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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4)화 (64/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4화

‘없겠지.’

‘펠리시티’는 이 세상의 악역이니까.

모두가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레이블라 펠리시티’가 행복한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미 황제에게는 목숨 따위 언제 거둬도 상관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데다가,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온통 ‘펠리시티’라고 하면 이를 가는 상황이니까.

그러니까, 도망가는 것이 맞는데. 지금 당장 이 저택을 떠나는 것이 옳은데.

알고 있는데.

알고 있으면서도 왜 아직도 이렇게 마음이 심란한지 모를 일이었다.

레이블라는 창 너머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달빛이 구름에 가려질 무렵에서야 겨우 달빛이 고인 책상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달빛이 세상을 비추었을 때.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편지 하나만 남아 있었다.

* * *

‘잘한 일이야.’

달빛이 비치는 길을 빠르게 걸어가면서 레이블라는 몇 번이나 되뇌었다.

잘한 일이라고.

이 빌어먹을 소설을 벗어나게 되어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평생 들러리 인생이라니. 정말로 최악이잖아?

‘그래, 이제는 나도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 봐야지.’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각자 인생이라는 이름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된다는데, 레이블라는 그 인생을 도둑맞은 상태였다. 이제는 빼앗긴 소설 속 주인공 자리를 되찾을 차례였다.

자신만을 위한 세상에서 자신만을 위한 해피엔딩을 맞을 것이다.

‘아빠가 행복해지라고 했으니까.’

그러니 이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바리베 왕국으로 가면 더는 황제의 위협도, 제국민의 눈총도 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 가끔은 힘들고 울고 싶은 날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불합리한 일로 고통받을 일은 드물 것이다.

‘날 위해 목숨을 걸었던 가신들을 위해서라도 떠나는 게 옳은 선택이야.’

후회하지 말자. 절대로 후회하지 마.

그렇게 다짐한 레이블라가 성큼 상단으로 들어섰다.

상단은 이전에 왔을 때와는 달리 떠들썩했다.

“뭐냐, 꼬맹아.”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각에 밤톨만큼 작은 아이가 갑자기 안으로 들어서니, 금세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물건을 나르던 사내가 다가와서는 레이블라에게 말을 걸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상단주님을 만나러 왔어요.”

“……네가?”

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레이블라의 차림새를 살폈다. 고급 로브를 둘러쓴 말끔한 모습이 귀족의 아이라고 판단한 듯 재차 말을 이었다.

“아. 상단에 투자한 가문의 아이인가……? 꼬마야, 여긴 위험하다.”

“아니에요. 제가 상단주님을 만나려고 해요.”

“뭐?”

“약속도 했어요. 제 이야기하면 아실 거예요. 며칠 전에 쪽지를 주고 갔다고 말씀해 보세요.”

그가 귀찮은 기색을 드러내자 레이블라가 그에게 슬쩍 금화 하나를 내밀었다. 잠시 놀란 눈을 하다 금화를 슬그머니 품속으로 숨긴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상단주에게로 향했다.

“잠시 여기 있거라.”

사내가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지만, 가만히 있을 레이블라가 아니었다.

레이블라는 몰래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자,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상단주님.”

“넌 누구냐, 밤톨아.”

레이블라를 ‘밤톨’이라고 부른 사내는 회색 머리의 건장한 사내였다. 직접 상단의 호위를 맡는지, 커다란 대도를 등에 멘 그는 무척이나 강해 보였다.

“저기, 이 아이가 상단주님과 약속을 했다고 해서…….”

“나와?”

사내가 당황한 듯 주눅 든 목소리로 말하자, 상단주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네가 내 손님이라고?”

그가 레이블라를 쓱 훑어보면서 키를 가늠했다. 저보다는 세 배 이상 작은 데다가,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표정은 순진한 것이, 영락없이 어린아이였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러고는 바깥으로 내쫓으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용병은 구하셨나요?”

레이블라가 입을 여는 순간,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네가 그 편지를 보냈나?”

의아한 목소리로 질문하자, 레이블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사내가 레이블라를 데려온 남자에게 턱짓했다.

불청객이 사라진 후, 상단주가 레이블라를 자리로 안내했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본 상태가 되어서야 그가 말문을 열었다.

“그래. 내가 얼마 전에 편지를 받았지. 한 달 반 정도 지났나. 내 상단을 방문한 손님이 건넸다던 편지였지. 용병에 관한 정보가 있었는데…… 정말 너냐?”

