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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71)화 (71/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71화

    * * *

    “죽여 줄까?”

    갑자기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에 놀란 레이블라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카탈로그를 내리고 눈앞의 소년을 응시했다.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빛을 한 채 검을 쥐고 있는 모양새가 당장에라도 어디론가 뛰쳐나갈 기세였다.

    이럴 때는 역시 그 말이 필요했다.

    레이블라가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응?”

    오라버니라는 호칭에 부릅뜨고 있던 눈이 스르르 풀리면서 은근한 미소마저 감돌았다.

    주인공이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걸까.

    “오라버니. 함부로 사람 죽이는 거 아니라고 했지요?”

    “몰라.”

    웃을 때는 언제고 금세 툴툴대는 모습이 영락없는 사춘기 소년이었다.

    “다들 그럴 만하니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널 욕하잖아.”

    그도 그럴 게 마석 광산이 레이블라의 소유가 된다는 소식이 퍼진 이후로 성 안팎에서 상당히 나쁜 말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비체라발리에 못된 여우가 숨어들어 재산을 가로채고 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펠리시티가 가진 정보를 황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생존자 역시 반역죄 처벌을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

    고작 7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마석 광산을 발견하느냐, 펠리시티가 진즉에 그 정보를 입수했다면 더 미리 발굴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된다는 소리가 앞서 나갔다.

    뒤이어 펠리시티에서 마석 광산의 존재를 은폐해 반란 자금을 모으고 있던 게 아니냐며, 그 후계자였던 레이블라를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후자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레이블라를 반역죄로 처벌하자는 주장이 쏟아졌는데 마석 광산의 실 주인인 그녀를 치우고 그 재산을 황실에 환납시키자는 게 그들의 요구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비체라발리가 마석 광산을 쉽게 내어 줄 리가 없으니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어쨌든 주변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쉼 없이 쏟아지다 보니 성 내부가 뒤숭숭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너무 이르게 이 사실을 터트린 걸까?”

    “사람들의 입을 다 막을 수는 없어, 로이안.”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마석 광산에 관한 소문이 퍼지면 자연스럽게 레이블라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비체라발리 공작은 마석 광산이 없다고 해도 영지를 꾸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으니, 조금 더 지켜보다가 터트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레이블라가 소문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고, 당장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석 광산을 조사하러 갔던 학자들이 여럿이었고, 근처에 마을이 있었으니 어차피 소문을 완벽히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전쟁에 자주 나가는 비체라발리를 위해서라면, 한시라도 빨리 마석을 이용하여 갖가지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그 무기가 칼릭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이렇게 소문을 내고 나면 무기를 개발하는 사람들을 데려오기도 쉬울 거야. 오히려 그쪽에서 먼저 접촉할 수도 있고.”

    겨우 얻어 낸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조금 욕을 먹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았다.

    애초에 국민 욕받이 아니던가.

    “레이블라.”

    “나는 정말로 괜찮아.”

    저를 위해 화를 내주는 사람이 이제 곁에 있으니까, 더더욱.

    “어차피 욕할 사람은 욕해. 그러니까 화내지 마. 그것보다…….”

    로이안을 빤히 보자, 그가 금세 표정을 풀고 입꼬리를 올리며 ‘왜?’라는 표정을 지었다. 레이블라는 그런 그를 향해 물었다.

    “로이안, 받고 싶은 생일선물 있어?”

    “생일선물?”

    “그래. 축제 전날이 생일이라며. 오늘 알았단 말이야.”

    다들 얼마 남지 않은 축제를 준비하는 일로 떠들썩해서, 그 전날이 로이안의 생일인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2주 후가 생일이라는 사실을 오늘 아침 우연히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지금 카탈로그를 보고 있는 것 또한 로이안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함께 맞는 생일이니 생일 선물을 챙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잘해 주고 싶은 욕심에 무엇을 주어야 할지 결정은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웬만한 건 전부 다 있을 테고, 새로운 것을 만들려 하니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냥 묻기로 했다. 깜짝 선물은 내년에 해도 좋을 테니까.

    “음…….”

    “전하는 안 돼. 못 데려와.”

    레이블라의 선공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진 모습을 보니 정말로 풋풋했다.

    “그렇게 전하가 좋아요, 오라버니?”

    레이블라가 놀리듯 묻자, 그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에 레이블라가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놀려 댔다.

    “얼마만큼 좋아? 하늘만큼 땅만큼? 바다보다도 더 깊고 너른 마음이야? 당장 보고 싶겠다. 지금이라도 수도에 가 볼까? 얼굴이 굉장히 빨간데, 전하 앞에서 펑 터지면 어떡하지?”

