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3)화 (63/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3화

    * * *

    이게 무슨 상황이지?

    레이블라는 입술 앞으로 다가오는 수프를 얼떨결에 받아먹으면서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 아. 해.”

    제 수발을 드는 사람이 무려,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까칠남 로이안이기 때문이었다.

    “어서, 레이블라.”

    수프가 입가에 흐를까 조심스럽게 넣어 주는 것은 물론이요, 엄청나게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까지 불러 주고 있었다.

    ……이분,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죠?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는지, 로이안이 수저를 내려놓고서 레이블라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미안해.”

    사과를.

    “……응?”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미안했어. 내가 그간 괴롭혔던 거.”

    아니, 지금 듣고 있는 말이 현실이 맞을까?

    이 세상 둘도 없는 미운 세 살 같았던 로이안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확실한지 세상 모든 게 의심되었다.

    ‘그’ 로이안이 눈썹꼬리를 내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들은 말이 환청은 아닌 모양이었다.

    몸을 살며시 숙인 채 어딘지 모르게 풀이 죽은 듯한 동그란 머리통을 앞으로 내미는 모양새가 강아지 같았다.

    레이블라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정리된 보드라운 은빛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닿으며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오, 오라버니한테 못하는 짓이 없어.”

    “……오라버니?”

    “그럼, 오라버니지. 넌 비체라발리로 넘어왔고 내가 세 살이 많은데.”

    ‘오라버니’ 네 글자를 힘주어 또박또박 말하는 태도가 꼭 그렇게 불러 달라는 것 같았다.

    해 줘야 하나.

    “이 오라버니가 앞으로는 너 다치는 일 없게 할게. 검술 훈련 열심히 할 거야.”

    “지금도 열심히 했잖아. 밤에도 혼자 수련하고. 저기, 저쪽 커다란 나무 안쪽에서.”

    “……알고 있었어?”

    “그럼. 내가 노력하는 거 똑똑히 봤어. 천재가 노력하니 하루하루가 다르게 강해질걸? 내가 확신한다고 했잖아. 로이안은 위대한 검사가 될 거라고.”

    레이블라의 칭찬에 로이안이 조금 부끄러웠는지, 살짝 시선을 낮추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그때였다.

    “레이블라.”

    비체라발리 공작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놀라운 것은 그가 왔음에도 로이안의 표정이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듯 편안하다는 점이었다. 그것뿐인가.

    “오셨습니까.”

    무려 인사까지 하고 있었다.

    “……로이안?”

    눈앞에 있는 꼬꼬마가 정말 로이안이 맞는 건가?

    충격으로 동공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는지, 로이안이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모습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설마. 설마. 설마?

    “……화해했어?”

    고구마 100개 부자, 화해했니?

    레이블라의 물음에 로이안이 멋쩍은 표정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그러고는 부끄러운 듯이 답했다.

    “네가, 네가 바랐잖아.”

    로이안이 누가 바란다고 순순히 따를 사람인가.

    어쩐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이 화해했다는 사실뿐이었다.

    레이블라가 환하게 웃으며 로이안을 안아 주었다.

    “잘했어. 로이안.”

    그러면서 공작을 향해 웃었다.

    ‘어떻게 그 파괴적인 입담으로 아들과 화해하셨어요. 정말 장하십니다.’

    라는 마음을 담아서.

    한 차례 벅차오르는 기쁨이 지나가고, 레이블라는 로이안의 목을 둘렀던 팔을 풀고 그의 얼굴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표정은, 정말 괜찮은 것 같은데.’

    비체라발리 공작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것이라면, 지금쯤 그는 어머니에 관한 진실을 들었을 것이다. 범인이 ‘황제’라는 걸 알았다면 로이안은 많이 혼란스러웠을지도 몰랐다.

    황녀를 좋아하니까.

    황녀를 이 세상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알고 보니 원수의 딸이라니.

    분명, 로이안에게는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진실이었다.

    “괜찮아?”

    로이안에게 묻자, 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비체라발리 공작과 눈을 마주치고, 시선을 교환하기까지 했다.

    이전의 독기 어린 눈빛이 아니라, 믿음으로 끈끈해진 눈빛이었다.

    ‘잘됐네.’

    그토록 바라던 일이 눈앞에서 이루어지니 레이블라 또한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미련 없이 떠나도 되겠어.’

    이제 이 두 사람은 빌어먹을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니까. 더는 오해로 서로를 해코지할 일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후련해져야 하는데. 왜 가슴이 지끈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 * *

    그 뒤로도 레이블라는 일주일이나 꼬박 침대에 있어야 했다.

