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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72)화 (72/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72화

    * * *

    “도련님, 오늘 기뻐 보이십니다?”

    벌컥 물을 들이켜고 있는 로이안의 곁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클레리오가 다가왔다. 로이안은 더럽다는 듯이 그에게 수건을 휙 던지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내 동생이 날 행복하게 해 주겠다더군.”

    그의 발언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의 눈이 짜게 식었다. 또 시작이다, 라는 반응들이었다.

    레이블라가 정식으로 입양되고,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자 로이안의 태도가 이전과는 완벽하게 달라졌다.

    처음에는 칼바람을 쌩쌩 불면서 아가씨를 밀어내고, 무시하고, 막말이나 해 댔으면서, 이제는 ‘내 동생’이라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아가씨만 나타나면 저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아가씨의 목소리라도 들리면 묵직한 편인 소년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분명 그들의 도련님은 냉정하고 차가운 은빛 늑대였는데, 아가씨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하얀 털을 지닌 강아지처럼 굴었다.

    정말 못 볼 꼴이기는 했지만, 분하게도, 그가 부럽기는 했다. 누가 봐도 아가씨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존재였으니까.

    거기다가 정말로 이상적인 여동생이었다.

    그간 로이안이 개차반처럼 굴 때도 계속 곁을 맴돌며 다정하게 챙겨 주던 것을 모두가 익히 지켜본 터였다. 그런 동생이 있으면 동생을 낳아 주신 부모님을 평생 어깨에 태우고 다녔겠다 싶을 정도로, 솔직히 부러웠다.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했다.”

    그가 재차 힘주어 말하자, 그제야 기사들이 접대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럽습니다, 도련님.”

    “저도 그런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로이안이 진정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미안하지만 레이블라는 세상에 하나뿐이다.”

    알고 있다. 그런 동생 세상에 둘도 없을 거라는 거.

    “그리고 내 생일 선물로 제일 좋은 것을 주고 싶다고 했지.”

    “정말입니까? 아가씨께서 선물을요?”

    “난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준다고 하더군.”

    “와, 좋으시겠습니다. 아가씨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편지라도 써 주신다면 정말 행복하시겠습니다.”

    “……편지?”

    “보통 선물에는 편지가…… 아.”

    일순 로이안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마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쓴 동생의 편지를 받고 싶은 눈치였다.

    기사들은 슬쩍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이 사실을 아가씨께 알려 드려야겠다는 무언의 속삭임이었다.

    * * *

    레이블라가 로이안의 생일선물로 고민 중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사용인들이 제각기 로이안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레이블라에게 넌지시 알려 주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검술도 있었고, 햇볕에 잘 말린 뽀송뽀송한 이불을 유독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른 아침의 조용한 분위기라던가, 비가 떨어지는 소리라는 이야기도 제법 들려왔다.

    대다수는 선물로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종류였지만, 분명 도움이 되는 것도 있었다.

    로이안과 훈련하는 기사들이 가져다준 정보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레이블라에게 ‘편지’를 써서 로이안에게 주면 좋아할 것이라 말해 주었다.

    다만 편지를 메인 선물로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여전히 선물은 결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을 무렵, 레이블라에게 흥미로운 소식 하나가 도착했다.

    “디저트?”

    최근 조리실에서 디저트 때문에 시름을 앓는다는 소식이었다. 원인은 놀랍게도 황녀였다.

    “황녀 전하께서 디저트를 로이안의 생일 연회에 제공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어?”

    “네!”

    레이블라의 물음에 최근 그녀의 시중을 들게 된 하녀 밀리아가 씩씩하게 답했다.

    갈색 머리에 새하얀 피부를 지닌 열여섯 살 앳된 여성이었는데, 광대뼈에 주근깨가 가득해서 활달하고 귀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황녀님의 가게가 석 달 전에 루빈디시에 생겼거든요. 최근에 영애들이 가장 많이 찾는 가게래요.”

    황녀의 디저트 가게라면 레이블라 또한 알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소설에서 등장했었으니까.

    ‘황녀의 첫 사업이었지.’

    그녀는 회귀 전에 보았던 인기 디저트를 토대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박 중에서도 초대박을 내며 지역마다 분점을 냈다.

    오죽하면 황녀의 디저트 없이는 티파티를 열 수 없고, 황녀의 디저트 가게가 주변에 없으면 상류층 여성으로서 사교 활동은 포기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수준이었다.

    물론, 황녀의 이름만이었다면 이토록 성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황녀의 가게에는 다른 가게와는 다른 장점이 있었고, 시대를 앞서 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황녀의 디저트라면 로이안이 좋아하겠는데.’

    황녀의 마음이 전해진다면, 로이안은 자신의 생일을 더욱 특별하게 느낄 것이 틀림없었다.

