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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2)화 (62/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2화

    “너, 너 왜 그래!”

    “……가.”

    “뭐?”

    “신경 쓰지 말고 가라고. 저 사람들이 노리는 건 너야.”

    함께 있어서 휘말리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레이블라’라는 인물은 그다지 상관없는 존재였다. 중요한 것은 로이안이었다.

    “가. 빨리.”

    “하지만…….”

    망설이는 그의 뒤로 복면을 쓴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로이안의 키로도 고개를 높이 들어야 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사내였다. 그가 로이안의 얼굴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레이블라가 즉시 로이안을 당겨 감싸듯 안으며 한쪽 어깨를 내어주자, 날카로운 칼이 팔을 스치며 깊은 상처를 내었다.

    사내는 빠른 몸짓으로 레이블라가 숨긴 로이안의 목덜미를 잡았다. 레이블라가 힘껏 로이안을 안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제 검으로 로이안의 배를 찌르려 들었다.

    그 순간, 그의 몸이 먼저 꼬꾸라졌다.

    사내는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가 쓰러진 뒤로 나타난 사람은.

    카시우스 비체라발리.

    무패의 기사였다.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바짝 긴장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아직 품에 있는 로이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음을 숨기기만 하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

    그러니까, 꼭. 말해. 알았지?

    그렇게 말을 건넨 레이블라는 후련하게, 밀려오는 잠의 바다로 빠져들었다.

    * * *

    엄청나게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누군가가 왔다 갔다 하고, 입 안에 무언가를 넣기도 했다.

    분노에 찬 큰 목소리가 들렸다가도, 금방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소란이 일었다가 사라지기를 몇 차례 반복했을까.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목소리들이 점점 또렷해지기 시작할 무렵.

    누군가가 심각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 귀에 꽂혔다.

    “장기 손상이 심합니다. 당장에라도 신관의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심하게 다쳤었나?

    하여튼 황제 그놈은 매일 욕해도 새로운 욕 할 거리가 나타나는 인간이었다.

    어떻게 새파란 새싹에게 그따위 것을 먹일 수가 있지?

    “……당장 신관을 불러라, 당장!”

    이번엔 비체라발리 공작의 목소리였다.

    그가 무척이나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다.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지난 몇 달간 레이블라의 인생은 불 하나 켜지지 않은 암흑 속과 비슷했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두려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슬픔.

    가끔 주린 배를 쥐고 몰래 정원으로 나가 정원수의 과실을 따 먹으며 별을 볼 때마다 문뜩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자신만이 이 세상에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구나.

    당장 죽어도 신경 쓸 사람이 하나도 없겠구나.

    물론, 그 생각은 칼릭스를 만나면서 사그라들었지만, 또 그가 전부인가 싶었다.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칼릭스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비체라발리 공작이 저를 위해 다급히 외치고 있었다.

    주인공 곁의 엑스트라만도 못한 존재.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펠리시티. 그녀를 위해서.

    처음에는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이 세상의 악역이었는데. 어쩐지 레이블라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무겁디무거운 눈꺼풀을 힘껏 들어 올렸다.

    파르르 떨리는 눈썹 너머로 사람들이 있었다.

    카시우스 비체라발리, 로이안 비체라발리, 샬럿. 클레이오. 흰색 옷을 입은 자는 분명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름으로 익숙해진 의사, 필립.

    저 뒤에 있는 사람은 아이던. 집사장인 키어런.

    비체라발리 공작성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나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

    “괜찮으냐?”

    “괜찮아?”

    비슷한 상황을 자주 겪어 왔다. 독을 마시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뜰 때마다, 그녀를 맞이해 준 것은 새하얀 천장뿐이었었다.

    그런데 똑 닮은 두 사람이 비슷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해 주었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낯설고,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 속의 언젠가를 떠올리게 했다.

    너무나도 행복했지만 하루아침에 빼앗겨 버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내 가족과의 시간을.

    “레이블라.”

    비체라발리 공작의 부름에 레이블라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면서 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로이안이 먼저 그 손을 맞잡아 주었다.

    뒤이어 공작을 보자, 공작 또한 그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포개지는 모습을 보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이제는 정말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치료는 마쳤습니다만, 독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약물인 듯합니다.”

