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77화
“나무 뒤쪽이에요. 그늘진 곳에 있으니까 바로 거기 가시면 돼요.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길은 닦아 놨으니…….”
“거기까지는 나랑 같이 갈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느새 다가온 로이안이 샬럿의 말을 끊었다.
“돌아올 때는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가는 길은 함께할 거야, 렐.”
“행사 시작은 잘하고 온 거야? 연설은 아까 봤어.”
“어땠어?”
“잘했어. 매일 밤 연습한 것보다 더.”
올해로 열 살이 된 로이안이 정식으로 비체라발리의 후계자가 된 기념으로 오늘의 축사를 하고,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종을 울리는 역할을 맡았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싫다고 하더니, 레이블라가 연설을 지켜보겠다고 하자 그날부터 갑자기 연설문을 쓰고 연습하면서 꽤 열심히 준비해 왔었다.
덕분에 오늘 이벤트에 참여한 영지의 어린아이들 눈빛이 초롱초롱했었다. 남자아이들은 동경으로, 여자아이들은 이룰 수 없는 짝사랑으로 눈을 빛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 멋졌던 로이안은 레이블라의 칭찬 하나에 완전히 풀어진 얼굴로 헤실헤실 미소 짓고 있었다. 그다지 남자 주인공다운 얼굴은 아니었다.
“어디 가서 그렇게 웃지 마. 로이안.”
“왜?”
“상대의 꿈과 희망을 지켜 줘야 할 거 같아서.”
이 멋진 미남이 강아지처럼 웃는 모습이라니. 하긴. 이 모습을 또 반전 매력이라고 다들 좋아할지도 몰랐다.
‘황녀랑 있을 때는 굉장히 어른스러웠지.’
그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제 모습을 꾸며 낼 줄 아는 모양이었다. 기특하기도 하지.
어쩐지 대견스러운 마음에 레이블라가 손을 번쩍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자, 로이안이 피식 웃었다.
“이제 갈까?”
“갑옷은?”
마수를 잡으러 간다는 사람이 갑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
“내가 갑옷을 걸치면 움직임이 둔해져서 더 위험해. 다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런 거야?”
정말인가 하는 생각에 근처에 있던 제라노프를 보았다. 제라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제가 도련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라노프 경을 믿고 있어요. 우리 오라버니 잘 부탁해요.”
“예.”
실버 울프에서 카시우스 다음의 실력가가 따라간다고 하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레이블라가 다시금 로이안에게 주의를 시켰다.
“조심하는 거야, 알았지?”
“응.”
로이안은 마치 뒷산에 산책이라도 가는 모양새였지만, 그래서 더 걱정이 되었다. 열 살이면 진짜 어린데. 아직 너무나도 어린 나이인데, 그 어린이가 검을 들고 크고 단단하고 위협적인 것을 죽이러 간다니.
‘난 저 나이 때 동물원 호랑이가 하품만 해도 벌벌 떤 것 같은데.’
이토록 걱정하면서도 그를 말리지 않은 이유는 그는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이고 이러한 경험을 겪어야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진정한 남자 주인공이 되기 위한 여정이니까.
“그럼 가 볼까?”
로이안이 레이블라의 의사를 묻자, 그녀가 끄덕였다. 그리고 실버 울프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로이안 잘 부탁해요.”
“그럼요!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와아아, 웃으면서 한마디씩 보태는 기사들은 무척이나 활기차고 여유로워 보였다. 샬럿과 밀리아, 그리고 기사들과 로이안. 모두가 아무렇지 않은 듯 구는 것을 보니 초심자인 자신만이 걱정을 사서 하고 있는 듯싶었다.
모두의 함성과 함께 로이안이 앞서 나가자 레이블라가 뒤를 따랐다. 나름대로 소공작의 지위를 배려한 것이었는데, 사람의 시선이 멀어지기도 전에 대뜸 로이안이 레이블라를 잡아끌어 제 옆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걷는 모습이 천연덕스러웠다.
“오라버니랑 곧 헤어지는데 떨어져 있으면 섭섭해. 요즈음 같이 놀아 주지도 않았으면서.”
“그래도 어제 좋았잖아. 내 선물 괜찮았지?”
황녀를 언급하자 뻔뻔했던 그의 볼에 수줍은 기색이 스며들었다. 분홍빛으로 변한 얼굴이 귀여웠다.
“조, 좋았지. 당연히. 우리 동생이 오라버니를 위해 힘써 줬는데. 어제도 고맙다고 했잖아.”
황녀와 헤어지자마자 찾아와서는 고맙다, 하지만 앞으로 이러지 말아 달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기는 했었다.
황녀가 너무 좋아서 보자마자 얼어붙었던 사람이 누군데.
