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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75)화 (75/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75화

품 안에 가두려는 손길을 거부하며 레이블라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공작에게 웃어 주었다. 반사적으로 그가 입매를 부드럽게 휘자, 안심한 레이블라의 시선이 이번엔 로이안에게로 향했다.

누가 부자 아니랄까 봐 로이안 또한 불퉁한 눈빛으로 모두를 쏘아보고 있었다. 힘껏 쥔 주먹이 분노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소리 없이 그를 부르자, 기가 막히게 알아챈 로이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못마땅함으로 가득 찼던 낯빛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뾰족하던 눈매도 사르르 녹아내려 귀여운 눈웃음이 되었다.

그 순간, 아래에서 지켜보던 귀족들이 얕은 숨을 삼켰다.

감탄스러울 정도로 멋진 두 남자가 훈훈한 미소를 짓고 있으니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만큼의 충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레이블라가 로이안을 진정시키고 나자, 그제야 비체라발리 공작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내 아들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해 주어서 고맙군. 여긴 오늘 10살 생일을 맞은 내 아들, 로이안 비체라발리. 오늘부로 비체라발리의 정식 후계자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무수한 환호성이 쏟아지며 커다란 연회장을 꽉 채웠다. 적법한 비체라발리 후계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목소리였다.

그들의 환영에 반응하듯, 로이안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언제 소란했냐는 듯 주변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로이안 비체라발리입니다.”

조용한 연회장의 구석에까지 단정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또다시 그를 축하하는 귀족들의 인사가 쉼 없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잠시, 서서히 박수와 환호성이 사그라들자, 로이안이 말을 이었다.

자못 진지한 표정을 한 그가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로 모두를 응시하며 말했다. 목소리는 아이답지 않게 낮고 잔잔한 울림이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오늘 제가 정식 후계자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으응?

그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연회장 안 사람들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가득 찼다.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표범처럼 우아한 자태로 모두의 반응을 살피던 로이안이 너무나도 말하고 싶었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선언했다.

“저는 제 동생, 레이블라 비체라발리가 저보다 뛰어나게 성장한다면, 그 즉시 후계자 자리를 넘겨줄 의향이 있습니다.”

……뭐?

예상치 못한 발언에 레이블라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로이안을 응시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로이안의 발언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숨을 들이켠 채 충격으로 얼룩진 눈을 하고서 비체라발리 공작을 돌아보았다.

이게 사실이냐, 정말이냐, 실화냐.

답을 요하는 눈빛이었다.

정작 로이안은 해맑은 표정으로 잘했지? 라고 묻듯 그녀를 향해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레이블라는 비체라발리 공작이 얼른 이 사고를 수습해 주길 바라며 그를 보았지만, 그 또한 그것도 재미있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니, 이분들 도대체 왜 이러세요?

* * *

“로이안!”

충격과 공포로 물든 주최 측의 인사 의례를 마치자마자 밖으로 나온 레이블라가 큰 소리로 로이안을 불렀다.

슬렁슬렁 눈치를 보며 뒤따르던 로이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곁으로 다가왔다.

“오라버니라고 불러야지. 이제 진짜 가족이잖아.”

“……오라버니.”

레이블라가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쏘아보자, 로이안이 능청스럽게 레이블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빈말 아니야. 진짜야.”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왜 아니야? 너 아니면 후작에게 끌려가서 죽을 수도 있었어.”

“로이안 혼자였다면 잘 도망쳤겠지.”

그때 로이안이 위험에 빠졌던 이유는 힘없는 혹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비체라발리 공작이 구해 주러 오기 전에 위험했던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황제가 준 독 때문에 레이블라의 컨디션이 나빠져서 생긴 문제였다.

그의 잘못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레이블라가 이를 지적하자, 로이안이 반박했다.

“내가 가출한다고 나왔으니 문제지. 게다가 너한테 이상한 음식을 먹이려는 놈을 곁에 둔 것도 잘못이었어.”

“…….”

“렐. 그날부터 넌 내 가족이 됐어. 피가 무슨 상관이야. 애초에 피로 따지면 너보다 귀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로이안은 더 귀해. 세상에서 제일 귀해.”

이 세상의 남자 주인공인걸.

“그럼 넌 세상에서 제일 귀한 내가 인정한 내 소중한 동생이지.”

어쩌다가 그 까칠한 캐릭터가 이렇게 동생 바보가 되어 버렸을까.

레이블라는 가까이 선 로이안에게 엄한 척 으름장을 놓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야.”

그래도 이렇게 생각해 주어서 조금은 기뻤던 것도 사실이었다. 늘 모두의 앞에서 맞기만 했지, 보호받은 적은 없었으니까.