    신관이 곤란하다는 투로 말했다.

    ‘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약물’

    그건 카시우스가 그토록 찾던 약물의 특징이었다. 7년 전, 비체라발리의 성에서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간 약물의 유일한 특징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혹시.”

    “예, 그때 그 독과 흡사합니다.”

    신관의 이야기를 들은 카시우스가 참담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되물었다.

    “고칠 방법은?”

    신관이 여상하게 답했다.

    “완벽한 치료는 불가합니다. 그저 정기적으로 망가진 부분을 신력으로 치료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듯합니다.”

    “그러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가?”

    “확실한 건 지켜봐야 알 듯합니다. 가능하면 해독제를 찾아 두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그 말 뒤로 신관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떠나갔다.

    그가 사라진 후에야 레이블라의 손을 잡고 가만히 곁을 지키던 로이안이 물었다.

    “……이 아이, 죽는 겁니까?”

    로이안의 물음에 비체라발리 공작, 카시우스가 침묵했다. 그러자 로이안의 미간에 깊은 굴곡이 생기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는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고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공작에게 다시 물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갑자기 왜 궁금하지?”

    내심, 짐작 가는 가설은 있었다. 그래서 회피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았으니까.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이 더 편했으니까.

    그렇지만…….

    “이 아이가 알려 주고 싶어 했으니까.”

    처음 이 아이를 마주했을 때는 그냥 싫었다. 어느 하나 좋게 봐 줄 구석이 없었으니까.

    에리나를 괴롭히다가 멸문한 펠리시티의 사람이면서, 그런 주제에 에리나의 애정을 받고 이곳에 양녀로 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리나가 물러도 너무 무르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안겨서 나타났다는 소식 또한 황당했다. 주제넘게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자신의 시종이 전하기를, 그녀는 과거 완벽한 펠리시티의 후계자였다고 했으니까.

    그 뒤로도 마냥 미웠다. 아이는 누가 봐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것처럼 보였고, 그것부터가 저와 달랐으니까. 거기다 황녀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한 아이라고 하니 더욱 자격지심이 느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자꾸 밀어내고 못된 소리만 했는데 아이는 조금도 상처받지 않은 듯 오히려 저에게 더욱 다가와 주었다.

    자꾸 챙겨 주려고 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마치, 정말로 피를 나눈 동생이라도 된 것처럼.

    그게 더 거부감이 느껴져서 가증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었는데. 분명, 처음에는 그랬었는데…… 점점 이 아이가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해지기 시작했다. 웃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에리나에게 느낀 감정과는 사뭇 달랐다. 동생이 있으면 이런 마음일까,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아이는 정말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굴기도 했다.

    아이에겐 묘하게 맹한 구석이 있었는데 무언가에 집중했을 때 손에 쥔 것을 떨어뜨린다거나, 멍하게 가다가 화단의 작은 턱에 걸려 휘청거린다거나 하는 종류였다.

    그럴 때면 어딘지 모르게 책임감이 샘솟았다. 정식으로 가족이 된다면, 손이 많이 갈 것 같았다. 그게 귀찮으면서도 싫지 않았다.

    홧김에 집을 나가겠다고 무작정 뛰쳐나왔을 때도 쪼르르 따라와 줘서 솔직히 기뻤는데, 바보처럼 툴툴대기만 했었다.

    그랬는데도 아이는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주었다.

    진심을 담아, 무척이나 다정하고 따뜻하게.

    바보처럼 우는 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비웃지 않았던 착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였는데.

    “이 아이가 무엇 때문에 공작님과 저를 만나게 하려 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위해 대신 다친 이 아이가, 왜 이렇게 아픈지를 알아야 했다.

    그게 어머니를 죽인 자와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더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로이안이 비체라발리 공작을 올려다보자, 그는 평소보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단순한 무표정이라 여겼겠지만 레이블라 덕분에 자주 마주한 끝에, 아버지의 표정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눈썹 끝머리가 살짝 내려간 것을 보니 미어지는 마음을 억누르는 듯했다.

    이내 비체라발리 공작이 참았던 숨을 조용히 토해 내었다. 그리고.

    “네 어머니를 죽인 사람은 리암 커티스 라스텔. 황제다.”

    진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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