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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7)화 (67/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7화

“제길.”

짓씹듯 욕을 내뱉은 후작이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거친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강한 힘에 밀린 후작이 바닥을 뒹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그가 아픔을 토해 내며 고개를 들자, 익숙한 갑옷이 눈앞에 있었다.

비체라발리의 기사단, 실버 울프였다.

“네, 네놈…….”

실버 울프 중에서도 제법 유명하기로 손꼽는 아이던이 발로 그의 목을 짓눌렀다. 그러면서 후작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목을 누르는 압박이 더욱 강해졌다.

“사, 살려…….”

“감히 우리 도련님과 아가씨를 건드려?”

서늘하게 내뱉으며 주시하는 눈길이 매서웠다.

“……제, 제발…….”

“살고 싶다니. 꿈도 크지.”

짓씹듯 욕설을 내뱉은 그가 후작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다. 그러고는 돌아서며 명령했다.

“끌고 가라.”

“예.”

기사들이 후작을 끌고 나가자, 아이던은 방 안에 널브러져 있던 사내를 응시했다.

그는 얼마 전까지 비체라발리 공작성 안 감옥에 갇혀 있던 자였다. 로이안과 레이블라를 납치하려 든 게 그 죄목이었다. 진즉에 죽거나 죽을 때까지 그 감옥에서 나올 일이 없어야 하는 게 정당하나, 일부러 풀어 주었다.

납치 사건의 배후로 의심되는 자가 친인척이니만큼,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감옥에서 도망친 사내는 역시나 푸에블로 후작에게로 향했다.

아이던은 사내에게로 다가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손에 쥔 것은 마석이었다.

작은 마석이라 황실의 워프 게이트처럼 대규모 이동은 할 수 없지만, 몇 사람이 이동하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회수해야 할 것을 손에 넣은 그가 명령했다.

“이 녀석도 끌고 가. 다시 감옥에 처넣어.”

“예.”

“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챙겨라. 황제에게 올릴 것이다.”

모든 쓰레기는 처리했으니 남은 일은 뒷정리였다. 아이던은 바닥에 떨어진 후작의 초상화를 밟으며 저 또한 서류를 뒤지기 시작했다.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늑대의 본성을 발휘할 차례였다.

아이던이 탈세의 증거를 찾기 시작할 무렵. 밖에서는 예고도 없는 습격에 당황한 사용인들이 발발 떨면서 기사들의 손에 끌려 나오고 있었다.

후작 부인과 후작의 자식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살려 주십시오!”

“저, 저희는 잘못이 없습니다!”

절박하게 외치면서 달달 떠는 모양새는 누가 봐도 피해자의 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이안은 옅게 실소했다.

힘없는 어린아이를 짓밟고 무시하던 인간들이 이제 와 오히려 제가 피해자라는 듯이 굴고 있었으니까. 그토록 구박하던 저에게 넓은 아량, 자비를 바라고 있으니 말이다.

“로, 로이안……!”

어느새 끌려 나온 후작이 로이안을 발견하고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불렀다. 마치 구세주라도 본 낯빛이었다.

“네가 와 주었구나. 얼른 나를 풀어 달라 명하거라. 어서!”

후작은 여느 때처럼 자기가 주인이라는 듯이, 여전히 그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듯이 명령했다.

그 꼴은 굉장히 처량했다. 기사들의 손을 뿌리치고 무릎을 꿇은 채 비척비척 기어 오는 꼴이 한심했다.

로이안은 저에게 다가오는 후작의 모습을 무심하게 보면서 제 곁에 선, 저와 똑 닮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제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고 싶다 하셨습니까?”

카시우스가 끄덕이자, 로이안이 검을 꺼내며 후작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검 끝이 후작의 손등으로 향했다.

“이 손에 제가 뺨을 맞고 벽에 머리가 부딪쳤습니다.”

그가 가볍게 후작의 손을 베었다.

“으아악!”

동시에 후작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고통으로 신음하던 그가 한 걸음 다가오는 로이안에게 질겁하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저 발로 제 배와 등, 허벅지를 찼습니다. 공이라도 되는 것처럼요.”

그가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로, 로이안, 제, 제발……!”

