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9화
공작이 식사한다고 하면 클레이오에게 부탁해 로이안을 데려다 놨고, 공작이 산책한다고 하면 로이안을 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로이안이 수업을 마치고 돌아갈 때면, 비체라발리 공작을 끌고 나와 우연을 가장해 그와 만나게 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노골적이었으니 로이안이 모를 수가 없기는 했다.
“네가 뭐 때문에 그러는지 아는데, 하지 마.”
“공작님과 대화하기 싫어?”
“……할 말 없어.”
“정말?”
“그래.”
그런 것치고는 제법 신경 쓰는 거 같은데.
가장 처음, 두 사람이 같이 식사하도록 마주치게 했을 때만 해도 로이안은 자기 아버지를 끔찍하게 여기는 듯했다.
같은 식탁에 앉는 것조차 싫다는 듯이 피했었고, 황급히 피했기에, 같은 공간에 머물렀던 시간이 채 1분이 되지 못했을 정도였다.
검술 훈련이 아니고서야 붙을 이유가 없다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를 보며, 이건 안 되려나, 했는데.
어느 날부터 조금씩 로이안이 달라졌다. 피하는 것이 자존심 상했는지 눈을 부릅뜨고 제자리를 지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자리를 파하고 나면 욕을 먹은 것은 레이블라였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큰 변화였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로이안에게 작은 버릇이 생겼다.
공작성 안을 돌아다니면서 저도 모르게 주변을 훑어보는 버릇이었다. 근처에 공작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그는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자세히 그를 관찰하는 레이블라는 알 수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의 문이 열리고 있다고.
어떨 때 보면 길을 잃어버린 아이가 부모의 그림자를 찾는 것 같기도 했다.
비체라발리 공작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딱히 시선조차 제대로 주지 않던 그였지만, 요즘 들어 로이안이 무얼 하는지 살피는 모습이 관찰됐다. 헤넌이 안내하지 않았음에도 제 발로 레이블라와 로이안이 있는 곳으로 찾아올 때도 있었다.
굳이 말을 붙이지는 않은 채 그저 자주 마주치는 것일 뿐이었지만, 제삼자의 눈에서는 보였다.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그 좋은 분위기를 놓쳐선 안 될 것 같아, 레이블라는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무려 ‘거래’도 제안했었다.
‘제가 좋은 투자처를 알려 드리고 싶은데요.’
‘투자처?’
‘들으시면 저에게 금화 1000골드는 주고 싶으실 거예요. 그 수천 배는 벌어다 드릴 정보니까요!’
‘사기군.’
……처음에는 사기꾼 취급을 당했지만. 뭐, 어쨌든.
그 정보가 마석 광산에 대한 것이란 소리에 당장 확인 절차에 들어갔고, 그에 따른 일부 선금도 받았으니 바리베 왕국으로 가는 데 필요한 돈은 모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착실히 탈출 준비도 진행되어 가고, 로이안과 비체라발리 공작 또한 분위기가 나아지고 있었기에 레이블라로서는 기분이 좋았다.
이만큼 일이 잘 풀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탈출 시기가 바짝 다가온 지금, 조금 더 과감한 작전을 펼쳐 보기로 했다.
“나, 밖에 나가 본 지 오래됐는데.”
“그래서.”
로이안이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나이프질을 하며 무심하게 답했다. 레이블라는 생글 웃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나랑 피크닉 가 주면 안 돼?”
로이안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가 ‘해 달라’는 건 ‘꼭 하겠다’는 의미와 같다는 것을 지난 며칠간의 상황으로 익히 깨달은 바일 테니까.
“가고 싶다. 피크닉.”
사실 한 번 실패한 적이 있는 이벤트였다. 로이안이 이상한 이유로 화를 내서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망한 탓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피크닉만큼 좋은 것이 또 없었다. 대화의 질이 좋아지려면 역시 분위기가 깔려야 하니까.
해 질 녘 노을을 보면서 호수 위 조각배 위에 자리한 두 사람. 무언가 속에 있는 말을 토해 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꿍꿍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로이안이 모를 리 없었다. 그가 단칼에 거절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하고 싶은데.”
“하지 말라면 하지 마.”
“그래도 좋지?”
“헛소리하지 마.”
“입만 열면 하지 말래.”
