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74화
* * *
갑작스러운 행사 준비로 인해 레이블라의 일상이 무척이나 바빠졌다.
수일간 디저트를 먹어 보고, 개선안을 보내면서 박람회 참여를 권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도 흘렀다.
원래대로라면 한참이나 여유를 두고 해야 할 일을 열흘 남짓한 시간 안에 처리해야 하는 만큼, 레이블라는 꼬박 며칠 밤을 새워 가면서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로이안은 불만이 가득했다.
‘아직 다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건강이 염려된다며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다가,
‘차라리 일찍 끝내고 쉬게 하는 게 낫겠어. 다들 바짝 정신 차려! 내 동생 쓰러지지 않게.’
고집을 꺾지 못해 결국 도와주었다. 정말이지 말 안 듣는 말괄량이 동생 때문에 고생하는 오빠 같았다.
확실히 로이안까지 합세하자 일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가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모두가 머리를 맞대면서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으며 고생한 끝에, 로이안의 생일 전날, 완벽하게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로이안의 생일이 찾아왔다.
“아가씨, 너무 예쁘세요!”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아기 천사 같으세요.”
피곤에 절어 끔뻑끔뻑 졸고 있던 레이블라의 귓가로 하녀들의 칭찬이 스며들었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릿한 각막 너머로 예쁘게 꾸며진 제 모습이 보였다.
맑은 녹색 눈동자와 어울리는 녹색 드레스에 앙증맞은 리본을 달고 있는 모습은 제법 화려했다. 분명 몇 년 전까지는 이런 옷을 입는 생활이 더 익숙했는데.
그런데도 아주 오래전 일처럼 낯설었다. 제 모습 같지 않아서 조금 민망해졌다.
어색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피하는데, 거울 속에 비친 하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촉촉해진 눈빛으로 응시해 오는 밀리아, 입술을 꾹 다문 채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의 샬럿. 다른 하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애처롭다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당연히 여겨 할 사람이 낯선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 보인 모양이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구세주처럼 비체라발리 공작과 로이안이 등장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곁에 있던 하녀들이 옆으로 물러섰다.
두 사람 중 먼저 다가온 사람은 당연히 로이안이었다.
“내 동생 예쁘다!”
앞으로 보고 뒤로 보고 옆으로 살피던 로이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앞에 바로 섰다.
“인형 같다. 내 동생.”
놀란 건 레이블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이안은 진짜 눈이 부신데? 평소에는 좀 그랬는데 지금은 평소보다 열 배, 아니 백 배는 잘생겼어.”
한참 책을 읽으며 초췌해진 모습이나, 검을 들고 땀을 비 오듯이 쏟아 내는 모습만 보아 왔다. 그럼에도 잘생기긴 했지만, 영 폼이 안 나는 현실적인 모습이라 남자 주인공이란 사실을 잊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깔끔하게 검은 정장을 입고 분홍빛 장식으로 포인트 준 걸 보니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역시, 주인공이었다.
“내 동생 옆에 설 정도는 돼?”
“오라버니니까 옆에 있는 게 당연하지요.”
로이안이 배시시 웃으니 이제는 배경에서 빛이 펑펑 터지는 것만 같았다.
그가 신이 난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레이블라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으려는데, 순식간에 발이 땅에서 떨어지며 따스한 품 안으로 쏙 들어갔다.
“예쁘구나.”
“공작님도 멋있으세요!”
로이안이 무척이나 잘생긴 소년 같았다면, 공작은 성숙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잘 정리된 은발과 단정한 얼굴, 자수정처럼 빛나는 예쁜 눈동자.
말끔하게 차려입고서 로이안처럼 분홍빛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주었는데. 이쪽도 눈이 부셨다.
황궁의 하녀들이 그렇게나 비체라발리 공작을 욕하면서도 그를 보면 눈을 떼지 못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자연스럽게 아부하는 그녀를 보면서 못 말리겠다는 미소를 지은 공작이 말했다.
“오늘이 지나면 무를 수 없다.”
드디어 오늘,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가족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래, 레이블라. 이제는 진짜로 레이블라 비체라발리가 되는 거야.”
레이블라 비체라발리.
여전히 어색해서 혀끝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레이블라 펠리시티’라는 이름이 너무나도 익숙했으니까.
그런데 이제 이름에서 펠리시티의 흔적이 지워진다니. 새로운 가족이라니.
