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8화
“두 사람은 더 훈련을 받고, 아가씨를 정말로 지킬 수 있을 실력이 되었을 때 다시금 호위 자격이 주어질 것입니다.”
두 사람의 공식 해임 이유는 푸에블로 후작의 습격에서 레이블라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인해 일주일이나 자숙의 시간을 가졌고, 이제는 엄청난 양의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고 했다.
“아가씨, 더 열심히 훈련해서 꼭, 호위 자리를 다시 얻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요.”
“……지금보다 더요?”
지금도 달리기만 세 시간, 검을 휘두르는 것은 다섯 시간씩 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체력 훈련이다, 기본기 연습이다, 뭐다 해서 쉴 틈 없이 훈련련이 이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가끔 명령을 어기고 저를 찾아왔던 클레리오의 모습은 거지꼴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더 한다고……?
‘죽는 거 아니겠지.’
레이블라가 측은한 눈빛으로 보자 그게 응원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두 사람이 신이 나서는 훈련을 하겠다고 뛰쳐나가 버렸다.
레이블라는 작은 한숨과 함께 아이던에게 부탁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시켜 주세요.”
“저 녀석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서요. 그저 아가씨께 선택받았던 것에 무척 자부심을 느낀 녀석들이라, 다시 선택받고 싶은 겁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레이블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답하고서는 아이던을 보았다. 말쑥한 모습에 또다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이던 경이 제 기사가 되어 주어서 기뻐요.”
“저도 기쁩니다, 아가씨.”
클레리오와 토니에게는 미안하지만, 레이블라는 자신에게 수프를 건네며 미소를 지어 주었던 아이던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던 정도의 따스함이었기에 탈출해야겠다는 생각만 아니었다면 레이블라는 처음부터 아이던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마음을 그 또한 알고 있는지, 아이던이 다정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앞으로는 제가 아가씨를 지킬 것입니다.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제가 곁에 있을 겁니다. 아셨지요?”
“성에서도요?”
“예, 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체라발리는 펠리시티보다 적이 많은 가문이니까요.”
그의 말처럼 비체라발리는 정말로 적이 많은 가문이었다.
오랜 세월 다른 가문을 압박하고 때로는 짓밟으며 위에까지 올라온 데다가 지금도 여전히 뒤 세계를 관리하며, 온갖 경로를 통해 귀족들의 자금줄을 속속히 틀어쥐고 있었다.
비체라발리의 손아귀 밖의 귀족보다, 잡혀서 허우적대는 귀족이 더 많았다.
다만, 이번 대의 비체라발리 공작은 전투에 오래 참여한 데다가 그 후계마저 어린 터라 10년 가까이 원래의 위세를 떨치지 못했지만, 그렇다 해서 그 명성이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적은 많았고, 황제의 위협 또한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비체라발리 공작가와 함께 살아남아야 하는구나.’
지금까지는 혼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이제는 로이안과 비체라발리 공작을 함께 살려야만 했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눈앞의 아이던도, 샬럿도. 수많은 비체라발리 성 식구들이 함께 살아남았으면 했다.
그들은 이 미친 세상 속에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한, 정말로 다정한 사람들이니까.
이제는 외면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이들을 모두 살리기 위해서 지금부터 계획을 촘촘히 짜 둘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야.’
원작이 진행되고 있다면 그에 맞추어서 행동하겠지만, 하필 지금은 소설에서 기록되지 않는 시기였고 소설과 똑같은 흐름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호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비체라발리 공작을 찾았다.
현재로서는 황실에 대한 비체라발리의 입장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가주인 비체라발라 공작이기 때문이었다. 레이블라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그의 마음을 듣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그의 앞에서 우선 제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저, 황제에게 첩자가 되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 증거로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작은 유리병을 건네었다. 황제가 준 해독제였다. 또한 그것과 함께 직접 쓴 편지를 작은 손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하려고 했었어요.”
