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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76)화 (76/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76화

    “오랜만이야, 로이안. 생일 축하해!”

    그녀가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해맑은 표정으로,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꿈인가?

    로이안은 주먹을 움켜쥐어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러 보았다. 통증이 느껴졌다.

    정말로 황녀 전하께서 눈앞에 있다고?

    “전하께서 여긴 어떻게…….”

    로이안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묻자, 에리나가 키득 웃었다. 잔뜩 신이 난 얼굴이었다.

    “레이블라가 도나에게 연락해 줬어. 로이안 생일이니 한 번만 만나러 와 줄 수 없겠냐고. 그래서, 만나러 왔어.”

    “수도에서는 멀 텐데…….”

    “워프 게이트 타면 금방인데 뭐. 아빠 몰래 왔어.”

    워프 게이트는 황족의 피에 반응하는 것이니, 에리나라면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나 잘했지?”

    배시시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칭찬해 달라는 소녀는 영락없이 로이안이 알고 있는 에리나였다. 눈이 부실만큼 빛이 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로이안이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재잘대던 에리나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내가 와서 기쁘지 않아?”

    “기뻐요. 생각하지 못했던 선물을 받은 것 같아서 정말 기쁩니다.”

    진심이었다. 에리나가 이곳까지 와 준 사실이 고맙고, 이렇게 와 주어서,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팠다.

    레이블라. 그의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준비한 이 선물은 그녀로선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전하 때문에 죽을 만큼 위험했었다고 했지.’

    예전에 레이블라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시절에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황녀의 시식가로 일하며 에리나의 독을 대신 먹어 충신으로 거듭났다고.

    레이블라는 ‘시식가니까 당연하지’라면서 별거 아닌 듯 이야기했고, 당시에는 로이안도 그녀가 황녀 대신 일을 당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그게 정말로 ‘다행인가?’ 싶었다.

    아버지가 귀띔해 준 바로는 레이블라가 살아남은 것은 모든 것을 해독할 수 있는 약초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게 운명처럼 나타나 주어서 괜찮았다고.

    만약 그게 없었다면? 레이블라가 제 동생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했다.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죽을 만큼 때려 주고 싶어졌다.

    그뿐인가. 레이블라는 황제가 준 독도 먹은 상태라 했다.

    이 거대한 제국의 황제라는 인간이 한 줌도 되지 않을 어린아이에게 치료할 수 없는 극약을 먹이고, 마리오네트처럼 이용하려고 했다.

    자신이 듣기에도 끔찍한데, 당사자인 레이블라는 얼마나 치를 떨었을까.

    분명, 황족은 꼴도 보기 싫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 에리나와 연락했다.

    ‘나를 기쁘게 해 주려고…….’

    그 작은 아이가 자신을 위해 그토록 신경 써 주었단 걸 알고 나니 에리나를 마냥 기쁘게 만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면 레이블라가 실망할 것 같아서, 로이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내민 손을 붙잡고 정원을 거닐었다.

    에리나는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정말로 좋았지만, 온통 설렘뿐이던 이전과는 달리, 그 마음에 딱 한 방울만큼 얼룩이 묻었다.

    죄책감이었다.

    * * *

    “로이안이 무척 기뻐하네.”

    테라스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던 레이블라가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샬럿이 칼같이 답했다.

    “저는 아가씨와 있을 때가 더 기뻐 보이시는 것 같아요.”

    “에이, 말도 안 돼. 가족보다는 연인이지.”

    소설 속 로이안은 황녀를 위해 쉼 없이 목숨을 걸고 숱한 위기를 넘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혈육의 목까지 냉정하게 베어 오는 미친 순정남이었다.

    그런 사람이 연인보다는 가족이라니.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연락하길 잘했어.”

    여러모로 선물을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 로이안에게는 이것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황녀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내었다. 혹시나 황궁으로 보내면 황녀에게 편지가 닿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절친인 도나를 통해 연락을 취했다.

    다행히 편지는 황녀에게 닿았고, 돌아온 대답은 당연하게도 승낙이었다. 황녀가 로이안의 생일에 와 주겠다고 했다. 황제 몰래 가겠노라고.

    그 편지를 받자마자 레이블라는 황제에게 선물을 보내었다. 그간 황궁에서 겪은 바에 따르면, 황제가 모르는 황녀의 사생활은 없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마석을 던져 주면서 아량을 베풀어 달라고 청했다. 두 사람이 무척 좋아하니 잠시 만날 수 있게 봐 달라고.

