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9)화 (69/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9화

“아빠요?”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황제의 검 앞에서 ‘네가 잘못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녀석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느냐.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부딪칠 때마다 사사건건.”

“그건 아빠가 잘못한 일이었어요.”

자식으로서 아빠를 사랑했지만,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펠리시티를 위험에 빠뜨렸고 지켜 내지 못했으니까.

비체라발리 공작은 담담하게 말하는 레이블라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부드러운 손길로 레이블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앞으로는 나를 닮을 테지.”

이제는 그가 자신의 아빠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레이블라가 옅게 웃었다.

“위험하면 그만두어도 된다. 너를 지켜 줄 힘은 충분하게 있으니.”

아직까지도 ‘지켜 준다’는 말이 불안하게 다가왔지만, 싫지는 않았다. 여태껏 돛단배를 타고 커다란 풍랑에 맞서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선 기분이랄까.

마음을 터놓고 기댈 상대가 생겼다는 것이, 그 사실이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레이블라는 조금은 단단해진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그리고 웃음이 한 차례 지나갈 무렵, 그의 안색을 살피던 레이블라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뭐든 흔쾌히 답해 주겠다는 듯이 저를 보는 그에게, 레이블라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반역 준비하세요?”

* * *

“아가씨, 표정이 왜 그러세요?”

샬럿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자, 훈련장에 마련된 전용 좌석에 앉아 로이안의 훈련을 응시하던 레이블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 표정이 왜?”

“토라진 솜사탕 같아서요.”

……토라진 솜사탕은 뭐지?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샬럿의 표현력에 어리둥절했지만, 그녀가 말한 것을 반박할 수 없었다.

토라진 게 사실이었으니까.

‘애는 그런 말 입에 담는 거 아니다.’

비장한 마음으로 질문했건만, 비체라발리 공작은 그녀를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취급을 하며 쫓아내 버렸다.

코를 살며시 잡으며 흔든 것은 덤이었다.

‘다시 질문할 새도 없이 쫓겨났어.’

그전까지는 어른과 다를 바 없이 대해 주는 줄 알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진지한 눈초리로 이야기를 잘 들어 줄 뿐이지, 이따금 흐뭇하게 미소 짓는 것도 그렇고 뭔가 하려고 하면 아이를 첫 심부름 내보낸 부모처럼 굴었다.

황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대우였다. 황궁에서는 ‘아이’라기보다는 ‘펠리시티’로 취급했으니까.

“……내가 아기 같아?”

레이블라가 홀로 투덜거리자, 커다란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아기지!”

로이안이었다.

로이안이 힘차게 말하면서 레이블라의 앞에 앉았다. 물과 수건을 건네자, 자연스럽게 받아 들더니 대충 수건으로 땀을 닦고서 물을 마셨다.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리고, 약하잖아. 나도 아직 애니까 레이블라는 아기지.”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면서도 내심 어색했는지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나 밀어내고 무시했는데 갑자기 태도를 바꾸려고 하니 영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진심을 담아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모습이 참 기특하고 고마웠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짚어 줘야 했다. 레이블라는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렇게 말 잘하고 똑똑한 아기는 없어.”

“똑똑해도 나보다 약하잖아. 레이블라는 검 한 번도 못 휘두를 것 같은데.”

내심 그냥 받아 주는 것이 기뻤는지, 로이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러더니 한 걸음 나아가 사람을 놀리기까지 했다.

로이안이 싱글대며 놀리자 레이블라가 호기롭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에 둔 검을 들었다.

로이안의 키에 맞춰 제작된 터라 다른 검보다 작고, 가벼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묵직했다. 양손으로 힘껏 들어야 겨우 들 수 있었다.

레이블라가 가쁜 숨을 토해 내며 내려놓으니 놀리기라도 하듯 로이안이 한 손으로 검을 들었다. 포크인 양 가볍게 다루는 모습이 새삼 대단하고, 묘하게 밉살스러웠다.

레이블라가 뚱하게 보자, 로이안이 아차 싶었는지 얌전하게 검을 내리고 슬며시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 동, 동생 화났어?”

로이안이 서툰 말을 내뱉으면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모습에 레이블라가 괜히 삐친 척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안 났어.”

“응, 안 났구나.”

동생을 대하는 태도가 영락없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노는 오빠의 모습이었다. 그가 헤실헤실 미소를 지으며 살갑게 구는데, 레이블라로서도 더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픽 웃어 버렸다.

그리고 화제를 넘겼다.

“그나저나 요즈음 검술 훈련 시간이 길어지지 않았어?”

“아, 곧 축제잖아.”