    이렇게 누군가를 놀리는 일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인지 무척 재미있었다. 말하고 나서 자기가 한 이야기에 풉 웃음이 나올 만큼.

    반면에 로이안은 손가락을 꼼지락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남에게서 듣는 것이 영 어색한 모양이었다.

    “어, 어차피 지금 만날 생각도 없어. 아직 나는, 모자라잖아…….”

    “쓰읍!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 오라버니가 어때서. 잘생기고 똑똑하고, 검도 잘 쓰는 오라버니가 뭐가 모자라.”

    레이블라가 열성적으로 그를 변호하자, 로이안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니 레이블라는 괜히 속상해졌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주인공의 자존감을 죽이고 학대한 그놈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를 얼른 처리해서, 이 소심한 아이에게 꿈과 희망과 사랑을 심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아. 결정했어. 후작을 선물로 주자.’

    생일선물로 로이안이 소설에서 했던 방식 그대로 그놈을 공략해서 예쁘게 잘 싸서 건네주면 무척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내심 생각했었는데.

    “뭐? 망했어?”

    푸에블로 후작이 망했단다.

    아니 왜?

    ‘걔는 2부에서 망하잖아?’

    힘을 얻은 로이안이 그를 2부가 전개되는 시점까지 살려 둔 것은 단순히 어머니의 혈육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를 살려 두었고, 비체라발리 공작을 죽이기 전에 그를 처치하면서 혈육의 정이 자신에게 남아 있지 않음을 확인했었다.

    그런데 걔가 왜 벌써?

    레이블라가 정말이냐는 듯이 샬럿을 보았으나,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혹시 공작님이 하신 일이야?”

    “네! 그게…… 아!”

    샬럿이 무어라 말하려다가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닫았다. 달싹이는 것이 뭔가 말을 고르는 듯했다.

    답답해진 레이블라가 다시 물었다.

    “그게 뭐라고?”

    “아가씨께서 하신 말씀이 맞다는 뜻이에요!”

    뭔가 찜찜한데.

    “로이안은 알고 있어?”

    “음, 네. 알고 계세요.”

    대답을 듣자마자 레이블라가 벌떡 일어나서 로이안에게로 향했다. 본관으로 넘어와 방을 배정할 때 배려한 것인지, 이번에도 로이안의 방이 맞은편에 있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로이안이 때마침 검을 들고 있었다. 오후 수련을 위해 나갈 준비를 하는 모습이었다.

    “로이안!”

    “또 같이 가 주려고?”

    오전 수련에 동참했던 터라, 로이안이 기대하지 못한 선물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이블라는 대답 대신 그를 꼬옥 안아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로이안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괜찮아?”

    “괜찮지. 동생아, 오라버니는 언제나 괜찮아.”

    “뭐가 괜찮아. 푸에블로 후작, 공작님이 처리해 주셨다면서. 다 알고 있다면서?”

    “아.”

    로이안이 살짝 놀란 눈으로 뒤따른 샬럿을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안심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우리 동생이 오라버니 걱정됐구나! 기쁜데.”

    “그래도.”

    그에겐 악몽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이 주는 해방감은 잠시일 뿐, 녀석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남아서 앞으로 오랫동안 그를 괴롭힐 것이 틀림없었다.

    원작에서 복수에 성공한 뒤로도, 계속 지난 상처를 되새김질하는 모습이 나왔던 게 생각나 마음이 아렸다.

    “……정말로 괜찮아?”

    “응. 그 사람은 이제 내 가족이 아니니까. 황궁 감옥에 처박히든, 거기서 나오지 못하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

    ……안 죽었어?

    ‘소설에서는 어른이 된 로이안이 죽였는데……?’

    소설과는 좀 다른 결말이기는 했지만, 레이블라는 오히려 이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게 고통받는데, 그런 복수를 어린애가 한다니. 로이안이 상처받지 않아 다행이었다.

    레이블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로이안에게 선언했다.

    “오라버니.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해 줄게.”

    가만히 둬도 해피 엔딩을 맞이할 남자 주인공이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에 잔 상처조차 없었으면 싶었다.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가 있어?”

    “그럼. 내가 무조건 행복하게 해 줄게.”

    당당한 레이블라의 선언에 로이안이 해맑게 미소 지었다.

    레이블라는 그의 순수한 미소를 보면서 이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오라버니를 위해 원로회부터 얼른 처리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라버니, 나만 믿어.”

    꽃길을 걷게 해 주마. 로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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