그들과 가족이 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이제 연회장으로 돌아갈 거지?”

레이블라는 아직 사교계에 나설 나이가 아니었기에 짧은 인사를 마치고 바로 빠져나왔지만, 로이안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생일 선물도 받고, 수많은 축하 인사도 들어야 했다.

그간 후작에게 받지 못했던 만큼, 더 많이.

하지만 로이안은 다 귀찮은 표정이었다.

“됐어. 그런 불쾌한 놈들. 어차피 날 보러 온 것도 아닐 텐데.”

“보러 온 거 맞거든. 공작님, 아니 아빠도 로이안 때문에 승전식 축소하셨잖아. 얼른 돌아가.”

비체라발리 공작의 승전식은 7년간의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주인공답지 않게 무척이나 간소했다고 들었다. 아마도 그는 오랜만에 마주한 로이안의 생일에 힘을 실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냥 내 동생이랑 있을래.”

“나는 이제 씻고 자러 갈 건데.”

“조금 더 놀면 안 돼? 그간 다른 일 하느라 바빴잖아. 검술 훈련하는데도 오지도 않고.”

로이안이 툴툴대면서 레이블라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그런 로이안을 보며 레이블라가 선심 쓰듯 말했다.

“놀아 주진 못하고…… 대신, 선물이 있어!”

“뭔데?”

“자.”

이내 레이블라가 숨기고 있던 편지를 꺼내 그에게 건네었다.

로이안의 눈이 반짝였다.

“편지네?”

“받고 싶었잖아.”

디저트 가게에 보낼 편지를 작성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로이안이 어찌나 서러운 표정을 짓던지.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기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는 로이안에게 편지를 써 달라며 간곡히 청했던 터라, 레이블라는 그에게 꼭 편지를 써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고작 편지냐며 한 소리 돌아올 줄 알았는데. 정말로 편지를 받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로이안은 편지 하나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양손으로 들고서는 꿀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울먹거렸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조용히 비켜 주었다. 오롯이 편지를 읽을 수 있도록.

도도도, 멀어지는 레이블라의 걸음에서 즐거움이 묻어났다.

* * *

‘이쪽으로 가라고 했지.’

로이안이 소중한 편지를 품에 안은 채 달리고 있었다. 그의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동생이 무려 편지에 그렇게 해 달라고 청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선물을 숨겨 두었으니까 오늘이 가기 전에 찾아야 해! 10시까지 찾으면 내가 소원 하나를 들어줄게.’

그의 귀여운 동생은 편지를 준 것만으로도 모자라 다른 선물도 주고, 또 잘하면 소원까지 들어준다고 했다. 이렇게 행복한 생일이 또 있을까?

‘무슨 소원을 빌지?’

예전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쫓아다녀 달라고 부탁해 볼까.

그때는 그게 얼마나 재밌는 일인 줄도 모르고, 레이블라를 밀어내면서 나쁜 소리만 틱틱 내뱉었었다.

지금도 가끔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그에게는 흑역사였다.

‘이번에는 수업 시간에 대답도 잘해야지.’

이전에는 레이블라가 자신을 비웃을까 신경이 곤두서서, 아는 것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정말로 정이 똑 떨어질 만큼 바보 같았는데도 ‘오라버니’라고 다정하게 불러 주는 레이블라는 천사 그 자체였다.

‘이번에는 멋진 모습만 보여 줄 거야.’

자랑스러운 오빠가 되어 가족이 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소원을 결정하고 나니 레이블라가 찾아 달라는 선물이 더욱 기대되었다. 물론, 그게 조약돌이라도 그에게는 무척이나 특별한 선물일 것이다.

‘이 근처인 것 같은데.’

한참을 달리던 로이안이 서서히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면서 주변을 살폈다.

‘힌트가 있을 거라고 했지.’

가서 보면 알 거라고. 모를 수가 없다고.

‘저 사람인가?’

멀찍이 로브를 입은 아이가 하나 서 있었다. 새카만 로브에 별 모양 문양이 들어간 것이, 누가 봐도 레이블라의 로브였다.

돌아가는 척하더니, 여기서 기다리는 걸까?

‘선물이 레이블라구나.’

우리 동생 귀엽기도 하지.

반가운 마음에 로이안이 한달음에 달려서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에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눈앞에 있는 아이는 레이블라보다 체구가 좀 더 컸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싶어 한 걸음 물러서려던 찰나, 로브를 쓴 아이가 불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내 마주친 얼굴은…….

“잘 지냈어?”

“……전하?”

에리나 커티스 라스텔. 제국의 황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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