“……축제랑 검술 훈련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러고 보니 우리 동생은 아직 모르는구나. 그럼 이 오라버니가 말해 줘야겠다.”

로이안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루빈디시에선 1년에 한 번 아이들을 위한 축제가 열려.”

“어린이날?”

“어린이날? 음, 그런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네. 루빈디시에서는 ‘바르드의 날’이라고 해.”

제국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날을 따로 챙기지 않았다. 대체로 아이를 아이답게 키우는 문화가 아니었다. 10살만 되어도 가문을 이어받을 아이와 받지 못할 아이가 나뉘면서 제각기 살길을 찾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10살이 되기 전에는 10살이 되기 위한 준비 기간일 뿐이고, 10살이 되면 사실상 성인과 다를 바 없이 취급을 하니, 어린이라고 불릴 날은 없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전생에서도 근대가 되어서야 겨우 아이들이 아이들로서의 대우를 받았으니, 그런 면에서 루빈디시는 시대를 앞서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 그날은 어린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행사도 열고 그런 날이야?”

“그렇지. 영지민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여러 이벤트를 준비하는데, 그중에서 유서 깊은 이벤트는 ‘마수의 알 찾기’야.”

“……마수의 알? 그런 걸 아이들이 찾아?”

“에이, 그럴 리가. 그냥 달걀 같은 거 찾는 놀이야.”

단순히 보물찾기라는 뜻이었다.

바르드의 날을 맞은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선물을 주기 위해 만든 이벤트인 모양이었다.

“그럼 왜…… 아! 초대 비체라발리 공작 때문이구나. 여기가 마수의 터전이었으니까.”

로이안이 역사 이야기로 거슬러 갔다. 레이블라도 교육받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 제국을 처음 세운 사람은 라스텔, 비체라발리, 그리고 펠리시티 세 사람이었다.

라스텔에겐 용의 힘이, 비체라발리에겐 마력이, 펠리시티에는 정령의 힘이 깃들어 있었는데 그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이 땅의 마수를 모두 쓰러뜨리고, 사람들을 위해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특히나 비체라발리가 맡은 지역은 유달리 마수가 들끓었는데, 초대 비체라발리의 압도적인 마법과 검술이 마수의 종말을 고했다고 한다. 그러한 전설이 건국사에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그렇지. 초대 비체라발리 공작의 노력이 있었다지만, 그 뒤로도 이 땅에 마수가 나타났으니까. 그래서 매해 토벌하면서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놀이처럼 변했다고 해.”

“신기하네.”

“아, 펠리시티 영지에는 마수가 없지?”

“응. 우리 땅은 정령이 정화한 장소니까.”

초대 펠리시티가 터를 잡은 릴릭카브는 그의 무한한 정령의 힘으로 완전히 정화되었다고 알려진 신성한 장소였다. 그래서 다른 지역과는 달리, 자원이 풍부하고 평화롭기만 했다.

마수니, 뭐니 그런 것은 그저 전설 속의 소재일 뿐 레이블라에겐 현실로 와닿지 않았다.

그러다가 황궁에 들어가서 마수와 전투를 벌인 기사들을 만나고, 다시 이곳으로 오면서 마수와 교전하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았다.

황제와 황녀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이 세상이 소설 속이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레이블라는 정령 본 적 없어? 정령의 축복을 받은 가문이잖아. 초대 펠리시티는 정령이랑 혼인했다면서.”

“그런 거 다 거짓말이야.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별 볼 일 없으니까 거짓말한 걸걸?”

전생에서도 알에서 태어난 인간을 시조로 여기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사람이 알에서 태어나진 않았다.

애초에 건국 신화와 같은 일이 실존했다면 라스텔의 후손인 황녀에게는 드래곤의 힘이, 비체라발리의 후손인 로이안에게는 대마법사의 힘이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소설 속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나중에 황녀가 신성력을 발현하기는 했었다. 신의 사랑을 받아서 회귀했다나 뭐라나.

“그래도 그런 힘이 있었으면 좋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럼 마수도 다 손쉽게 처리할 수 있잖아. 드래곤의 힘이 있으면 진짜 멋있을 거 같은데.”

마수가 존재하는 것처럼, 신기하게도 이 세상에는 소설로만 접해 왔던 드래곤이 실존하고 있었다.

물론, 현시대에선 멸종했다고 했다.

정령이 사라질 무렵 함께 자취를 감춘 뒤로 벌써 수백 년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목격한 자가 없고, 실존했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뼈나, 유산도 남지 않아 그 존재를 의심하는 자들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은 ‘드래곤 레어’의 존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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