    신관이 치료해 주었기에 몸은 무척이나 건강했지만, 비체라발리 공작과 로이안, 사용인들이 똘똘 뭉쳐서 레이블라가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샬럿은 보호가 엄청나게 심했는데,

    ‘아가씨. 솜사탕은 녹으면 끝이에요. 이전과 같은 솜사탕이 될 수는 없어요.’

    정말로 사람이 솜사탕처럼 녹을 수 있다고 믿는 듯, 과보호를 하고 나섰다. 그 기세가 무시무시해서 처음 그녀가 암살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만큼이나 당혹스러웠다.

    이러한 이유로 레이블라는 이불을 꼭꼭 싸맨 채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신기한 것은 그 시간이 그다지 지루하거나 힘들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괜찮으냐.’

    무뚝뚝한 듯, 다정한 듯 오묘한 태도를 보이는 비체라발리 공작의 방문과,

    ‘레이블라! 오, 오라버니 왔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오라버니라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몸이 단 로이안.

    ‘아가씨. 제가 연무장을 100바퀴 도는 도중 몰래 왔…… 하아.’

    벌을 받는 중에도 몰래 빠져나와 혼이 나던 클레이오.

    ‘아가씨. 이제는 제가 지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무것도 아닌 그녀를 지키고 싶다고 매일 찾아와 성토하는 아이던.

    ‘아가씨. 이 음식에는 독이 없어요. 제가 먼저 먹어 보았으니 확실해요.’

    음식이 여전히 꺼림칙하다는 사실을 숨겼음에도 눈치껏 알아채고 염려해 주는 샬럿.

    ‘아가씨. 오늘은 너무 귀여우세요. 침대에만 있있어 답답하시죠? 예쁜 잠옷을 입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아가씨께서 꽃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셔서, 공작님께서 예쁘게 꾸미라고 하셨습니다. 어떠십니까?’

    ‘아가씨!’

    그리고 다정하게 대해 주는 사용인들.

    모두의 다정한 마음씨가 느껴졌으니까.

    정말로 매일매일 놀라웠다. 어떻게 저들이 자신에게 이토록 친절할 수 있는지. 힐링물 세상의 주 무대라는 곳에서는 그저 국민 욕받이였을 뿐인데.

    어째서 악역이라고 일컬어지는, 불행의 서사가 차곡차곡 쌓이다 못해 결국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이 가문이 저를 이토록 따스하게 받아 주는 건지. 왜 이곳만이 ‘펠리시티’가 아닌 ‘레이블라’로 여겨 주는 건지.

    그것이 너무나도 달콤하여 자꾸만 마음이 녹아내리려는 것을 다잡기 위해 매일, 매일 무척이나 노력해야 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를 것이다.

    이 세상이 소설 속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는 사실도.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지.’

    입 안의 사탕처럼 달기만 했던 순간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느새 레이블라의 눈앞에는 다시금 현실이 들이닥쳤다.

    ‘내일이면 상단이 떠나는구나.’

    달이 높이 솟은 느지막한 밤.

    달빛이 내리는 창가에 앉은 레이블라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엇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성에 오고 나서부터 오늘까지. 그녀가 다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로이안. 저기 가 보자!’

    ‘샬럿. 저 석상은 뭐예요?’

    ‘로이안! 어디 숨었어!’

    늘 로이안을 숨어서 지켜보던 커다란 나무와 가만히 앉아서 바람을 만끽하던 벤치 자리. 로이안이 그녀를 피해 자주 달아나던 정원 끄트머리의 나무숲 미로. 커다란 물고기가 사는 연못과 시원해서 종종 찾았던 커다란 분수대.

    레이블라는 저 아름다운 풍경이 미래에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분수대에는 새빨간 피가 고여 붉은빛 물을 토해 낼 것이고 본관의 아름다운 석상에는 날카로운 검이 꽂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예쁘게 핀 화원의 흰색 장미는 피로 물들어, 이후에는 관리되지 못해 죽어 버릴 것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이 풍경은 하나같이 슬픈 미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제는 달라지겠지.’

    로이안과 비체라발리 공작이 친해졌으니,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을 것이다.

    로이안이 달라진 이상, 현명하게 비체라발리와 황실 사이를 중재하여 미래를 행복으로 이끌 수도 있었다.

    분명, 모두가 즐겁고 평화로운 세상일 것이다.

    ……그럼, 그 자리에 ‘레이블라 펠리시티’의 자리는 있을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