    “황녀 전하께서 디저트를 제공하고 싶다고 하셔서 요리사분들이 속상해하고 있어요.”

    “그렇겠다. 비체라발리 성의 요리사들은 실력이 대단하니까. 지금 이 딸기 타르트도 정말 맛있는걸.”

    “모두 주인님들이 돌아오면 최고로 맛있는 것을 만들어 드리겠다면서 지난 몇 년간 실력을 갈고닦았어요!”

    그래서 더 속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로이안의 생일 연회라는 완벽한 무대에서 주인들에게 그간 닦아 온 실력을 자랑하고 싶은데, 황녀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게 되었으니까.

    ‘우리 성의 디저트도 훌륭하지만, 황녀의 디저트가 나쁘지는 않아.’

    소설 속에서는 거의 마약급으로 묘사되었다. 아쉽겠지만 이번에는 황녀에게 양보를 하는 게 옳았다.

    ‘그렇다고 둘 다 내놓을 수는 없으니까.’

    황녀의 가게이니, 그 가게 제품과 다른 음식을 같이 둔다는 것은 황족을 모욕하는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황족은 경쟁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나니, 문득 궁금해졌다.

    소설에서 그토록 성공한 황녀의 디저트 가게가 얼마나 대단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

    “한 번 가 볼까…….”

    황녀의 첫 번째 사업을 두 눈으로 확인해 둘 필요가 있으니까!

    * * *

    명소는 역시 명소였다.

    소설 속에서 설명하던 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증명하듯, 황녀의 디저트 가게는 정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내부가 꽉 찬 것은 물론이고, 가게 바깥에서도 길게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귀족들 대신 사용인들이 줄을 서 주는 식이었지만. 루빈디시의 귀족은 다 여기 모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래서 사교를 하려면 황녀의 가게로 가라는 모양이었다.

    “정말 사람이 많네.”

    “수도에서 인기가 좋다고 입소문이 났으니까요.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영애라면 반드시 이곳을 들러야 한다고 들었어요. 거기다가 여긴 직영점이라 더욱 인기가 많아요.”

    수도에서나 지방에서나 체감되는 황녀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머리 색을 바꾸고 나와서 다행이네.’

    분홍빛 머리카락이 생각보다 드물어서, 머리를 가리고 나왔어도 금세 정체를 들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근데 주변 가게는 왠지 한산하네.’

    이렇게 사람이 바글거리면 주변 가게도 함께 바빠져야 할 듯한데,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곳이 많았다. 특히 동일 업종인 디저트 가게들이 더욱 그러했다.

    “여긴 인기가 없는 가게들만 있는 거야?”

    레이블라의 물음에 밀리아가 손사래 쳤다.

    “그럴 리가요. 여기가 루빈디시 최고의 거리인걸요.”

    “그래?”

    최고의 거리치고는 빈 가게가 곳곳에 있는데……?

    레이블라가 빈 가게를 보며 의아해하자, 밀리아가 아, 하고서 말을 이었다.

    “망했어요, 거기.”

    “망했어?”

    “원래 거기도 디저트 가게였거든요. 그런데 수도에서 인기 있는 황녀 전하의 가게가 바로 근처에 들어왔으니까요.”

    동종업이라서 망한 모양이었다.

    “저쪽은 살아남았는데, 황녀 전하의 가게 디저트를 팔고 있대요. 양심도 없지.”

    밀리아의 말처럼 황녀의 디저트와 비슷한 제품을 팔고 있어서인지, 그쪽에는 제법 손님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아.’

    황녀의 가게가 잘나가니 주변에서 황녀의 사업 아이템을 따라 하는 사건.

    감히 주인공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다니. 결국 그 가게들은 황녀에게 정의 구현당하여 폭삭 비참하게 망했다. 여기는 워낙 먼 곳이다 보니 그 소식이 늦은 모양이었다.

    ‘그럼 빈 가게는 황녀의 디저트를 따라 하지 않아서 망한 가게인가?’

    귀족들은 유행에 살고 유행에 죽는 사람들이다 보니, 지금 유행을 선도하는 것이 황녀의 디저트라면 당연히 다른 제품을 찾는 발길은 뜸해질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매출 감소로 이어질 테고, 그게 장기화되면 가게를 유지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가게를 유지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빠르게 유행이 끝나서 고객들이 다시 찾으면 다행이겠지만, 문제는 이 유행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황녀는 제국 최고의 인기인이니, 이 인기의 거품이 웬만해선 꺼질 리가 없었다.

    주인공 버프를 고려하자면 빠르게 일을 그만두는 편이 적자를 줄이는 길이었다.

    ‘좋지 않네.’

    황녀의 가게 때문에 주변이 죽어나는 실정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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