“저 입으로, 비체라발리와 어머니, 아버지를 모욕했습니다. 그리고.”

로이안이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내며 살려 달라고 청하는 후작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앞에 선 로이안이 검 끝을 후작의 입으로 가져다 댔다.

“저 입으로 납치를 명하는 바람에 내 동생이 다쳤습니다. 내가 아니라, 내 동생이.”

“미, 미안하다, 정말로 미…….”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후작의 가족들도 다 그와 같은 꼴이 되어 곁에 서겠지요.”

“로, 로이안!”

로이안은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상황을 마무리했다. 그러고는 더러운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털어 검집에 밀어 넣었다.

“당신은 앞으로 황궁의 제일 깊고 어둡고 습한 곳에 처박히겠지. 바닥에 고인 습기를 핥아먹으며, 빛이라고는 가끔 드나드는 기사의 등불이 전부인 삶을 살 게 될 것이다.”

“내, 내가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후작이 발끈하며 하는 말에 로이안이 코웃음 쳤다.

“때가 되면 알겠지.”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못할 자였다. 패배자의 짖음 따위 그저 한심할 뿐이었다.

로이안이 돌아서자,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비체라발리 공작이 물었다.

“직접 복수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더냐.”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로이안은 이 모든 복수를 제 손으로 직접 하고 싶었다. 수치스러운 과거를 청산하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했고, 빠르게 성과를 내어 하루빨리 작위를 이어받고 싶었다.

하지만 복수보다 소중한 것이 생겼다.

가족.

처음에는 그깟 가족 따위가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어머니를 잃고 외삼촌에게 핍박당하며, 가족 따위 필요 없다고 믿으며 지내 왔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양 치부하던 순간에도 그 누구보다 가족의 존재를 갈망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는 삼촌과 그 가족들을 보며 가슴이 지끈거리는 일도 없었을 테고, 매일 밤 ‘나는 저런 것이 필요 없다’며 애써 되뇌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억지로 모습을 꾸밀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 주고 기꺼워해 줄 가족의 존재가 필요했다는 것을 알려 준 사람이 바로 레이블라였다.

레이블라, 자신의 동생 덕분에 더는 어린아이처럼 제 마음을 외면하지 않았고, 소중한 가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선물 같은 존재에게 아픔을 준 놈이라니.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지만, 더 고통스럽게 해 주고 싶었다. 천천히 죽어 주어야 레이블라를 다치게 한 데 따르는 후회를 오랫동안 할 테니 말이다.

“저는 충분합니다.”

레이블라의 복수를 해 주었으니까.

앞으로 저 때문에 또다시 위험할 일은 없을 테니까.

로이안은 무심한 낯빛으로 후작저의 풍경을 두 눈에 담았다.

이곳에 다시 오면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만으로도 화가 났고, 다 쓸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는데…… 막상 보니 아무렇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드문드문 올라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과거가 어찌 됐든, 이제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해서 울려 댔다.

그래서 그냥 웃음이 났다.

그저 얼른 돌아가고 싶어졌다.

“레이블라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인사해 주어야 하니까 이만 돌아갈 겁니다. 남은 건 알아서 하십시오.”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렇게 몇 걸음 걸어 나가던 로이안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황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전하께서는 잘 지내실까.’

당장 가서 만나고 싶기도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어린애 같은 모습으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금세 시선을 거둔 그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성의 전반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집사장, 키어런입니다.”

“실버 울프의 1기사단장이자 실버 울프의 부지휘관, 제라노프 롬날입니다.”

“실버 울프 2기사단장 아이던 클로펜타 입니다, 아가씨.”

“저는…….”

레이블라가 비체라발리의 성을 받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성의 식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와 정식으로 인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레이블라는 이미 한 달이 넘게 지내 온 데다가 모두의 이름을 알고 있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다들 하고 싶다고 하여 막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 앞으로는 제가 아가씨의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인사를 마치고 돌아갔을 무렵, 처음 인사를 나누었던 아이던이 다시 앞으로 나서며 레이블라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무척이나 설레어하는 표정이었다.

반면에 그의 뒤에 선 클레리오와 토니는 시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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