    그렇게 조금 귀찮은 절차가 있기는 했지만, 손을 꼭 잡고 정원을 거니는 두 사람을 보니 한껏 뿌듯함이 밀려왔다.

    ‘주인공은 주인공이다.’

    훌륭한 외모의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고, 머리를 가까이하며 속삭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안구 복지에 가까웠다.

    ‘황제가 밉기는 하지만.’

    이 세상을 향한 증오가 사라졌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두 사람은 해피 엔딩을 맞았으면 했다. 로이안을 위해서라도.

    ‘노력해야겠다.’

    힐링물은 꼭 해피 엔딩으로 끝내야 하는 법이니까.

    * * *

    “박람회 디저트가 빠르게 팔리고 있대요!”

    다음 날, ‘바르드의 날’을 맞아 축제 참여를 위해 나와 있던 레이블라에게 희소식이 전해졌다. 디저트 박람회가 잘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반응은 어때?”

    레이블라가 묻자, 밀리아가 신이 난 얼굴로 답했다.

    “좋아요. 귀부인들께서는 담백하면서 깔끔한 디저트류를 선호하셨고, 어린 영애들은 달콤한 디저트류를 좋아하셨어요. 최근에 먹어 보지 못한 디저트들이라고, 다들 반가워하시더라고요.”

    “다행이다.”

    사람들이 많이 가서 여러 디저트 맛을 보고, 기존 음식에 대한 향수를 가져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에게 ‘황녀의 가게’라는 단 하나의 선택지가 아니라, 다른 선택지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켜 주는 것이 박람회의 목적이었으니까.

    물론, 장기적으로는 좀 더 대책이 필요하겠지만.

    “아가씨. 알은 제일 큰 포루루 나무 뒤쪽에 숨겨 두었다고 해요. 저기 저쪽에 보이시죠?”

    샬럿이 손으로 가리키는 장소를 향해 레이블라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손가락 끝에 놓인 장소에는 다른 나무보다 두 배는 큰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축복의 나무라고 불리는 나무예요. 아가씨께 꼭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이 지역 사람들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무거든요.”

    “그러고 보니 들은 적 있어. 황궁 손님들이 루빈디시에 오면 한 번은 가 봐야 하는 장소라고 했었어. 저기였구나. 정말 나무가 크네.”

    “그쵸?”

    밀리아가 으쓱대며 말을 이었다.

    “루빈디시의 역사를 함께하는 곳이에요! 아가씨께서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기대되네.”

    레이블라가 설레는 표정으로 나무를 보고 있자, 샬럿이 설명을 이었다.

    “아가씨께서는 제일 먼저 출발하시니까, 조심히 가셔서 알을 주워 오시면 돼요. 혹시 부딪치지 말라고 가는 길도 잘 다듬어 놨으니, 꼭 그 길 따라가셔야 해요. 아니면 못생긴 솜사탕이 될지도 몰라요.”

    “……솜사탕 아니라니까.”

    작게 투덜거리자 샬럿이 갸웃했다. 정말로 그렇게 아니라고 생각하느냐는 눈빛이었다.

    레이블라가 못 말린다는 듯이 샬럿을 보다가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밀리아가 아까 그러는데 그거 혼자서 찾아야 하는 거라며. 알려 줘도 괜찮아?”

    “아가씨께서는 그런 거 없이도 행복하시니까요.”

    마수의 알을 찾는 아이는 한 해 행복한 일로 가득하다는 미신이 있었다. 이를 두고 샬럿이 단호하게 말하자 레이블라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아가씨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해요. 아가씨께서 늦게 찾으시면 뒤따라 출발한 아이들이랑 뒤섞이게 되잖아요. 괜히 이상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으니 빨리 빠져나오시는 게 좋아요.”

    “응, 알았어.”

    레이블라는 자신이 아직 영지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최근 황녀가 비체라발리 영지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단 티를 내 온 탓에 그에 따라 황녀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수시로 전장에 불려 가는 처지라 황제를 싫어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황녀에겐 모두 호의적이었다. 심지어 비체라발리 성에서도 황녀를 추종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수도보다 덜해서 그렇지, 이곳 역시 황녀의 영향권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펠리시티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마석 광산의 소유권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여론은 그야말로 최악이 되었다. 굴러온 돌이 소중한 도련님을 빼내려 한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퍼진 상태였다.

    ‘빨리 돌아와야지.’

    다들 걱정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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