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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6)화 (66/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6화

“아빠가, 부탁했어요?”

“그래.”

그렇지만 비체라발리와 펠리시티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 아니었나?

어떻게……?

“내가 다섯 번째 전쟁에 나가기 전, 작은 아기를 본 적이 있다. 100일도 채 지나지 않은 아이였지.”

비체라발리 공작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 아이를 데려온 녀석이 말했지. 딸은 유리처럼 소중히 안아야 하고,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고. 그러면서 제 아이를 나에게 안겨 주었지.”

과거에 잠겼는지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나를 보면 보통 아기들은 울음을 터트리는데, 그 아기는 웃더구나. 쌀알처럼 작은 다섯 손가락으로 내 손가락을 붙들면서 웃는데. 그걸 보고 아이 아버지가 그랬지. 널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리고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딸을 부탁한다고.”

……아빠.

“레이블라.”

비체라발리 공작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도 다정했다.

“나는 더 이상 의미 없는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았다. 로이안을 홀로 두고 싶지 않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너를 만나고,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쩌면 전장에 서는 것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

“지켜 주마.”

울컥. 눈물이 터졌다.

저도 모르게 서러워서. 너무 서럽고 외롭고, 힘들었던 마음이 쏟아졌다.

결국, 바보처럼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내가, 로이안이 비체라발리가 네 곁에 있을 거야.”

펑펑 눈물을 쏟아 내는 레이블라에게 비체라발리 공작은 계속해서 말해 주었다.

이 세상에서 함께하자고. 지켜 주겠다고.

꼭, 너를 지키겠다고.

* * *

울다가 지쳐 잠든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낯선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게다가 손이 무척 따끈했다. 시선을 내리자,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자는 로이안이 있었다.

마주 잡은 두 손에서 다시는 어디도 가지 못 하게 하겠다는 고집이 느껴졌다.

저를 생각하는 마음이 훤하게 보여서 레이블라는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한참이나 맞잡은 손을 보다가, 레이블라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내가 정말, 가족이 되어도 되는 걸까?”

“……오라버니라고 불러 주면.”

자는 줄 알았던 로이안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그가 빼꼼히 고개를 들면서 말을 이었다.

“앞으로 꼬박꼬박 오라버니라고 하면, 오라버니가 되어 줄게.”

‘오라버니’라는 말이 어색하고 낯선지. 자기가 먼저 불러 달라고 말하면서도 로이안의 얼굴이 옅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가만히 바라보자 그가 민망한 듯 고개를 푹 숙여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에 레이블라가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싫은데.”

“뭐? 왜!”

부끄러워서 얼굴을 숨길 때는 언제고. 로이안이 발끈하며 고개를 바짝 들었다.

레이블라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로이안은 나보다 공부 못하잖아.”

“……앞으로는 더 잘할 거라며.”

억울하다는 듯이, 배신당한 것처럼 로이안이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손은 여전히 꼭 잡고 있었다.

맞잡고 있는 손은 무척이나 작았다. 그럼에도 그 작은 손이 믿음직스러웠다. 너무 믿음직스러워서, 기대고 싶어졌다.

“내 가족이 되어 줘, 로이안 오라버니.”

힘겹게 말을 내뱉는 순간, 로이안이 무척이나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너무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답한 그가 레이블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로이안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으며 문 쪽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아버지! 우리 집 막내 생겼어!”

그때를 기다린 것처럼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열렸다. 동시에 사람들이 와르르 쏟아지듯 넘어졌다.

마치, 귀를 대고 듣고 있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말해 주듯이.

“으윽…….”

“거기, 누구야. 칼집이 내 허벅지 찌르잖아.”

“아, 그러게 뒤로 가라니까요!”

끙끙 앓으면서 중얼거리는 것도 잠시,

“아가씨! 축하드려요!”

누군가의 외침에 이끌리듯, 모두가 너 나 할 것 없이 신이 난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벅찰 만큼 밀려드는 축하와 환호성이 귓가를 뒤흔들었다. 넋이 나간 듯 레이블라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축하하는 사람들 목소리 사이로 작은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샌드위치처럼 넘어진 사람들을 잘근잘근 밟으며 넘어오는 샬럿이었다.

유유히 모두를 넘고서 방 안으로 들어온 샬럿이 레이블라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고개 숙였다. 그리고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샬럿 드뷔시. 앞으로도 아가씨를 성심껏 모실게요.”

“저도요!”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또다시 우렁차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레이블라는 그만 웃고야 말았다.