손수 적은 편지 속 내용에는 특별한 것이 적혀 있지는 않았다. 그저 일상의 이야기만 몇 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일상 이야기가 황실에 전해진다면, 악용될 수도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황제의 눈을 속일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단 생각으로, 건네려고 했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가만히 듣고 있던 비체라발리 공작이 물었다.
레이블라는 작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게 말이죠…….”
레이블라는 하나도 빠짐없이 또박또박 최대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풀어내려 노력했다.
요지는 그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비체라발리 공작가에 입양 가라는 명을 받았고, 목숨을 담보로 잡혀 완화제를 계속 먹지 않으면 끝내 죽게 되는 독을 먹었다는 내용이었다.
상황 설명이 끝나자, 그가 빠르게 되물었다.
“해독할 방법이 없다고?”
레이블라가 동그랗고 작은 머리통을 힘껏 앞뒤로 끄덕였다.
“네. 그렇게 들었어요. 지금 앞에 놓인 것은 정확히 하자면 해독제가 아니라, 완화제라고 보시면 돼요.”
“그 빌어먹을…….”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려던 공작이 레이블라와 시선이 마주치자 말을 삼켰다. 대신 이를 으득 물며 손을 힘껏 쥐었다.
그 모습에 레이블라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첩자’보다는 ‘독’이 그에게 우선인 듯했으니까.
레이블라가 키득 웃으며 말했다.
“저, 괜찮아요. 다 나았어요.”
“다 낫다니. 아니다. 신관이 증상을 완화한 것일 뿐, 네 몸에 아직 독이 있다면 문제가 되지. 다행히 완화제가 있으니 이것을 조합하면…….”
“아니, 정말로 다 나았어요. 해독되었어요.”
“……해독되었다고?”
비체라발리 공작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묻자, 레이블라가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공작은 불안해했다.
“안 되겠다. 의사를 불러야겠어. 헤넌!”
그의 부름에 보좌관 헤넌이 기다렸다는 듯이 문 너머에서 답했다. 그가 들어오려고 하자, 레이블라가 다급히 손을 휘휘 저었다.
“잠시만요! 헤넌, 별일 아니에요.”
“레이블라.”
“일단,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레이블라의 말에 비체라발리 공작이 헤넌에게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조용히 레이블라를 응시했다.
“저에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독을 해독할 수 있는 만능 해독제가 있어요. 그래서 나았고요.”
“하지만……그런 게 있다면 왜 처음부터 먹지 않았지?”
비체라발리 공작이 정확하게 지적해 왔다. 그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며 레이블라가 답했다.
“황제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어요.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독을 주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하잖아요. 그래서 완화제를 먹으면서 버텼어요.”
해독제가 없는 독에서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고, 황제에게 알린다면 레이블라는 다시 황궁으로 잡혀 들어갔을 것이다. 해독을 어떻게 한 건지 알려고 들 테니까.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레이블라로서는 라플을 먹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저 첩자 노릇을 계속해 볼까 해요.”
“그러지 않아도 된다.”
비체라발리 공작이 단호하게 잘랐다.
“나는 너를 위험 속에서 빼내려고 했지, 그런 일을 시키려고 한 게 아니다. 나서겠다 생각하지 마.”
“그래도 하고 싶어요. 해독제의 존재를 숨기고 싶거든요.”
만약 첩자 노릇을 그만두겠다 하면, 황제는 그러라고 할 것이다. 어차피 펠리시티의 피가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은 듯했으니까. 그저 비체라발리를 향해 던져준 수많은 미끼 중 하나가 사라진 거라 여기고 말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첩자 노릇을 그만두고도, 완화제를 받지 못함에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황제가 독에 허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독을 개발할 테고, 어쩌면 그 독은 ‘해독초’의 성능을 압도하는 독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렇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었다.
“게다가 첩자 노릇이라도 하면 다른 첩자들과 소통할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어차피 독은 그녀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니, 지금 위치를 유지하는 게 비체라발리에 숨어든 첩자들을 골라낼 수 있는 기회였다.
레이블라가 천진하게 말하자, 비체라발리 공작이 헛웃음을 지으며 한숨 내쉬듯 말했다.
“위험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게 꼭 네 아버지를 닮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