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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5)화 (65/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5화

어쩌면 로이안은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많이 정이 들었으니까. 샬럿도 솜사탕을 잃어버렸다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들을 생각하자 다시금 씁쓸함이 밀려왔다. 레이블라는 저도 모르게 밀려드는 후회를 털어 내려는 듯 휘휘 고개를 젓고서 품 안에 있던 꽃을 꺼내었다.

조금은 시들해진 보랏빛 꽃. 라플. 해독초였다.

‘정말로 마지막이야.’

이제 제국을 벗어나게 되면, 더는 독을 품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레이블라는 가져온 꽃송이들을 따서 하나씩 하나씩 꽃잎을 입 안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으니 씁쓸한 맛과 함께 꽃 향이 감돌았다.

‘바리베 왕국으로 가면 집을 찾고…… 그리고 적당히 돈이 모이면 칼릭스도 찾아야겠다.’

그동안 전쟁에 관해 소식이 밝은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칼릭스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었다.

자신은 탈출할 테니까.

황제가 보낸 아이가 사라진다고 하면 비체라발리의 입장상 곤란해질 것이 틀림없었다. 만약 칼릭스를 찾는 걸 알면 계속 그쪽을 주시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참았었다. 칼릭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지내고는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입을 닫고 모른 척했었다.

하지만 바리베 왕국에 넘어가서 직접 수소문하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주 무대만 벗어나면 더는 ‘레이블라 펠리시티’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사업은 작은 것부터 해야겠다. 꽃이라도 팔까?’

아이가 해도 의심하지 않은 것들부터 시작해서 정보를 얻고, 어떤 것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미래를 모르는 삶이라니. 약간은 두렵지만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설레는 것도 같았다. 왠지 몸에 열이 나는 것도 같고…….

아니, 명백히 열이 나고 있었다.

‘……진짜 황제는 끝까지 진상이네.’

신관의 치료를 받은 데다가 일주일 요양했으니 건강이 나빠서 생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조금 전 해독초를 먹고 남은 황제의 독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생긴 열이 틀림없었다.

맨 처음 독을 먹고 해독제를 먹었을 때도 엄청나게 열이 났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증상인 모양이었다.

문뜩. 루빈디시로 향하던 날이 떠올랐다.

‘괜찮은가.’

저도 모르게 열이 나서 기절했다가 깼을 때, 비체라발리 공작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 주었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어찌나 따스했는지.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꼭꼭 잠그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었다.

아이던도, 클레리오도. 다른 기사들 모두. 다들 이 존재감 없는 조연에게 참 잘해 주었었는데.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음에도 어쩐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눈을 뜨면 현실이 덮칠 것 같아서.

생각보다 행복했던, 그 현실에 발목이 붙잡힐까 봐서.

‘더워…….’

점점 열이 차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어질어질하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마차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상단주인가?’

말도 없이 사람을 안다니. 자는 줄 아는 걸까.

혹시, 두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걱정되는 마음에 레이블라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마주 보았다.

보랏빛 눈동자를.

‘……왜?’

왜, 이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당혹스러운 마음이 가득 담긴 눈으로 눈앞의 이를 보다가 다급히 그를 밀어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손아귀로 그를 밀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제국이 인정한 불패의 기사, 황제와 버금가는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

어떻게 도망가지. 몽롱한 머리를 억지로 굴려가며 생각하고 있는데, 대뜸 공작이 물었다.

“이 몸을 해서 어딜 간다는 것이냐.”

언제나 반듯했던 그의 낯빛에 걱정이 묻어 있었다.

미간을 살짝 좁힌 그가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비체라발리는 마음에 들지 않았나?”

아니다. 너무 좋았다.

“아니면, 내가 양육자로서 모자란 건가? 고귀한 펠리시티는 더러운 비체라발리와 어울리면 안 되니까?”

“아니에요!”

그건 정말 아니었다.

“비체라발리는 더럽지 않아요.”

소설로 볼 때는 솔직히 깨끗한 가문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제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비체라발리.

‘악의 귀족’이라는 말처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황제와 손을 잡기도 하고 다른 귀족 가문과 멋대로 결탁하기도 하고, 어둠의 조직들을 관리하여 키우는 데다가, 타인에게는 냉정하리만큼 차가웠으니까.

숱한 전쟁을 겪어서인지 사람을 죽이는 일에도 무감했으며, 공감력은 하나도 없는 가문처럼 그려졌기에 솔직히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겪어 본 비체라발리는 그렇지 않았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따스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문이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 속에서 펠리시티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이었다.

