 나비 떼는 강렬한 빛을 퍼트리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가씨와 함께.

    “범인은?”

    카시우스의 질문에 헤넌이 답했다.

    “현장에서 잡은 녀석들은 감옥에 있습니다.”

    “사주한 놈들은.”

    “원로회 가신 중 일부는 별관에 머무르고 있고, 일부는 각자 자택에 있습니다. 기사들이 모두 위치는 확보했습니다.”

    원로회가 레이블라를 노린다는 정보를 얻은 후부터 카시우스는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 이전부터 그들을 주목한 상태였다.

    작게는 제 아들을 고생시키고, 크게는 영지를 털어먹은 쓰레기 같은 족속이었으므로.

    “내가 왜 가만히 있었는지, 그 머저리들은 모르는 건가.”

    “알면 그런 짓을 저질렀겠습니까.”

    그들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증거는 이미 모두 수집한 상태였다. 그러니 그들을 몰아내는 일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냥 둔 것은 카시우스가 언제 다시 전장으로 가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모두 쓸어 버리면 그가 다시 자리를 비웠을 때 어린 로이안과 레이블라가 감당해야 할 일이 많아질 테니까.

    그래서 나중에 처리하자고 묻어 두었었다. 돈에 욕심을 부리기는 했지만, 영지는 문제없이 돌아간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긴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베푼 자비를 이렇게 뒤통수를 쳐서 갚을 줄이야.

    “당장 내 앞에 끌고 와.”

    헤넌이 즉시 카시우스의 명을 받들며 사라졌다. 이어 카시우스의 시선이 고개를 숙인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아이던에게로 향했다.

    그가 차갑게 내뱉었다.

    “너의 잘못은 이 일이 해결되고 나서 판단할 것이다.”

    “……예, 주군.”

    “당장 마탑주를 아이가 실종된 장소로 데리고 가.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 내.”

    아이던이 그의 명령을 받들었다. 즉시 그가 떠나간 후, 이를 소리없이 지켜보고 있던 로이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렐이 마법사에게 납치를 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카시우스가 눈동자를 내리깔며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들이 저지른 일은 아닐 것이다.”

    사라지기 전에 나타났다는 빛, 투명한 나비.

    “아마도 펠리시티의 피가 문제를 일으킨 거겠지.”

    로이안이 눈을 크게 떴다.

    “펠리시티의 피라면…… 그게 설마, 정령이었다는 겁니까?”

    카시우스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로이안은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로이안의 눈동자에 의문이 들어찼다.

    “왜 갑자기 정령이……?”

    정령은 초대 펠리시티 사후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전해져 있었다. 다만, 제국 몇몇 곳에 남은 정령의 축복이 있어 제국민들은 그들이 존재했으며, 아직 그들에게서 보호를 받고 있다고 믿을 뿐이었다.

    개중에 가장 큰 축복의 힘이 있는 장소는 펠리시티의 영지였으며, 수도에 있는 황궁의 호수, 그리고 루빈디시에 있는 축복의 나무에도 미약하게나마 정령의 힘이 남아 있었다.

    여태껏 아무 문제도 없었던 축복의 나무 아래서 ‘우연히’ 그것도 ‘펠리시티’가 문제가 생겼다면, 그건 결국 펠리시티의 피에 반응했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펠리시티의 피엔 정령의 힘이 짙다고 하니까. 무언가 반응을 한 거겠지.”

    로이안은 이전에 레이블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심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거짓말’이라고 했었다. 그건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렐은 그게 거짓이라고 했는데…….”

    “아니다. 펠리시티의 피에는 분명 정령의 힘이 있다.”

    문제는 지금껏 잠잠하던 정령이 왜 갑자기 레이블라에게 반응했냐는 점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카시우스가 검을 쥐며 일어났다.

    “감옥으로 간다.”

    의문스러운 구석은 여전했지만,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였다.

    레이블라 비체라발리를 되찾는 것.

    의문은 그다음에 해결해도 충분했다.

    * * *

    눈앞이 환해지면서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빛이 사라지고, 천천히 몸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여기가 어디지?’

    낯선 장소에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뿐인 수상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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