레이블라가 씩 웃으면서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알려 준 곳 가서 괜찮은 용병을 구했지. 내가 용병이 필요한 것은 어떻게 알았느냐?”

“수도에서 들었어요. 최근 전쟁 때문에 약탈이 심해져서 용병이 더 필요하다고는 이야기 들었다고요. 그래서 혹시나 했어요.”

“흐음. 그래. 그랬단 말이지.”

그가 턱을 매만지면서 물었다.

“그래서, 우리랑 함께 가고 싶다고?”

“네. 바리베 왕국까지 데려가 주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살 집을 찾아 주시면 돼요. 그에 따른 비용은 낼 거예요.”

“혼자 살겠다고? 네가?”

그가 코웃음 쳤다.

“짤따란 다리로 어떻게 혼자서 살겠다고?”

“살 수 있어요. 못할 거 없잖아요. 집은 상단주께서 구해 주실 테니까요.”

“너, 사기는 당해 봤냐? 내가 사기 치면 어쩌려고?”

“사기는 치지 못할 거예요. 저를 도와주시기만 하면 사기치는 것보다 더 좋은 정보를 알려 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펠리시티니까?”

“네, 펠리시…….”

……어떻게 알았지?

일부러 로브를 쓰고 있었는데.

의아한 눈빛으로 보자, 그가 말했다.

“루빈디시에서 실버 울프를 못 알아볼 상단은 없다.”

“아.”

처음 이곳을 방문했던 날. 레이블라는 클레이오, 토니와 함께했었다. 레이블라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숨겼지만, 그들은 딱히 얼굴을 가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레이블라’가 아니라 ‘실버 울프’와 온 어린 소녀에 관해 알아봤을 테고, 자연스럽게 ‘레이블라 펠리시티’를 연관 지은 모양이었다.

레이블라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뭐, 생각보다 똘똘하기는 한 거 같구나. 비체라발리의 허락은 받은 거겠지?”

“그건…….”

허락은 받지 못했다. 일방적인 전달만 했을 뿐이었다.

차마 답을 하지 못한 채 살짝 입만 벌리고 있자, 그가 껄껄대며 웃었다.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아직 애군. 정말 혼자서 살 수 있겠어?”

“살 수 있어요. 못 살 이유가 없잖아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툭 쏘아붙이자, 그가 다시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왜 웃는 거지?

그 웃음이 어쩐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아서 레이블라는 저도 모르게 뾰로통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또 한참을 더 웃은 상단주가 느긋한 미소로 웃음을 갈무리했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제 무릎을 '탁' 쳤다.

“뭐, 밤톨이라도 사정은 있겠지. 좋다.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도와주마.”

“정말요?”

“그래. 내 마차에 타거라. 자리를 내어 주마.”

“아니에요. 그냥 짐마차도 괜찮아요.”

“귀하게 자란 아이가 무슨 짐마차냐. 내 마차에 타고, 내 옆에 있어라. 우리 상단에도 펠리시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녀석들이 있으니.”

그렇지. 없을 리가 없지.

“……그럼 안내해 주세요.”

그 사람이 못된 마음을 먹고 중간에 버리고 갈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이 제국 땅을 밟고 있는 이상 끝까지 방심해선 안 됐다. 제 목숨을 위해서라도 상단주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았다.

금세 고집을 굽히자, 또다시 상단주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곧 출발이니 먼저 들어가 있거라. 나는 귀빈들 앞에 나서야 하니 곧 따라가마.”

레이블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바로 밖으로 나가면서 마차로 안내했다.

레이블라가 탑승할 마차는 다른 마차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외형이 똑 닮아 있었다. 하지만 내부는 다른 것과는 달리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외관을 비슷하게 한 이유는 도적의 집중 공격을 막기 위해서인 듯했다.

“식사는 가리는 거 없지? 다녀오면서 과일이라도 가져다주마.”

“감사합니다.”

상단주는 레이블라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꾸하며 마차의 문을 닫고 제 할 일을 찾아 떠났다.

홀로 남은 레이블라는 작은 한숨과 함께 마차의 창 너머를 응시했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가면서 즐겁게 떠드는 모습이 무척이나 활기차 보였다.

‘진짜 기분 이상하네.’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늘 저들 틈에 끼어서 같이 웃어 보고 싶었다. 웃고 떠들고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고. 그런 날이 온다면 무척이나 즐거울 것이라고, 정말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런 순간이 찾아왔음에도 어쩐지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아직은 완벽한 탈출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두고 온 것에 미련이 남아서일까.

‘……찾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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