행복감에 벅차오르다 못해 하늘 끝까지 닿을 것만 같았다.

* * *

“……실패했다고?”

푸에블로 후작이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작게 중얼거리더니, 순식간에 얼굴을 찌푸리면서 책상 위를 거칠게 쓸었다. 와르르 쏟아지는 물건의 파열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어떻게! 그걸 어떻게 실패를 해!”

쾅, 양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일어난 후작이 제 앞에 고개 숙인 사내에게로 다가가 멱살을 붙잡았다.

그리고 저보다 한 뼘은 더 큰 사내를 힘껏 흔들면서 소리쳤다.

“성공할 수 있다고, 맡겨 달라고 하지 않았나!”

“……죄, 죄송합니다.”

“이런 젠장!”

짜증을 내뱉은 후작이 다시 사내를 밀치고 온 힘을 다해 발길질을 퍼부어 댔다. 호흡이 거칠어질 때까지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졌다.

사내가 묵묵히 맞고 있었음에도, 후작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손에 잡히는 것들을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내던졌다.

거친 소음과 함께 파편이 사내에게 튀었다.

“빌어먹을.”

후작가에서 운영하는 사업체가 서서히 망해 가고 있었다.

원인은 당연히 비체라발리 공작이었다. 그 인간이 돌아온 후부터 발생한 문제였다.

‘처음부터 싹을 잘라 냈어야 했는데!’

처음에는 그저 작은 손해였다. 모래알처럼 작디작아서 신경 쓸 가치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점점 모래알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났다. 그게 모이자 한 줌이 되고, 어느새 양손을 가득 채우다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수습하려 했을 땐 이미 늦었다. 뒤이어 드러난 배후는 비체라발리 공작이었다.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이 자기 정체를 드러낸 공작은 사람을 농락하듯 제멋대로 활개를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의 장난이 멈추었다. 그래서 그때만 해도 후작은 공작이 그저 자기 아들에게 한 짓에 대해 작은 경고를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뭐, 그놈을 조금 괴롭히기는 했었으니까.

‘그놈이 빌어먹을 노인네 눈에만 들지 않았으면 내가 괴롭힐 일이 뭐가 있었겠어? 다 노인네 탓이지.’

시도 때도 없이 딸에게 가문을 물려주었어야 했다며 노래를 부르던 노인네가, 그 딸이 낳은 자식이 가문으로 오자 이제는 손자를 입에 달고 살았다.

‘로이안. 너는 참 영특하구나. 네가 우리 가문에서 태어났어야 했거늘.’

‘넌 어찌 로이안만도 못하누. 반이라도 하면 내가 속이 터지지나 않지.’

‘멍청한 것. 네놈에게 승계를 할 바에야 차라리 로이안이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 가문을 물려주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네의 마음에 든 것으로도 모자라 비체라발리까지 물려받는 그놈이 고깝지 않을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소한 문제였으니, 공작도 적당히 멈출 것이다. 이제는 끝이라고 믿었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후작이 이끌던 상단의 대표가 바뀌었고, 투자한 상선이 갑자기 습격을 받고 가라앉았으며 마지막 남은 자금줄이던 영지에서도 문제가 터졌다. 이틀 전에 영지를 관리하던 대리인이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후작가의 기반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 유서 깊은 가문이 비체라발리의 입김 한 번에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체라발리 공작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연락해도 만나 주지 않았고, 측근을 통해서도 찾아가 보았지만, 실패였다.

마치 저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로 일관하니, 그에게 남은 방법은 오직 로이안뿐이었다.

그래서 그를 데려와 협상하려 했건만…….

그조차 실패한 데다가, 그 사실을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들키기까지 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달아나야 해. 그 새끼가 오기 전에.”

아이를 직접 건드렸으니 비체라발리 공작이 직접 움직일 것이 틀림없었다.

제 누이였던 공작 부인이 죽었을 때, 선대 후작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황궁으로 쳐들어갔을 정도로 눈이 돌면 가차 없는 녀석이니까.

아무리 그가 수도에 있고 비체라발리 공작은 수도에서 한 달이나 떨어진 영지에 있다고 한들, 그놈은 남들과 달랐다. 돈이 넘치도록 있으니 분명 마석을 잔뜩 사용할 테고, 금세 저택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당장 가지고 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곱씹으며 후작이 집사를 불렀다.

그런데 당장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야 할 집사가 반응이 없었다. 다시 집사를 불렀지만 조용하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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