두 팔을 앞으로 힘차게 움직이며 걷던 레이블라가 단풍잎처럼 작은 두 손을 활짝 펼치고서 자기 가슴을 툭툭 쳤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앞으로도 팍팍 밀어 줄 테니까. 내가 약속했지?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됐어. 그런 거.”
“뭐야, 우리 오라버니, 이 동생의 도움이 없어도 혼자서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좀 기특한데.”
얼굴을 살짝 붉힌 로이안이 허둥지둥 답했다.
“그, 그게 아니라…… 전하께서 날 좋아하실지 알 수도 없고 함부로 그러는 건…….”
아니, 이 주인공님 보게?
“바보야. 그러니까 찾아왔지! 걱정하지 마. 어떤 남자가 나타나도 로이안보다 잘난 사람은 없어. 아, 하나 있다.”
“……누구?”
소심하게 쭈그릴 땐 언제고, 저보다 잘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에 로이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있어. 나중에 소개해 줄게. 근데 걔는 로이안의 경쟁 상대는 아니야.”
황녀와 친척 관계이니 말이다. 아니, 원수이기도 하니 적이라고 해야 마땅한가.
“그래서 그게 누군데?”
“누구냐면…… 아! 나무다.”
대화를 나누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샬럿의 말대로, 커다란 나무 주위에는 다른 나무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넓은 수풀 위에 홀로 우뚝 선 모습이 고고해 보였다.
“뭔가 신비롭네.”
다가갈수록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안온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는 듯했는데 어쩐지 나무에게 보호받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 느낌, 어디서 받아 본 것 같은데.
“몸도 가벼워진 것 같아.”
우주에 가면 이런 느낌일까.
묘하게 마음이 들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다가 쪼르르 달려가서는 나무를 빙그르르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듯한 레이블라의 아이 같은 반응에 로이안이 소리 내어 웃었다.
“마수와의 전쟁이 끝난 것을 기념하면서 초대 비체라발리가 검을 꽂은 장소야. 거기에 초대 펠리시티가 나무를 키웠지. 나무가 검을 품고 있어.”
“아. 그 말을 듣고 기억났어. 펠리시티 성역이 이런 느낌이었어. 어릴 때 딱 한 번 간 적이 있었거든.”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때도 아빠 옆을 이렇게 뛰어다녔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빠가 무어라 말했던 것 같은데.
‘……안 돼.’
무엇을 하지 말라는 거였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멍하니 있는데 로이안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펠리시티’를 언급한 때문인지 로이안이 저를 걱정하는 눈빛이 되어 있었다. 레이블라는 얼른 생각을 털어 버리고 미소와 함께 대화를 이었다.
“근데 나무가 검을 품고 있다고?”
“응. 워낙 큰 나무라 실제로 잘라 보지 않는 한 진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전설이 있어.”
“잘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이지?”
대놓고 ‘나 좀 잘라 줘’라고 말하는 것 같은 전설인데 그걸 실행해 본 사람이 없다니.
레이블라가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것 같은 눈으로 나무를 보자, 로이안이 그 감정을 죽이려는 듯 레이블라의 눈을 살짝 가렸다가 떼었다.
“비체라발리 영지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축복의 나무를 좋아해. 루빈디시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그 나무에 알을 숨겨 두었구나.”
이제 보니 이곳에 알을 숨겨 둔 이유가 있었다.
축복의 나무가 사랑받는 것만큼이나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고. 많은 사람에게 손가락질당하는 그녀를 위해서 모두가 생각해 준 장소인 모양이었다.
어쩐지 애틋한 마음이 들어 나무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런데…….
“으읍!”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로이안이 갑자기 성큼 다가와 어깨를 감싸며 앞을 보게 했다.
“로이안 여기…….”
“레, 렐. 가까이서 보니 어때?”
왠지 모르게 다급한 목소리로 그가 대뜸 물어 왔다.
“응? 어떠냐고.”
“어떠냐니?”
“그, 아. 이 나무, 정령이 키운 나무거든. 혹시 펠리시티라면 다른 느낌이 드는지 궁금해서.”
“……그랬어? 그래서 성역이랑 비슷한 느낌이 났구나.”
“그, 그렇지…… 어때? 뭔가 느껴져?”
횡설수설하는 로이안을 두고 레이블라는 가만히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로이안이 질문한 내용을 곱씹었다.
한편 레이블라가 나무에 집중한 사이, 로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슬쩍 한곳으로 향했다. 근처에서 클레이오와 토니가 새카만 복면을 쓴 사내를 번쩍 들어 옮기는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벌써 이게 몇 번째인지.’
로이안이 작게 한숨 내쉬면서 레이블라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