그렇게 되길 바랐음에도 솔직히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어색하고, 낯설어서 차마 로이안에게는 ‘오라버니’라고 하면서도 비체라발리 공작에게는 ‘아빠’라고 하지 못했었다.
‘레이블라 펠리시티’에게 아빠나 엄마라고 불릴 사람은 오직 ‘유라이어 펠리시티’와 ‘디아나 펠리시티’뿐이었으니까.
그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비체라발리 공작은 한 번도 아빠라고 부르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내색 한 번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기다려 주기만 했다. 네 마음을 안다는 듯이, 그 혼란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그래서 그간 차분히 마음을 돌아보고, 충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말할 수 있었다.
“……아빠.”
펠리시티는 펠리시티, 비체라발리는 비체라발리.
자신에겐 두 가족 모두 소중한 존재이며, 두 이름 다 제 가슴속에서 빛날 것이라고.
아빠가 둘이 되어서 너무나도 기쁘다고.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아빠.”
레이블라의 조심스러운 호칭에 비체라발리 공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곧, 자연스러운 웃음과 함께 그가 부끄러운 나머지 푹 고개 숙인 레이블라를 토닥이며 말했다.
“최고로 행복한 딸이 되게 해 주마.”
“나도! 레이블라, 아니, 렐! 이 오라버니도 행복하게 해 줄게.”
두 사람의 선언에 레이블라가 분홍빛으로 물든 얼굴로 키득대며 웃었다.
처음 공작성에 와서 두 사람을 마주했을 땐, 상상도 하지 못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이 사람들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다.
언제까지나, 오래도록.
* * *
“카시우스 비체라발리, 로이안 비체라발리, 레이블라 비체라발리 입장하십니다.”
호명이 이루어지자 새처럼 재잘거리던 목소리들이 거대한 맹수를 앞둔 것처럼 조용히 숨을 죽였다. 아름답게 울려 퍼지던 선율 또한 사그라들었다.
그런 사람들 앞에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가장 높은 계단에 선 비체라발리 공작은 가히 움직이는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아한 은빛 머리카락에 막힐 듯 잘 짜여진 외모는 신이 직접 빚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경지였다.
‘악의 귀족’이라는 이명은 누군가의 못된 악담이 아닐지 의심스럽다며, 사람들이 감탄을 거듭했다.
그리고 홀린 듯이 은빛 늑대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야에 달콤한 분홍빛이 스며들었다.
말간 표정으로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깜빡이는 예쁜 아이였다. 새하얗고 티 없는 얼굴에는 젖살이 남아 토실토실했고, 팔다리가 통통한 것이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배가했다.
게다가 이목구비는 얼마나 섬세한지. 커다랗고 동그란 눈 아래로 콧대가 예쁘장한 선을 그리는 데다가, 흔하지 않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치렁대고 있으니 말 그대로 인형처럼 어여쁜 아이였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스러운 외모에도, 귀족들의 반응은 마냥 호의적이지 않았다.
비체라발리 공작의 아름다운 외모에 현혹되었던 눈빛들이 아이에게 닿는 순간 뾰족하게 날이 섰다. 아이의 외양에 감탄한 것도 잠시 벌레라도 본 듯, 끔찍하다는 반응이었다.
‘뭐, 당연한 거겠지.’
자기들 머리에 있던 귀족이 밑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통쾌해했던가. 혀를 놀려 짓밟으면서 무척이나 우월감을 느꼈을 텐데. 다시 제국에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공작가에 입양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죽을 때까지 갖지 못할 부까지 얻은 상태였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하는 일에 허송세월을 보내는 귀족들에게 레이블라는 그저 눈엣가시일 것이다.
‘황녀의 티파티에 왔던 사람들도 제법 있네.’
솔직히 양심 없지 않나?
그때 그렇게 까 대더니, 마석 광산의 소유주가 누구인지 밝혀진 마당에 이렇게 낯 두껍게 와서 사업할 생각을 해?
……그렇다고 사업에서 배제시킬 생각은 없지만.
‘돈이나 왕창 뜯어내야지.’
마석 하나를 살 때도 벌벌 떨게.
그러한 생각으로 레이블라는 자신을 향한 불편한 시선을 넘겼다. 그러나 비체라발리 공작은 그녀가 걱정된 모양이었다. 아이를 모두의 시선에서 감추려는 듯 그녀를 자연스럽게 제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풍기며 모두를 노려보았다.
‘파티의 주최자가 그럼 어떡해요…….’
그것도 로이안의 생일 파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