“그럼 왜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미래에 너희들은 망할 수도 있다고. 그냥 망하는 것도 아니고 철저하게, 잿더미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로이안과 비체라발리 공작이 화해했으니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레이블라는 최악의 가정을 배제할 수 없었다.

펠리시티도 그러했으니까. 완벽했던 가문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어 버렸으니까.

“우리도 펠리시티처럼 멸문할 것 같아서 두려운가?”

레이블라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자, 공작이 말했다.

“네가 두려워하는 게 보이는데 모를 수가 없지.”

“…….”

“사람들과 깊이 친해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거리를 두려고 하고. 그러면서도 나와 내 아들이 엇나가는 건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전전긍긍했지.”

자신은 타인과 친해지는 것을 꺼리면서, 다른 부자가 멀어지는 것은 두고 보지 않았다. 그러면서 종종 비체라발리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죄송해요.”

레이블라로서는 미래를 모두 알기에 한 행동이지만, 비체라발리 공작으로서는 불쾌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모욕적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궁금해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무슨 이유로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레이블라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 하나뿐이었다.

“……하루아침에 망하는 걸 눈앞에서 봤으니까요.”

주인공은 그 누가 와도 이길 수가 없었다. 사연 있는 악당이든 이름 없는 엑스트라든 그저 주인공의 운명이 나아가는 급류에 휩쓸려 깨끗하게 쓸려 나가는 것이 존재의 목적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황제가 원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달아나고 싶었나?”

레이블라가 입술을 꼭 깨물고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공작이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지. 레이블라. 네가 달아나려는 진짜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 아닐 텐데.”

“…….”

“무서워졌기 때문이지. 또 잃을까 봐 두려우니까.”

“당연하잖아요.”

말로는 누구를 지키니, 뭐니 했지만, 사실상 제대로 이룬 것이 하나도 없었다.

누구 하나 지키지 못했고, 실패만 해 온 나날이었다.

비체라발리라고 다를까?

낙관적으로 생각하고는 있지만,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좋게 흘러가면 다행이겠으나, 이 세상이 축복한 존재인 황녀, 세계관 최강자인 황제가 개입하면 평탄한 길도 가시밭길로 변할 수 있었다.

그걸 알기에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괜히 정을 주었다가 또 잃기라도 한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그런 경험은 딱 한 번이면 충분했다.

지금은 칼릭스만으로도 벅찼다. 그러니까 더는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잃어버리고 아파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없는 게 낫잖아요.”

체념 섞인 레이블라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났다.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읽은 비체라발리 공작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담겼다.

“겁쟁이구나.”

레이블라는 울컥하는 마음이 솟았지만, 차마 반박하지는 못했다.

사실 그게 맞으니까.

아무리 이런저런 소리로 덧붙인다고 한들, 사실은 겁쟁이라서 달아나는 것이 진심이었으니까.

레이블라가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시선을 떨구자, 비체라발리 공작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지켜 주겠다.”

……지켜 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소설 속 최종 보스, 악역, 흑막. 무시무시한 수식어를 지닌 비체라발리 공작이었다. 주인공이 아닌 이상, 결말은 뻔했다.

주인공이 원하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사라질 텐데.

물론 비체라발리 공작의 강함은 알고 있지만, 사람의 싸움이 꼭 ‘강함’으로 해결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 생각을 뒤로한 채, 달달 떠는 레이블라를 힘주어 안은 비체라발리 공작이 믿음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가 필요할 때 기댈 수 있는 장소가 되어 주마. 네가 좀 더 클 때까지 안전한 울타리도 쳐 주지. 아이에게는 그런 장소가 필요한 법이니.”

듣고 싶지 않아.

레이블라는 차라리 귀를 막고 눈을 감아 버렸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이.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점점 울고 싶어졌다.

울먹이는 레이블라를 가만히 살피던 그가 대뜸 질문을 해 왔다.

“펠리시티가 무너졌을 때, 네 아버지가 너만 다른 나라로 빼돌리려 했다지.”

그 소리에 레이블라가 흠칫 놀라 눈을 떴다. 어떻게 그가 알고 있나 싶어서.

“어디로 가라고 했는지 기억하는가.”

포스타리모였다.

“그 나라를 침략하고 있던 자의 이름은.”

……비체라발리 공작.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보자, 공작이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펠리시티 공작이 너를 내게 보내려 했었지. 아이를 보낼 테니 잘 보살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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