툴툴대면서도 그를 향해 웃자, 로이안이 어이없다는 듯이 따라 웃었다. 이것 또한 그를 쫓아다니면서 직접 체감한 변화 중 하나였다. 아마도 본인은 모를, 무의식중에 나오는 웃음인 듯했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그 미소에 대해 굳이 아는 체하지 않았다. 언젠가, 그 스스로 지금 자신이 ‘웃고 있었구나.’ 하고 느낄 때까지. 지금 이 생활이 무척이나 즐거웠노라고 추억하게 되는 날이 올 때까지. 조용히 간직하기로 했다.
그때, 포크로 고기를 찍으려던 레이블라가 멈칫했다. 포크를 내려놓자, 로이안이 그 소리를 듣고 레이블라를 보았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너 왜…….”
“어쨌든 내일 오후에 갈 거야. 시간도 비워 뒀어. 내일 수업은 숙제로 대체했거든.’
“야!”
“그럼 오후에 검술 훈련 있을 때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너……!”
“간다! 오늘은 낮에 바쁘니까, 외롭더라도 참고 기다려, 알았지?”
“오지 마!”
“에이, 기다릴 거면서. 누나 간다!”
“너 나보다 세 살 어리잖아!”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로이안을 보며 키득키득 웃음을 지은 레이블라가 그를 뒤로한 채 식당을 빠져나왔다.
로이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밥 먹자더니 혼자 가는 거냐, 하고.
며칠 함께 지냈다고 목소리만으로도 툴툴대는 그의 얼굴이 선연하게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분명 입술을 삐죽이면서 눈을 내리깔고는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내가 섹시 퇴페미 남주를 강아지로 만들어 버린 것 같은데.’
그 변화가 황녀의 취향이 아니면 어떡하지. 우리 로이안, 나 때문에 짝사랑만 하면 미안한데.
바리베 왕국으로 떠나기 전, 소설에 나왔던 황녀가 로이안에게 심쿵하는 포인트를 적어서 몰래 그에게 전해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생각과 함께 레이블라가 귀퉁이를 돌아 작은 방에 들어갔다. 종종 본관에 오면 찾는 화장실이었다.
뒤따르는 샬럿을 바라보자, 그녀가 여태껏 그러했듯 웃으면서 답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가씨.”
레이블라가 그녀에게 웃어 주고는 홀로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가자마자 세면대가 보였다.
그 앞에 선 레이블라가 조용히 입술을 벌렸다. 그와 동시에 주르륵, 입 안에 고여 있던 피가 새어 나왔다.
‘내 아까운 피…….’
바리베 왕국으로 가려면 체력이 필수인데.
계속 새어나는 피를 보고 있자니 빈혈이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로이안은 눈치채지 못했겠지?’
로이안의 앞이라고 차오르는 피를 얼마나 참았는지.
그가 어머니가 독을 먹고 쓰러졌을 때 곁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힘껏, 정말 힘껏 참아서 이곳까지 왔다.
‘그나저나 이 피는 왜 나는 거지?’
황제가 준 독 때문은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한두 달은 먹을 수 있는 완화제를 주었고, 레이블라는 그 그걸 꾸준히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남은 것은…….
레이블라는 조금 전 식사 때 제 접시에 놓여 있던 음식을 떠올렸다. 끄트머리에 있었던 초록빛 풀.
토도리아.
그건 레이블라가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풀이었다. 그 풀 때문에 황녀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으니까.
‘그냥 배탈이 나는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
혹시, 그게 황제가 준 독의 부스터 역할을 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토도리아가 제 접시에 나타난 이유는 명확했다.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
황제의 경고였다.
‘누굴까?’
누구기에 소공자의 식사 자리에, 그것도 레이블라의 음식에만 함부로 풀때기를 넣어 둘 수가 있는 거지?
황제가 첩자를 붙이겠다고 이야기를 했었기에 그 정체를 밝히고자 계속 살피긴 했었다.
비체라발리 성의 사용인들은 본인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해서 정보를 얻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들은 바에 따르면 대다수는 아주 오래전부터 공작성에 머물렀다고 했다. 최근 고용한 사람들은 비체라발리 공작의 명령으로 얼마 전 모두 해고되었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끄나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지?’
대놓고 의심되는 자는 모두 잘라 버렸으니, 남은 것은 ‘변수’가 되는 존재들이었다.
가장 의심되는 것은 2부에서 나오는 ‘로이안의 협력자들’이었다.
그들에 관해서 자세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공통점은 비체라발리 공작에게 원한을 품고 있으며 공작을 싫어하는 만큼 황실에 우호적인 인물이라고 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