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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0)화 (60/92)
  •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0화

    로이안의 시종. 갈색빛 머리카락의 아이.

    ‘그 아이가 황제와 연관이 있었다고……?’

    로이안이 시궁창에서 끌어내어 살길을 만들어 준 아이가 아니었나?

    어떻게 황제의 끄나풀일 수가 있지?

    의아한 나머지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해 보았으나, 확실히 그가 맞았다.

    실소가 나왔다.

    ‘그래, 황제가 어떤 놈인데. 수를 하나만 썼을 리가 없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라면 죄가 없는 사람도 무참히 죽이는 인간이었다. 적으로 간주한 존재라면 더더욱 자비가 없이, 파멸이 찾아올 때까지 물고 놓아주지 않는 작자였다.

    그러니 비체라발리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하나의 수만 썼을 리는 없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에게는 그에 맞는 첩자를 붙이고, 로이안에게는 로이안을 공략할 사람을 따로 붙이는 것이 당연했다.

    ‘황제 이 인간이 로이안을 완전히 갖고 놀았구나.’

    뭐 이딴 쓰레기가 다 있지?

    생각할수록 황제를 혐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이블라는 입을 헹구고 나오면서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몰랐다. 샬럿이 경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가씨.”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들자, 잔뜩 질린 샬럿이 보고 있었다.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녀는 암살자이니 피 냄새에 무척 예민할 터였다. 입 안 가득 고였던 피를 토해 냈으니 샬럿이 충격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기다려 준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말해 달라고.

    하지만 레이블라는 말없이 파리해진 낯빛으로 웃었다.

    “급하게 먹다가 혀를 씹었는지 피가 났어요.”

    “아가씨.”

    “아직도 피가 나는 것 같아요. 연고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

    샬럿의 마음을 모른 척하며, 레이블라는 별관을 향해 걸었다.

    ‘이걸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어.’

    이 상황을 꾸민 것은 바로 황제였다. 그러니 그에게 ‘목숨줄을 내어 준’ 레이블라가 함부로 황제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 리 없었다.

    생각해야 했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터트려야 모두에게 좋을지 조용히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가씨!”

    별관으로 가던 도중, 클레이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멀찍이서 달려오는 클레이오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자 그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아가씨. 얼른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나.

    “무슨 일이에요?”

    “저, 도련님께서 집을 나가겠다고 하십니다.”

    ……갑자기?

    * * *

    클레이오의 안내로 비체라발리 공작의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파국에 치닫기 일 보 직전이었다.

    “도련님!”

    “놔!”

    “도련니임!”

    “손대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다들 꺼져.”

    문 밖으로 나가려는 로이안과 그를 말리려는 가신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부추기는 사람도 하나 있었다.

    “놔두거라.”

    비체라발리 공작이었다.

    “나가고 싶다는데 잡을 이유가 없지. 그냥 보내 줘.”

    “공작님!”

    당황한 헤넌이 공작에게 명을 거둬 달라는 듯이 불렀으나, 그는 냉담했다. 그저 만사가 귀찮은 듯, 아들을 지켜보다가 돌아설 뿐이었다.

    이에 로이안은 더 화가 난 채 검을 쥐고 밖으로 나갔다. 거친 소음과 함께 문이 닫히고, 사용인들은 안절부절못하다 일부는 로이안을 따라나섰다.

    레이블라 또한 일단 그를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에 발끝을 돌렸으나 공작이 붙잡았다.

    “두어라. 알아서 돌아올 터이니.”

    “하지만.”

    “머리가 식게 내버려 둬.”

    “이게 머리가 식을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이곳에 오면서 로이안이 왜 지금 비체라발리 공작과 대치하는지를 클레이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앞으로 공작 부인의 기일을 챙기지 않겠다는 공작의 선언 때문이었다. 그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로이안이 화낼 만해요.”

    비체라발리 공작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황제와 사이가 틀어지고 있는 만큼, 이 예민한 상황에서 ‘공작 부인의 죽음’을 기리는 것은 황제에게 ‘내가 너의 잘못을 알고 있으며, 용서하지 않았다.’라고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복수를 원하는 그로서는 은밀하게 행동해야 했으니, 되도록 대놓고 의심받는 상황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로이안으로서는 공작의 결정에 화가 날 만도 했다.

    자신을 버린 사람이 끝내 죽은 어머니마저 버린다고 생각할 테니까.

    “너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느냐.”

    레이블라는 그의 물음에 선뜻 잘못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잘했다고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빌어먹을 상황을 만든 황제가 몹시 미울 뿐이었다.

    레이블라가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로이안!”

    레이블라는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은빛 머리통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그 얄미운 은빛 머리카락이 갑자기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레이블라는 힘껏 달려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당연히 돌아오는 소리는 좋지 못했다.

    “꺼져.”

    “왜?”

    “꺼지라고.”

    서늘한 목소리로 냉랭하게 밀어내는데, 처음 그에게서 귀를 잘렸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지난 몇 주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순간이었다.

    정말이지 무척이나 허탈했지만, 그래도 입을 꾹 다물고 로이안의 곁을 따라 걸었다.

    처음에는 거슬린다는 듯이 몇 번이나 밀어내려던 로이안도 어느 순간부터는 조용히 걷기만 했다.

    제법 진정되었는지, 성이 난 눈빛도 많이 죽었고, 치아를 꼭 다무느라 단단하게 굳어졌던 얼굴의 근육도 느슨하게 풀린 모습이었다.

    그래서 레이블라가 조심하게 말을 붙였다.

    “어디로 가려고?”

    “루빈디시가 아니라면 어디든지.”

    “정말로 루빈디시에서 나갈 거야? 갈 곳은 있어?”

    “어디든 가면 되겠지.”

    얘가 이런 성격이었나.

    아무리 봐도 치밀한 타입의 섹시 퇴폐미 계략남은 아니었다.

    까칠하고 도도하고 충동적인 사춘기 타입이라면 모를까.

    ‘이러다가 진짜 짝사랑으로 끝나는 거 아니야?’

    황제에게 잔뜩 이용만 당하고 정작 황녀와도 이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허무한 미래인가.

    ‘잠깐만.’

    로이안은 지금 집을 나가고 싶어 하고, 레이블라 또한 이 미친 제국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 차라리 이대로 함께 바리베 왕국으로 가는 게 더 낫지 않나……?

    만약 로이안이 바리베 왕국으로 간다면,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비체라발리의 비극은 모두 해소되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이 죽을 일도 없고, 로이안이 마리오네트처럼 원수에게 휘둘리다 못해 혼인까지 하는 일도 없을 테니까.

    로이안이란 변수가 사라진 만큼 비체라발리 공작의 반역은 차근차근 준비될 것이며, 그 결말은 소설 속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레이블라로서는 기대해 마지않던 상황이었다.

    ‘남주가 탈주한 소설이라니.’

    여주에게 매달리며 사랑을 구걸해야 할 녀석이 탈출하다 못해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즐긴다라.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로이안은 안 가겠지?’

    로이안은 황녀를 무척이나 좋아하니까.

    외가에서 상처를 받은 로이안이 비체라발리로 돌아온 이유는 황녀의 곁에 당당하게 서기 위해서였다. 황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자고. 제자리를 찾아서 그녀에게 도움이 되겠노라고. 그런 마음으로 비체라발리의 후계로서 살기를 택한 것이었다.

    저와 친해진 것만 해도 그랬다. 처음에는 그토록 싫어했지만, 몇 번 황녀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정말 마음을 풀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전하가 던진 돌을 맞았고?’

    ‘그래. 그때 내가 황녀 전하를 위해서 돌을 맞고 쓰러졌지. 덕분에 전하는 안전할 수 있었고. 내가 그거 때문에 공로를 인정받아 여기에 온 거라니까?’

    ‘그랬구나…….’

    황녀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발그레해져서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황녀를 구한 영웅이다!’ 하며 조금 자랑했더니 마치 자기 생명을 구해 주기라도 한 양 고마워했다.

    그토록 황녀를 향한 순수하고 귀여운 애정이 있으니 절대로 제국을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로이안. 그럼 어디 먼 곳으로 갈까? 포스타리모라든가.”

    한 번 물어는 보고 싶었다.

    그가 간다고 하면 좋을 텐데.

    “타국으로?”

    “응. 비체라발리는 뒤 세계를 주름잡고 있으니 제국 전역에 영향을 끼치잖아. 그러니까 해외로 나가는 게 좋지 않아?”

    레이블라의 물음에 로이안이 주억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제국에 있을 거야. 나는 비체라발리니까.”

    자기 자신을 비체라발리라고 칭하는 로이안의 얼굴이 쓸쓸해 보였다. 아마도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들을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는 듯했다.

    나약한 비체라발리. 비체라발리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

    그런 말이 로이안의 자존심을 긁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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